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솝의 세계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이솝의 세계

꾸밈없음에 조용히 도달하는 사람들.

BAZAAR BY BAZAAR 2023.07.27
 
이솝 우화를 좋아한다. 짧으면 한두 문장, 길어봤자 한두 문단의 이야기 속에 생의 본질적인 도덕과 미학을 농축하기 때문이다. 브랜드 이솝(Aesop)이 추구하는 바도 마찬가지다. 멜버른에서 만난 제품 개발자들, 스토어 직원을 포함한 전 세계의 이솝피언들은 결코 수다스럽지 않았다. 이들은 천만 마디의 능변이나 화려한 미사여구 대신, 단순명료한 격언의 목소리로 삶의 진정한 풍요를 전하는 메신저를 자처한다.

 
이솝 사우스 야라

이솝 사우스 야라

시작의 이솝
이솝의 이야기는 1987년 호주 멜버른의 해안가 지역에서 아주 평범하게 시작된다. 젊은 헤어 디자이너 데니스 파피티스(Dennis Paphitis)는 자신의 살롱 ‘이메이스(Emeis, 그리스어로 ‘우리’를 뜻함)’에서 주말 동안 일해줄 수 있는 직원을 구하다가, 인문학을 공부하던 대학생 수잔 산토스(Suzanne Santos)를 만났다. 식물성 성분을 제대로 이해하고 활용하는 기업이 거의 없던 30여년 전, 자극적이고 화학적인 성분의 헤어 제품을 개선하고 싶었던 데니스 파피티스는 일찍이 에센셜 오일이 피부와 머리카락에 주는 효용에 눈을 떴다. 데니스 파피티스와 수잔 산토스는 호주와 미국을 넘나들며 각종 콘퍼런스와 클래스, 실험실에서 다양한 오일의 효능과 응용법에 정신없이 파고들었는데, 수잔 산토스는 그 시절의 에너지가 마치 러너스 하이(runner’s high)와 같았다고 회상한다. 그렇게 LA의 실험실에서 생화학자와 함께 만든 첫 헤어 제품이 탄생한 후 갈색 병을 써서제품 포뮬러를 안정화시키는 과학적인 접근을 거쳐 보디와 스킨케어로 라인을 확장했다. 데니스 파피티스와 수잔 산토스의 제품은 입소문을 탔고, 호주의 안목 좋은 백화점 관계자가 그들에게 입점을 제안하게 된다. 그렇게 이솝은 에센셜 오일이 뷰티업계의 판도를 바꾸는 시작점에 섰다. 보다 문학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를 담은 ‘이솝’이라는 새로운 이름과 함께.
 
