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아를에서 이우환을 경험한다는 것

이우환 아를 미술관은 ‘오래된 미래’로서의 아를을 경험할 수 있는 첫 번째 목적지다.

프로필 by BAZAAR 2023.12.05
 
2021년 10월 30일부터 2022년 6월 12일까지 아를 알리스캉(Les Alyscamps)에서 열린 전시 «레퀴엠(Requiem)» 전경. Courtesy Lee Ufan Arles. Photo: © Claire Dorn.

2021년 10월 30일부터 2022년 6월 12일까지 아를 알리스캉(Les Alyscamps)에서 열린 전시 «레퀴엠(Requiem)» 전경. Courtesy Lee Ufan Arles. Photo: © Claire Dorn.

프랑스 남부에 위치한 아를에는 ‘고흐가 사랑한 도시’ 이상의 수식어가 필요하다. 내가 이 도시를 경험하는 방식 역시 ‘현재적 단서 찾기’에 가깝다. 요컨대 “고흐는 브랜드가 아니다”라는 팻말을 들고 개관 기념 퍼레이드를 한 고흐 미술관 같은 공간 말이다. 흥미롭게도 여기에는 정작 고흐 작품이 몇 점 없다.  <밤의 카페 테라스>나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 같은 유명작을 대형 미술관에 양보한 대신 그의 생애와 작품이 현대미술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그 동시대적 연결고리를 다양한 전시를 통해 찾고 있다.(올해는 고흐만큼 외롭게 분투했을 1960~70년대 여성 추상작가들의 걸작을 만날 수 있었다.) 한편 전면이 유리인 반 고흐 미술관 같은 현대 건축물을 중세의 흔적보다 더 찾기 어려운 아를에서 우뚝 솟아 반짝이는 루마 아를 건물은 단연 새로운 랜드마크다. 작가들을 발굴, 후원해온 컬렉터 마야 호프만과 예술을 사랑하는 유미주의자 프랭크 게리의 합작품인 이 미술관은 굽이치는 론강의 풍경과 현대미술의 미래를 품으며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하지만 파리에서 기차로 4시간 반을 달려 아를에 도착할 때마다 나의 발걸음은 16세기에서 18세기에 지어진 ‘호텔 베르농’으로 향하곤 한다. 우직하게 닫힌 나무 문을 열고 들어서면, 이 고도시를 현대미술계에 또다시 부상시킨 이우환의 세계가 펼쳐진다.대대로 골동품 사업을 해온 데르뷔유 가의 실제 대저택이었던 3층 건물은 지난 2022년 4월 이우환 아를(Lee Ufan Arles)이라는 미술관으로 되살아났다. 2010년 나오시마와 2015년 부산시립미술관에 이어, 세 번째로 그의 이름을 따 마련된 공간이다. 앞의 두 미술관에 비해, 이곳은 유난히 고요하다. 예컨대 인산인해의 전시장에서 마크 로스코의 위대한 작품들을 보다가 결국 포기하고 나와버린 나 같은 사람에게는 최적인 공간인 셈이다. 이우환의 예술은 단순한 조각이나 회화 그 이상, 보이지 않거나 숨겨진 세계를 드러내는 모종의 장치와도 같기에 그는 종종 개념미술가로 정의된다. 이 단순하면서도 심오한 철학을 이해 내지는 느끼기 위해서는 우선 그의 작업과 독대해야 한다. 방해꾼은 물론이고, 해설자도 필요 없다. 그의 간결한 표현 방식은 작품을, 세상을, 그리고 나의 삶을 새로운 시선으로 관찰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러므로 침묵 속에서 조용한 기운을 발하는 이우환의 작품을 본다는 건 그 시공간에 머무는 법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수용하고 터득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예술의 추상성과 모호함에 주눅 들지 않고 내면의 흐름을 자유롭게 두는 사이, 어느덧 세상의 그것과는 다른 속도로 흐르는 시간층으로 진입하게 된다. 
 
