CELEBRITY

삶이 가사가 되는 사람들

솔직한 게 힘이라면 내 노래는 나의 무기. 자기 삶을 가사로 뱉는 래퍼들에게, 힙합이 멋있지 않다는 어느 노랫말은 아무 힘이 없다.

프로필 by 고영진 2024.03.05
나는 살아가 지금 난 지금을 원해 내 모두를 거네 환청은 겨우 사라져 그들은 과거의 존재 - 언텔 ‘아기휴먼’ 中

언텔

먼저 고백할 게 있다. 난 힙합을 잘 모른다. 막 10대가 되었을 때부터 음악을 가까이했지만 주된 관심사는 클래식이나 재즈 쪽이었다. 힙합에 발을 들인 건 우연히 다이나믹 듀오와 도끼의 음악을 듣고 나서부터다. 틀을 막 깨부수듯 자유로운 힙합은 어린 나에게 꽤나 충격이었다. 좋아하는 마음은 듣는 것을 넘어 가사를 쓰고 뱉도록 만들었다. 좋아하는 걸 꾸준히 파고들면서 지금까지 왔다. 어쩌면 갓 10대가 된 그때나 지금이나 힙합 신에 대해 갖고 있는 지식의 수준은 비슷할지도 모른다.
확실히 아는 게 하나 있긴 하다. 힙합은 나이와 경험의 폭을 기준으로 급을 나누지 않는다는 것. 오로지 능력으로 인정하는 문화라는 것. 그래서 나처럼 아주 작고 연약한 사람도 용기를 갖고 기꺼이 도전하게 만든다. 이만큼 공평한 무대가 또 어디 있을까? 내가 이렇게 랩에 푹 빠져 있는 이유일 수도 있겠지. 하고 싶은 얘기를 전하는 수단은 랩 말고도 많겠지만 아직 이렇게까지 매력적인 방법을 찾진 못했다. 무엇보다 지금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이고.
내 음악을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 그런 건 없다. 매 순간 느끼는 감정에 충실하면서 치열하게 살아온 사람의 흔적 정도로 읽히면 좋겠다. 나에게 랩은, 가사는 사진이다. 순간 순간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장치. 산만하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그게 내 음악의 매력일 수도.

레더 재킷은 Harley Davidson. 이너 니트, 귀고리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레더 재킷은 Harley Davidson. 이너 니트, 귀고리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음악을 하다 한동안 세상의 잣대와 편견에 부딪혀 무너져 있던 때가 있었다. 그땐 진짜 시간이 멈춰 있는 것 같았다. 지금을 살아내지 못하고 이미 지나갔거나, 아직 오지 않은 시간에 매달려 있었으니 당연한 결과였겠지. 내가 만든 틀에 날 가둬 놓고 음악을 하는 건 일종의 습관이었다.
그 틀을 벗어던졌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앨범이 드디어 세상에 나왔다. 제목은 <ANIMAL>. 작년 12월에 발매한 내 두 번째 정규 앨범이다. 이건 그야말로 내 밑바닥까지, 가감 없는 진짜를 드러낸 최초의 작업물이다. 지금까지 지향해온 건 ‘진짜 나’를 담은 음악이었는데, 20대의 중턱을 바라보는 지금에서야 바라던 지점에 가까워졌다.
“떠나가고 싶어 멀리로/ 아무도 찾을 수 없도록/ 사라지고 싶어 조금도/ 그리워할 수조차 없게”. 타이틀 곡 ‘이사철새’는 철저히 내 경험담이다. 열아홉 때부터 수없이 이사를 다니며 느낀 공허함과 쓸쓸함에 대해 썼다. 타인의 시선이나 스스로 만들어낸 부담감은 더 이상 날 옥죄지 않는다. 사실 사람들은 대체로 남에게 관심이 없잖아? 이제 음악을 만드는 행위가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내 삶의 일부가 된 것 같다. 내 상승곡선은 지금부터 시작이야.

천지 빛나네, 직선 떨어지는 섬광에 눈 멀기는 천만에, 기적 벌어져도 초연해 - 스월비 & gamma ‘MILLAN’ 中

스월비
내가 생각하는 랩은 ‘spoken word poetry’ 즉, 말로 쓰는 시다. 때론 아주 드라이한 일도 극적으로 써내는 것이 래퍼의 주요 자질이라는 점에서, 만화를 소비하고 즐기는 나의 라이프스타일은 분명 가사를 쓰는 데 도움이 된다. 소년 만화는 극적인 전개가 포인트다. 주인공에겐 늘 시련이 있지만 헤쳐나갈 동료가 있다. 우정, 용기, 함께 견디고 싸우고 이기고 배우는 과정. 이 모든 이유를 뒤로하고서라도 봐야 하는 이유를 말하자면, 그냥 내가 제일 빠져 있는 취미라서 그런 거지 뭐.
하고 많은 공간 중 피겨숍에서 사진을 찍겠다고 한 것도 그래서다. 난 이곳에서 가장 신이 난다. 머무는 것만으로도 가슴 뛰는 장소가 있다는 건 꽤나 멋있는 일 아닌가? 여기서 가장 나다운 얼굴이 나올 것이라 생각했다.

톱은 Masu. 팬츠는 Zara. 벨트는 Y/Project. 신발은 BB IMP.
‘인류애’와 ‘선심’은 내 모든 노래의 뿌리다. 그렇다기엔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과격한 단어가 많지만, 그건 아마 내가 영감을 얻을 때 폭력적이리만치 강한 충격을 느낀 뒤 흡수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누군가를 조롱하고, 불특정 다수를 놀리는 듯한 적나라한 가사라도 거기에 진짜 ‘hate’는 없다. 힙합 가사를 쓴다면 속된 말로 ‘짜치는’ 것일지라도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만든 노래로 도대체 뭘 말하려는 거냐면, 그냥 내가 생각하는 멋을 보여주고 싶은 거다. 난 내가 15살 때 쓴 곡을 봐도 뭘 멋있다고 느껴서 쓴 건지가 보인다. 표현하는 방식은 좀 구릴지라도 그 저변에 깔린 동경의 대상은 지금 생각하는 멋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마치 터널 비전 같은 거다. 하지만 뭔가 아쉽다. 아직 그 ‘멋’이란 게 뭔지 뾰족하게 말을 못하겠어서. 요즘 새 앨범을 작업하면서 그걸 찾아가는 중이다. 일종의 소거법을 쓴다. 지난 타임라인을 순서대로 훑어보면서 싫었던 걸 쳐내는 거지. 마지막엔 뭐가 남아 있을까? 나도 궁금해.

Credit

  • 사진/ 송시영
  • 헤어 & 메이크업/ 박정환, 남다은
  • 스타일리스트/ 진준형, LSB
  •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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