이솝 플린더스 레인

이솝 플린더스 레인

 
이솝 콜린스 스트리트

이솝 콜린스 스트리트

 
이솝 피츠로이

이솝 피츠로이

공간 미학
이솝, 하면 떠오르는 것에는 무형과 유형의 심상들이 있다. 특유의 쌉싸름하고 향긋한 아로마, 식물성 오일과 과학적 포뮬러, 문학과 예술에 대한 깊은 찬미, 지속 가능성에 대한 사려 깊은 탐구,독특하 고 지적인 캠페인은 이솝의 무형적 미학을 이루는 것들이다. 하지만 보다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유형적 이미지는 바로 실험실 약병 같은 제품 패키지, 음계처럼 규칙적이고 흐트러짐 없는 진열, 낮거나 높은 천장 아래 포근하고 어두운 조명, 나무·철재·석재 고유의 색과 질감을 살린 인테리어와 같은 시각적 요소들이다.
수잔 산토스가 들려준 이솝의 초기 스토어 이야기는 이솝에게 처음부터 디자인이 얼마나 중요한 DNA였는지를 흥미롭게 설명한다. “2003년 세인트 킬다(St. Kilda)에 열었던 첫 매장은 길가에서 13개의 계단을 내려가야 안을 엿볼 수 있었어요. 길에 난 구멍 같은 입구로 들어오는 사람들은 결국 호기심이 많은 사람일 수밖에 없었죠. 밖에서 봤을 때 내부에 대한 그 어떤 힌트도 없었으니까요. 데니스 파피티스는 처음부터 디자인 소품에 과감하고 파격적인 지출을 아끼지 않았어요. 고작 매장 입구에 깔아두는, 손님들이 밟고 들어오는 용도의 카펫에 모든 돈을 쏟아부었단 사실을 저도 믿을 수 없었죠. 두꺼운 뉴질랜드산 고급 카펫 위로는 5개의 루이스폴센 조명을 달았어요. 아마 당시 호주 전역에 있던 것보다 많은 루이스폴센이었을 거예요. 스토어와 오피스가 전 세계에 퍼진 오늘날, 글로벌 가구와 조명브랜드의 매출에 이솝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 상상도 못 할겁니다.”
이솝의 본고장 멜버른에서 방문한 스토어들은 전 세계 이솝의 공간이 그렇듯, 각각 확연히 다른 시각 효과를 연출하면서도 일관된 분위기였다. 이솝 글로벌 스토어 디자인 담당자는 바로 그런 면이 이솝의 디자인이 추구하는 핵심이라고 짚었다. “지역의 자원을 활용해 지역 특성을 살려 유니크한 디자인을 구현하면서도 이솝이 전하고자 하는 공통된 ‘이솝다운’ 무드를 지키고 있습니다. 이곳에 들어오는 누구든 안식처라고 느끼게 될 편안함과 차분한 에티켓을 최우선으로 두고 몰입감을 조성합니다.” 지금은 없어진 이솝의 2003년 첫 세인트 킬다 매장은 지역 조선소에서 회수한 백색 팔레트로 공간을 마감했는데, 이는 이후 매장을 설계할 때 반드시 지역 자원을 재활용하는 이솝의 건축 인테리어 철학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를테면 가장 최근 멜버른에 오픈한 콜린스 스토어는 버려지는 석재편을 활용해 바닥을 모자이크처럼 채우고, 유리병 조각을 재활용해 천장 마감재에 섞어 은은하게 반짝이는 효과를 연출했다. 가죽 질감이 나는 것은 모두 비건 레더로 처리했는데, 동물 실험을 하지 않는 브랜드 철학과 실천 가능한 지속 가능성을 꼼꼼히 반영하는 행위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매장인 피츠로이 스토어는 예전 인테리어에 사용되었던 철제 창과 기둥, 거친 질감의 콘크리트 바닥을 그대로 유지했다. 다른 매장과는 다르게 연한 분홍과 녹회색의 파스텔 톤으로 칠한 컬러 톤은 이 지역의 빅토리아 양식 역사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임시 매장이었던 플린더스 레인의 스토어는 1550개의 산업용 판지 박스를 재활용해 압도적인 곡선 벽면을 만들었다. 손으로 누르면 눌린 자국이 그대로 드러나는 이 구조물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마모되고 진화할 것을 염두에 둔 것으로, 건축과 그 안의 사람들 사이의 관계까지 고려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모든 이솝 스토어의 인테리어는 멀티 텍스처의 자연스럽고 독특한 조화를 꾀하고 있음과 동시에 로컬리티와 시대정신, 그리고 건축과 인간의 관계를 사려 깊게 반영하고 있다.
 
