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끽연〉, 1976, Gelatin silver print, 25.4x20.3cm, (17prints), ed.mono_5.

〈끽연〉, 1976, Gelatin silver print, 25.4x20.3cm, (17prints), ed.mono_8.
예술은 비싼 싸구려이다
“나는 항상 나를 소개할 때 ‘논 프로핏(non profit), 논 파퓰러(non popular) 작가라고 말한다. 1968년 작가 생활을 시작해 평생의 예술 활동 기간 중에 개인전을 총 다섯 번 했는데, 올해에만 다섯 번의 전시가 준비돼 있다. (성능경 작가는 4월 30일까지 이어지는 백아트 서울 개인전 «아무것도 아닌 듯… 성능경의 예술 행각»을 시작으로, 5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단체전 «한국 실험미술 1960-1970», 프리즈 서울 기간에는 갤러리현대에서 개인전, 9월에는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에서 «한국 실험미술 1960-1970» 전시와 더불어 리만머핀 뉴욕에서 개인전을 갖는다.) 예전에 김남수 평론가가 나를 ‘저평가 우량주’라고 말한 바 있는데, 올해는 평소보다 활발한 활동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 팔순에 뭔 팔자가 이런가 하는 생각도 드는데 고목에 꽃이 피는 격이다.(웃음) 55년의 예술 활동 기간 동안 1백70여 회의 퍼포먼스를 해왔다. 행위성을 강조하다 보니 나의 행위가 중요하다. 남을 시키면 연출이 된다. 요즘 작가들이 영상으로 연출하며 행위예술이라고 하는데, 우리 세대는 몸을 쓴다. 내 몸으로 행위를 하고, 이것을 사진으로 뽑으면 작품이 된다. 예술 중에 음악, 시, 소설, 극은 모두 물질성이 없다. 그런데 미술만이 물질성을 가지고 있고 이것이 상업성과 이어지곤 한다. 그래서 그 물질성을 없애고 ‘미술이 무엇인가’를 다시 질문하고 싶었다. 그럼 물질 말고 뭘로 할까 하다가 정보를 떠올렸고 신문으로 이어졌다.”

백아트 서울 개인전 «아무것도 아닌 듯... 성능경의 예술 행각» 개막일에 선보인 퍼포먼스.
예술은 쉽고 삶은 어렵다
“〈신문: 1974. 6.1 이후〉는 내 작품 세계의 근간이 된 중요한 작품이다. 그날의 신문을 보다가 기사들은 오려서 청색 아크릴 박스에 담고, 너덜해진 나머지 부분은 흰색 아크릴 박스에 분리수거한 작업이다. 전시 기간 매일 전시장에 가서 신문을 오리고, 나머지는 덧붙이는 퍼포먼스를 실행했다. 신문을 이용해 퍼포먼스를 한 최초의 작품이라 의미 있다. 그때는 퍼포먼스라는 용어도 없던 시기였다. 신문이 발행되지 않는 일요일은 ‘정기휴일’이라고 전시장 벽에 붙여놓았다. 이 작업을 할 때 주위에 안경 낀 남자가 있는지 살펴보고 전시장에 들어갔다. 중앙정보부에서 파견한 사람은 안경을 꼈을 거로 추측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한 신문기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인터뷰를 요청했는데, 거절하고 도망가버렸다. 신문에 났다가 잡혀 갈까 무서웠다. 돌이켜보면 한번쯤 잡혀가서 유명해져도 좋았을 것 같다.(웃음) 〈신문: 1974. 6.1 이후〉는 2009년 아르코미술관에 생애 처음 판매한 작품이기도 하다. 판매에 대해 3년간 고민했지만, 당시 29년간 재직해온 예술고등학교에서 입시 미술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정년을 앞두고 해고당해서 어쩔 수 없이 판매하게 됐다. 그간 생활은 교사인 아내가 책임졌다. 1990년대에 공황장애를 앓았는데, 숨을 쉴 수가 없어서 하루에 응급실에 3번 실려 가기도 했다. 1980년대에 미술가로서 전시할 기회가 없어서 힘들었는데, 그 시기가 지나고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한 1990년대에 아팠던 이유는 마음의 병이 수면 위로 올라와서인 것 같다. 어린아이를 달래주면 더 크게 우는 것처럼 말이다. 크게 아프고 나서 퍼포먼스가 잘 풀리기 시작했다. 삶이 힘들지, 예술은 쉽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수축과 팽창〉, 1976, Gelatin silver print, 27.2x27.8cm, (12prints), ed.mono_10.
예술은 착란의 그림자다
“나는 한국 미술에 매체로서의 사진을 최초로 도입했다. 〈끽연〉(1976), 〈위치〉(1976), 〈수축과 팽창〉(1976), 〈현장〉(1979-2013) 등은 퍼포먼스를 사진으로 남긴 초기 작품이다. 사진에 대한 관심은 신문 작업에서 출발했다. 신문에서 기사를 오려내고 나니 남는 것은 광고와 사진이었다. 당시만 해도 광고가 의식을 지배하는 시대는 아니었기에 자연스럽게 사진에 관심을 두게 되었는데 사진이 가장 탈물질적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내가 카메라를 가진 유일한 작가여서 주위 미술가들의 퍼포먼스를 촬영하기도 했다. 이건용 작가의 톱으로 자르고 깁스해서 그림을 그리는 퍼포먼스, 지금은 작고한 김용민 작가의 걸레짜기 등을 직접 촬영했고, 그 필름은 작가들에게 증정했다. 내 사진작품은 에디션이 없다. 1970년대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경기도미술관 등에서 소장하고 있는데, 처음 그대로 재현하기가 힘들다. 당시에는 젤라틴 실버 프린트를 약품 처리해서 인화했는데, 지금은 그 과정이 힘들어서 다 디지털로 전환한 상태다. 수년간 신문에 연재되었던 영어 교육 섹션을 스크랩하고, 여기에 내가 직접 공부한 흔적을 남긴 연작 〈그날그날 영어(Everyday English)〉, 2020년 7월부터 매일 아침 화장실에서 사용한 휴지를 스마트폰으로 촬영하고, 이를 앱 프로그램을 이용해 컬러링한, 일종의 피지올로지컬 아트(Physiological Art)인 〈밑그림〉 연작도 매일 작업하기 때문에 작품 수는 많지만 같은 작품은 없다. 내 작품은 모두 오리지널이다.”