소리와 빛을 품은 조각 <Relatum - Infinity of The Vessel>, 2022. © Lee Ufan Arles

소리와 빛을 품은 조각 <Relatum - Infinity of The Vessel>, 2022. © Lee Ufan Arles

그때 그 시절 고풍스러운 문 너머의 로비는 이름난 거상을 만나러 온 손님들로 북적거렸을 것이다. 리셉션과 소담한 아트숍으로 변모한 이곳에서 자기 일을 하던 직원이 인기척에 짧은 인사를 건넨다. 부산스러운 환대도, 길게 늘어선 줄도 없어 누군가의 낯설고도 따듯한 집에 들어서는 느낌이다. 중세와 현대 중간쯤 되는 공간을 두리번거리던 관객들이 맨 먼저 건축가 안도 다다오와 협업한 조각 <대지 아래 하늘>을 만나도록 한 데서는 작가의 바람이 읽힌다. 타인의 존재를 인식하고, 보는 걸 넘어 경험하게 하는 열린 조각. 건축가의 인장 격인 노출 콘크리트의 표피와 나선형 모양의 구조로 된 작품 안으로, 딱 한 사람을 위한, 길지도 않지만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통로를 더듬더듬 들어가다 보면 금세 발 아래에 구름을 담은 하늘 영상을 마주하게 된다. 오롯이 혼자인 공간에서 시시각각 다른 풍경이 되는 하늘을 내려다본다. 나는 이 자리에 그대로 있지만,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은 변화한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가능할 것이다. 작년 이 하늘을 내려다볼 때 내 마음은 어땠었나, 생각했다.<대지 아래 하늘>로 시작하는 1층의 각 방은 작가의 대표 연작인 <관계항(Relatum)> 조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우환은 자기 작업에 ‘창조’라는 표현을 배제하고, 스스로의 존재를 지움으로써 작품과 작가의 절대성을 경계한다. 즉 예술작품이란 외부와 관계 맺고, 보는 사람과 세계를 이어주는 매개의 역할을 한다는 것, 공간과 관계 속에서 규정된다는 것이 <관계항>의 요지다. 제 목소리를 내는 사물, 자연의 산물인 돌과 산업화의 결과물인 철판을 조우하게 함으로써 어떤 관계를 생성하고, 관계의 일부가 된 관객이 자기 존재와 가치를 숙고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 10여 점의 조각은 그저 인식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나의 신체가 지각하고 반응하며 관계를 맺는 일종의 장소를 자처한다. 나만을 위한 무대가 되기도 하고, 나를 깨어지고 부서지는 현상을 지켜보는 타인에 위치시키기도 하며, 그 작품과 다를 바 없는 처지에 놓기도 하고, 하늘과 땅을 이어내는 전지전능한 존재로 만들기도 한다. 미로처럼 연결된 각 방을 다니는 내내 대립하고 의지하고 협업하고 초월하는 ‘우리’와 ‘세상’이 떠오른다.보통 이우환의 작업은 빛과 그림자, 반사된 형상, 자갈 밟는 소리 등 사물과 작품 밖의 요소를 통해 보는 이의 경험을 구성한다. 내게 혼자가 아님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Relatum - Infinity of The Vessel>은 예외적으로 스스로 움직임과 소리를 낸다. 물이 가득 담긴 넙적한 그릇에 돌이 살포시 기대서 있고, 수면 위로 물방울이 똑똑 떨어진다. 물방울이 희미한 물결을 만들고, 물결은 잔잔한 파장을 일으키고, 파장은 천장과 벽에 추상적 형태의 움직이는 그림자를 그린다. 태양 같기도, 눈물 같기도 한 두 개의 원형 그림자는 방 전체를 채운 은은한 오로라 모양 빛 물결의 호위를 받는다.
 
1980년대 작업한 <바람과 함께(With Winds)> 시리즈. © Lee Ufan Arles

1980년대 작업한 <바람과 함께(With Winds)> 시리즈. © Lee Ufan Arles

아를의 기저에는 이야기가 존재한다. 이야기의 기저에는 이미지가 존재한다. 그리고 이미지의 기저에는 미지의 세계가 존재한다. ‐ 이우환 
 
건축가 안도 다다오와 협업한 <관계항 - 대지 아래 하늘(Relatum - Sky underneath)>, 2022. © Lee Ufan Arles

건축가 안도 다다오와 협업한 <관계항 - 대지 아래 하늘(Relatum - Sky underneath)>, 2022. © Lee Ufan Arles