 
풍요를 권하는 일
한편으론 고객이 자신의 피부 건강을 위한 스킨케어 제품을 테스트하고, 직원들이 진심 어린 컨설팅과 판매를 행하는 공간으로서의 기능도 철저히 갖춘다. 이솝 매장에 들어섰을 때 가장 인상적인 건 낮은 조도의 조명이다. 보통 뷰티 스토어에 들어서면 조명이 밝고 환하기 마련이라 이솝의 어둑한 공간이 다소 낯설다. 창립자 수잔 산토스가 그 이유를 말해주었다. “저는 손님들이 밝은 조명 아래 드러난 자신의 피부를 보며 스트레스를 받길 원하지 않아요. 솔직히 말하면 저 역시 거울 보는 일이 종종 고통스럽습니다. 매일 아침 나이 든 내 얼굴을 아무렇지 않게 마주하는 건 어려운 일이죠. 고객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하지만 이솝은 고객에게 젊음을 되찾아주겠다거나 결점을 가려주겠다는 달콤한 거짓말을 하지 않기로 했어요. 대신 자신의 피부를 사랑할 수 있는 편안한 환경 속에서 삶의 풍요로움을 채워주는 영감과 제스처를 나누며 본질적인 스킨케어를 완성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이솝의 조명은 마치 ‘당신의 고민을 이해해요. 여기서 마음을 편히 가져봐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죠.” 내부 천장의 높낮이를 다르게 하는 것도 이솝이 즐겨 쓰는 공간 디자인 방식이다. 이솝 글로벌 스토어 디자인 담당자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높은 천장 아래에서는 넉넉한 공간감에서 오는 자유로움을 느끼고, 낮은 천장 아래에서는 보다 내밀하고 친근한 소통을 나누기 쉬워요. 공간에 따라 달라지는 마음의 상태에 주목했죠.” 이솝의 아로마 제품을 만나는 사적인 공간인 ‘프래그런스 아르무아’도 비슷한 맥락에서 만든 요소다. “프래그런스 아르무아는 매장 한구석에 조용히 숨어 있다시피 합니다. 내내 화려한 빛을 뿜고 제품을 강조하는 진열장이 아니죠. 향에 관심을 가진 고객을 컨설턴트가 직접 프래그런스 아르무아로 데려가서 문을 열면, 거기서만 가능한 밀도 있는 테스팅 경험을 프라이빗하게 만날 수 있는 보물 상자처럼 디자인됐습니다. 이 안에 고객이 직접 자기 옷이나 소지품을 걸어서 향을 레이어링할 수도 있습니다.” 이솝의 강박적이다시피 한 제품 진열 방식에 대해서도 물었다. “눈썰미가 있는 고객은 알아챌 수 있듯, 이솝의 모든 제품은 3개 단위 또는 홀수 단위로 출시하고 진열합니다. 이건 전 세계 모든 스토어에 적용되는 공통된 가이드죠. 이솝의 창립자인 데니스 파피티스가 ‘3’을 완결성의 숫자로 여겼기 때문인데요. 숫자 자체에 심각한 의미를 두기보다, 이로 인해 이솝의 브랜딩이 가장 효과적으로 일관된 인상을 줄 수 있습니다. 또한 이솝의 선반은 아주 견고하고 튼튼하게 제작하는데, 매장마다 선반에 제품을 수십 개씩 채워 진열하기 때문입니다. 이건 멋지고 근사한 가치를 추구하는 한편, 이솝은 손님에게 좋은 물건을 전하는 ‘상인’이라는 정신을 갖고 있기 때문이죠. 빵집이나 식료품점에 갔을 때를 상상해보세요. 빵이 한두 개만 진열돼 있다면 손님은 과연 그걸 마음 편히 집어 들 수 있을까요? 이솝의 근본적인 애티튜드 키워드 중 하나가 ‘풍요로움(abondance)’인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단순함이 예술의 목적은 아니지만, 우리는 보통 진정한 의미에 접근하면서 단순함에 도달한다.”
-콘스탄틴 브랑쿠시
 