«아무것도 아닌 듯... 성능경의 예술 행각» 전시 전경.
예술은 꿈꾸는 자유로다
“10여 년 전에 ‘아직 예술이 아닌 것-아무것도 아닌 것’이라는 글에 썼던 얘긴데, 모든 것은 이미 예술이 되었다. 예술의 홍수고 예술의 범람이다. 이런 가운데 정작 예술은 예술성을 상실한 채 시장에서 거품만 내뿜는다. 나는 그런 예술을 치유하고 소생시키기 위해 삶을 모험하면서 아직 예술이 아닌 것을 찾아나선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이 보이는 잠복된 삶의 일상을 발각하고 그것을 예술에 편입한다. 예들 들면 신문 읽기, 오리기, 돈 세기, 스트레칭 하기, 줄넘기, 옷 갈아입기, 훌라후프 하기, 고무줄 새총으로 탁구공 쏘기, 트렁크 끌고 다니기, 부채질하기, 오줌 누기·마시기, 신문의 일상영어 읽기, 자위행위하기, 물구나무서기 등등인데 이는 삶의 일상에서 발굴된 망각의 파편들이다.(전시 기간 백아트에서 선보인 퍼포먼스에서 작가는 트렁크를 끌고 갤러리에 등장해서 축문을 읽고는 삼각팬티에 수영모 차림으로 환복한 후 훌라후프를 돌리고 새총을 사용해 시를 새긴 탁구공을 관람객에게 날렸다. 그리고 목베개로 관람객을 타격하면서 “돈 받아라!” “건강 받아라!” “복 받아라!” 하고 독특한 방식의 축원을 해주는 것으로 퍼포먼스를 마무리했다.) 삶과 예술의 관계를 교착시키고, 약간의 혼돈을 유발하고 싶다. 사람들은 나를 탈궤도적 작가로 보는데 그런 예술적 태도 속에서는 무엇을 하든지 자유다. 그림도 사진도 드로잉도 뭐든지 할 수 있다. 산만할 수 있겠지만 산만하다고 맥락을 놓친 적은 없다. 항상 맥락을 찾아다녔다. 유리, 돌 등이 주재료였던 시대에 신문지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고, 아무것도 아닌 것을 예술화하려고 하면서 사용하게 됐다. 일상에 숨어있는 것, 사람의 눈길이 가지 않는 것에 관심이 많다. 예술가는 모름지기 다른 쪽을 쳐다볼 줄 알아야 한다. 모두 쳐다보고 있는 곳에 내가 숟가락 하나 더 얹을 필요가 없다. 이런 전복적 상황을 내가 나의 예술에서 수행함에 따라, 나는 여러분에게 예술의 자생적 현실성을 숙고하도록 요청하며, 살아있는 예술로써 여러분의 피부와 골수에 소름 돋게 하는 것이 의도이고 그것이 내 예술의 힘이다. 그것만이 소실된 예술을 복원하고 예술의 건강성을 회복시켜줄 수 있을 것이다.”

퍼포먼스를 앞두고 〈바자 아트〉를 위해 포즈를 취한 성능경 작가.
예술은 무관의 아우라다
“누군가 나에게 예술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나는 대답할 수 없다. 모르니까 하는 거다. 예술을 알면 뭣하러 하겠는가. 나는 줄기차게 탱크만 그리던 일곱 살 이후 지금까지 미술만 생각했다. 한눈팔지 않았다. 처음에는 다른 이들처럼 유화를 그렸다. 그런데 이게 만만치가 않았다. 사실 평생을 해도 정복할까말까 한 분야가 유화다. 내가 그림에 소질이 없다는 걸 깨닫고 나서야 다른 방법론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예술을 그리지 않고 실현하는 방법, 그걸 탐구하면서 지금까지 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겸손한 자세로 계속할 것이다. 나이 먹고 돈에 눈이 뒤집혀서 이상한 짓을 하지는 않을 거다. 나이가 있으니 갑자기 새로운 활동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1970년대부터 활동한 내가 오늘의 감성을 표현하기는 어렵다. 시대정신은 젊은 작가들에게 맡긴다. 예술과 공부와 삶이 일체가 되면 최상일 거다. 내가 예술하는 삶이 그렇다는 건 아니고 나는 그저 일체를 꿈꾸고 노력한 한 사람일 뿐이다.”
컨트리뷰팅 에디터 안동선은 «아무것도 아닌 듯… 성능경의 예술 행각» 개막일에 열린 퍼포먼스의 마지막 순서로 작품을 가리고 있던 쿠킹 포일을 벗겨내면서 느꼈던 짜릿한 해방감의 정체를 지금까지도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