소리와 빛, 움직임이 전율하는 이곳에서는 생각이 많아진다. 이 빛의 패턴은 과연 무엇이 만들어내는 것일까. 빛을 반사하는 소재인 스테인리스 그릇일까, 그 안에 담긴 물일까, 수면에 균열을 만들어내는 물방울일까, 그릇에 기대어 진동을 조율하는 돌일까, 태연하게 모든 걸 비추고 있는 조명일까. 어디까지가 작가의 의도이고 어디까지가 자연의 현상인가. 작품에서나, 세상에서나 이 연쇄적인 현상을 구분하는 것이 가능한가. “나의 예술관은 한마디로 무한에의 호기심의 발로이며 그 탐구이다. 무한은 자기로부터 출발하여 자기 이외의 것과 얽힐 때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자신의 작품이 파편이길 자처함으로써 완결된 전체 너머 무한의 세상을 향하고자 하는 작가의 말을 떠올린 후에야 나는 비로소 이 방을 나올 수 있었다.동시에 이는 서울에서 태어나 일찌감치 일본, 프랑스, 미국 등을 오가며 활동해온, ‘최초의 노마드 예술가’ 격인 이우환이 아를을 미술관 터로 선택한 이유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물론 다른 거장들처럼 뉴욕을 염두에 두기도 했다. 하지만 작가와 프랑스와의 인연은 문화예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상을 받기 훨씬 전부터 각별했다. 1980년대부터 몽마르트르에 작업실을 운영해온 이우환은 2013년 아를에서 «부조화(Dissonance)»라는 개인전을 열었고, 이는 아를에 본거지를 둔 세계적 출판사 악트 쉬드(Actes Sud)가 발간한 작가의 첫 번째 프랑스어 논문의 밑거름이 되었다. 이런 행보는 베르사유 궁전의 개인전(2014), 퐁피두 메츠센터의 개인전(2019) 등으로 이어졌다. 계획을 구체화할수록 치열하고 공격적인 뉴욕이 아니라 두터운 역사에 바탕한 유럽이 적합하다는 결론에 가까워졌다. 무엇보다 그는 아를의 역사와 영성에 매료되었고, 독특한 시공간에서 무한으로 향하는 단서를 발견했다. “로마 유적들 사이 시간이 아스라히 소실되는 듯한 특유의 분위기가 특히 매력적”이라는 작가의 소회는 미술관 공사 과정에서 발굴, 전시된 로마 황제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흉상의 존재로 시각화, 실체화되었다.미술관 문이 열리기 전인 2021년 가을, 알리스캉이라는 유적지에서 열린 전시 «레퀴엠»은 작가가 이 도시에 보낸 헌사였다. 알리스캉은 ‘죽은 자들의 샹젤리제’라 불리는 고대 공동묘지로, 줄지어 선 텅 빈 석관과 키 큰 포플러나무가 만들어낸 길이 장관이다. 수천 년 전 삶과 죽음의 경계를 목격한 인간들이 걸었고, 파국을 예측하지 못한 고흐와 고갱이 다정히 산책했을 길. 후대의 예술가는 삶에 앞서 죽음이 도사리는 <관계항>을 이 길에 설치했다. 기다란 거울 형태의 작품이 단풍 든 나무와 하늘을 비추었고, 군데군데 놓인 돌이 시간성에 방점을 찍었으며, 예배당 바닥에는 산산조각 난 얇은 돌조각이 깔렸다. 같은 해 세상을 떠난 동료 예술가 크리스티앙 볼탕스키를 애도하고자 나무에 수십 개의 종을 매단 작품 <죽음은 어디에나 존재한다>를 선보이기도 했는데, 죽음을 깨우는 스산한 종소리와 삶을 실은 나뭇잎 부딪치는 소리의 협연은 아를의 예술사에 각인되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관계를 탐구해온 이우환이 이곳에서 느꼈을 낯섦과 두려움을, 나는 짐작할 수 없다. 분명한 건 죽은 것과 살아있는 것 사이의 대화, 시공간을 초월하는 차원의 탄생이 바로 아를이기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자갈 밟는 소리와 스테인리스스틸 소재의 조각에 반사된 공간이 인상적인 <Relatum - Path to Arle>, 2022 © Lee Ufan Arles

자갈 밟는 소리와 스테인리스스틸 소재의 조각에 반사된 공간이 인상적인 <Relatum - Path to Arle>, 2022 © Lee Ufan Arles