이솝피언을 위하여
이솝은 어떻게 믿을 수 있는 이름이 되었을까. 어떤 소비재 또는 콘텐츠의 인기와 매출을 한순간에 일으키는 공식은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신뢰와 로열티는 다르다. 아주 느리고 보이지 않는 노력에 의해 쌓이고, 단축키 따위는 없는 인고의 영역에서 천천히 숙성된다. 이솝이 30여 년간 공들여온 이 신뢰의 제스처들은 첫 스토어 입구에 깔았던 두꺼운 노르웨이산 카펫부터 전 세계 이솝 오피스의 책상에 놓이는 노트 한 권까지 이어진다. 이솝이라는 브랜드가 지닌 퀄리티와 감도에 대한 자긍심, 미와 기능의 견고한 균형과 조화는 반드시 고객만을 향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이솝은 내부 직원, 즉 이솝피언을 먼저 설득하는 데 상당한 돈과 시간을 들인다. 돈과 시간이라고 굳이 표현한 이유는, 실제로 그 노력이 대규모의 물리적인 환경 조성으로 이어지며 오랫동안 유지되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직원들의 편의는 고객의 편의만큼이나 중요한 부분으로 고려된다. 이 신념은 말뿐이 아니란 점에서 놀라움을 선사한다. 계산 카운터와 직원 휴게 공간의 바닥에는 폭신한 카펫이 깔려 있다. 오랫동안 서서 일하는 직원들의 발의 피로를 줄이기 위한 것이다. 전 세계 모든 오피스의 직원용 의자는 허먼밀러 제품이다. 사무실 역시 디자인 팀의 감도 높은 개입 아래 디자인되고, 오리지널 가구로 조성된다. 멜버른의 헤드 오피스는 그 어느 시그너처 스토어보다도 풍성한 제품과 아름다운 디자인 가구, 그리고 세심한 배려의 공간으로 채워져 있었다. 다양한 종교적 신념을 존중하는 기도실, 가정과 육아 형태를 배려한 수유실, 청각장애인을 위한 보청 시스템을 갖춘 미팅룸은 과시하지 않으면서 당연하단 듯이 오피스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입구에서부터 사무실 곳곳, 그리고 화장실마다 넉넉히 비치된 제품도 이솝이 내부인을 대하는 태도를 증명한다. 높은 원가의 자사 제품사용에 인색한 기업도 많을 터인데, 이솝은 오피스 어딜 가도 스토어를 방불케 하는 제품들이 아낌없이 사용할 수 있도록 마련되어 있었다. 이솝 직원들은 자사 제품을 가장 많이 사용하고 사랑하는 고객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전 세계 이솝 사무실마다 꼭 마련되는 키친 공간도 이솝피언들의 ‘풍요’ 문화를 상징하는 중요한 요소다. 피부 건강은 좋은 제품 몇 개를 바르는 것보다 잘 먹고, 잘 자고, 사랑하는 삶을 사는 풍요로부터 채워진다는 철학을 그대로 실천하듯 이솝은 매달 한 번씩 직원들끼리 와인&치즈 세션과 오피스 런치를 갖는다. 평소에도 좋은 품질의 다크 초콜릿과 아몬드, 그리고 이솝의 시그너처 티를 늘 풍성히 구비해 간식으로 내놓고, 멜버른 오피스는 제철 과일을 넉넉히 쌓아두고 직원들이 오며가며 베어 물 수 있게 했다.
이솝은 입사한 직원들에게 꽤 구체적인 오피스 가이드를 제공한다. 예를 들어 매일 아침 첫 출근자는 음악을 틀고 아로마를 피우며 공기를 환기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또한 사무실에서 사용하는 필기구는 모두 검은색이어야 하고, 형광펜은 노란색만 사용한다. 노트 역시 이솝에서 지급하는 블랙 무지 노트만 사용하도록 권한다. 이 외에도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싶은 디테일이 많은 가이드지만, 이는 이솝의 브랜드 색깔을 유지하는 가장 효과적이고도 미니멀한 방법이자 업무의 본질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장치가 된다. 그리고 ‘이렇게까지 하는’ 이솝이기에 누군가 스토어나 오피스를 방문할 때 언제나 정갈하고 꾸밈없는 우아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멜버른과 서울의 오피스를 오가며, 이솝은 이솝피언을 만들고, 이솝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천연하다. ‘생긴 그대로 조금도 꾸밈이 없다’는 의미다. ‘시간을 끌다’라는 뜻도 가진다. 이솝의 천연함은 시간을 두고 천천히 그리고 깊숙이, 그들의 투명하고 견고한 세계로 우리를 끌어들인다. 어떤 제품을 소비한다는 인식을 넘어서, 마치 예술이 그러하듯 저마다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추상적인 힘을 얻도록 만든다. 그리고 그것은 이솝이라는 기업을 만든 한두 명의 아집으로만 유지되지 않으며, 겉으로만 내세우는 그럴싸한 가치로 포장되지 않는다.
시와 문학을 사랑하고, 철학적으로 사유하며, 디자인과 아름다움의 가치를 알고, 기능과 실용을 치열하게 연구하는 이솝의 세계. 그 안에서 우리는 본질이란 결코 화려하고 시끄럽게 떠드는 게 아니라 단순하고도 조용하게 도달하는 곳임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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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에디터/ 김아라(미디어랩)
    글/ 양민정
    사진/ 이솝 제공
    디자인/ 민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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