1층이 선문답으로 가득 찬 조각들의 공간이라면, 2층은 이우환 작업의 출발점인 모노하 정신을 평면으로 확장한 회화들이 연대기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1960년대 말부터 이우환은 실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놓아두고, 공간(세계)과의 관계 속에서 예술을 규정하고자 한 이 전위예술의 흐름을 선두에서 이끌었다. 그리고 1970년대 초부터는 조각의 철학에 수행성을 더한 회화 작업을 시작한다. 작가의 붓질은 재료나 표면이 소진될 때까지 그어낸, 돌이킬 수 없는 고유한 순간으로 치환된다. 공간에 돌을 놓아두듯 캔버스에 점 혹은 선을 그려 여백과의 관계를 묻는 <점으로부터>와 <선으로부터> 연작, 점과 선을 자유로이 변주함으로써 통제할 수 없는 요소를 탐구한 <바람으로부터>와 <바람과 함께> 연작, 칠해진 부분과 칠해지지 않은 부분의 강렬한 대화를 촉발하며 존재와 부재에 대해 성찰하는 <조응>과 <대화> 연작까지, 시간의 흐름과 반복 그리고 차이의 개념을 끌어안는다. 손과 붓, 색채와 캔버스, 공기와 시간 자체에 집중하는 유기적 만남의 힘을 도출하는 행위로서의 회화작품들은 마치 숨을 쉬는 듯한 운율과 생동감으로 형형하다.사실 이우환 아를의 투어는 지하에 위치한 비밀스러운 동굴 같은 전시장에서 마무리해야 제격이다. 철저한 예약제로 운영되는 데다 개인 촬영이 엄격하게 금해진 이곳에 들어서면 스산한 고요함에 나도 모르게 숨을 죽이게 된다. 어둑한 공간에 한참 있다 보면 비로소 주변이 보이기 시작한다. 바닥에 직접 그린 <Response-Excavated I>은 언뜻 일필휘지의 거대한 붓터치 같지만, 실은 오랜 시간 덧칠을 반복해 완성한 작업이다. 건물의 근간 혹은 뿌리와도 같은 공간에 단단히 새겨진 회화 겸 조각은 이 미술관 역시 아를의 다른 장소와 마찬가지로 “발굴된 유적지”임을 피력한다. 이우환 아를의 정체성이 바로 이 지하공간에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은, 작가가 직접 벽에 쓴 시 ‘The Bottom’ 덕분에 더 설득력을 얻는다. “아를의 기저에는 이야기가 존재한다 / 이야기의 기저에는 이미지가 존재한다 / 그리고 이미지의 기저에는 미지의 세계가 존재한다.” 아를에는 고흐조차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복합적인 정체성이 지층처럼 깔려있다.도시의 이야기와 이미지에 겸허히 귀 기울이며 미지의 세계를 꿈꾸는 이우환 미술관은 작가 재능뿐만 아니라 자연, 존재와 부재, 흔적, 물성 등의 주제를 오롯이 담고 있다. 예술로 세상과 관계 맺고, 자기 존재의 의미를 찾고자 한 이우환의 60여 년 역사가 봉인되어 있는 셈이다. 그러나 정작 그는 자기 생을 관통하는 작품들을 모아둔 미술관을 결코 과거에 붙잡아둘 생각이 없어 보인다. 이우환 아를은 프랑스의 대표 뷰티 브랜드인 겔랑과 협업해 ‘예술과 환경상(the Art & Environment Prize)’을 제정했고, 올해 파리 아트 바젤 기간에 첫 수상자로 프랑스 아티스트 자브릴 부케나이시를 시상했다. 인간에 대해 사색하는 다섯 명의 예술가를 선정, 타자와 고독, 우울감과 애도를 이야기하는 별도의 전시도 선보인 바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조응의 예술’을 추구한 작가의 미술관은 아를의 평범한 사람들, 그를 여전히 잘 모르는 이들을 향해 먼저 열려있다. 언제든 와서 숨 쉬고, 느끼고, 사유하고,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새로운 성격의 쉼터로서, 상호보완적인 예술 경험을 선사하고자 하는 현재적 바람은 거장의 명성에 전혀 누가 되지 않는다. 미술관의 한 관계자는 어떤 패션 디자이너가 작품에서 영감 받아 몇 벌의 드레스를 만들었다는 이야기, <점으로부터>에 매료된 교사가 학생들과 함께 이우환의 기법을 모사하는 수업을 진행했다는 등의 소담스러운 후기를 들려주었다.예술은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삶의 단편이 된다. 그렇기에 ‘살아 있는 공간, 삶을 위한 공간, 나눔을 위한 공간’이라는 미술관의 모토는 결코 허황되지 않다. 만약 이우환 아를만이 이룰 수 있는 업적이 있다면, 전 세계 미술계에서 추앙받는 이우환이라는 작가를 과거와 명성으로부터 ‘발굴’해내고, ‘오래된 미래’인 아를을 현재에 되살리는 일일 것이다.   
 
윤혜정은 국제갤러리 이사로 활동 중이며, 예술에 관한 다양한 결의 글과 인터뷰를 여러 매체에 기고하고 있다. <나의 사적인 예술가들>, <인생, 예술>을 펴냈다. 

 

Credit

  • 글/ 윤혜정
  • 사진/ ⓒ 이우환 아를, 국제갤러리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