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앞선 예술가, 김구림의 세계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Art&Culture

시대를 앞선 예술가, 김구림의 세계

개인전을 앞둔 88세의 예술가는, 자신이 하고 싶은 유일한 것은 예술이라 말한다.

BAZAAR BY BAZAAR 2023.04.24
애당초 김구림을 마주해 그의 예술 세계를 낱낱이 해부하겠다는 시도는 수포로 돌아갈 게 뻔했다. 보이지 않는 이가 코끼리를 만진 뒤 자기가 본 것이 진실이라 주장하는 모습처럼, 김구림의 작품을 보고 동일한 감상을 유도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우니 말이다. 그건 그의 작품이 단일한 작업 방식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1960년 전쟁 후 한국의 사회상을 담은 최초의 실험영화 〈1/24초의 의미〉, 화가와 신문사에 3백 통의 서신을 보낸 최초의 메일아트 〈매스미디어의 유물〉, 뚝섬 한강 둑을 삼각형 모양으로 불태운 최초의 대지미술 〈현상에서 흔적으로〉, 1974년 걸레가 놓인 테이블 보를 일본 국제 판화 비엔날레에 출품해 판화의 범주에 대해 질문한 〈걸레〉까지. 열거하기 어려울 만큼 김구림은 조각과 회화, 설치작품과 퍼포먼스, 무대 연출을 넘나들며 반 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총체적 예술을 선보여왔다.(2013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김구림의 1960~70년대 실험작품을 아우른 전시의 전시명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다. 작가가 홍상수의 영화 제목에서 차용해 직접 지은 이 전시명보다 적절한 대안을 찾긴 어려울 것이다.)
 
1970년 한국미술협회전에 참가해 경복궁현대미술관 빈 전시실에서 선보인 퍼포먼스 〈도〉. 흰 천은 땅, 통나무는 하늘을 상징하며 음양사상을 행위예술로 표현한 작품으로 2016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재연하기도 했다.

1970년 한국미술협회전에 참가해 경복궁현대미술관 빈 전시실에서 선보인 퍼포먼스 〈도〉. 흰 천은 땅, 통나무는 하늘을 상징하며 음양사상을 행위예술로 표현한 작품으로 2016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재연하기도 했다.

 
“작가라면 1년에 1백 점의 작품은 만들어야 한다”라는 과격한 주장을 누누이 선언한 이답게, 회화와 설치 작업으로 나뉜 작업실에는 미완의 작품들이 수십 점 놓여있다. 시작한 지 1년째인 것도, 어떤 것은 10년째인 것도 있다. 그리고 서재에는 정규 미술 교육을 받지 않고도 예술가가 되는 데 스승이 되어준 수천 권의 책으로 가득한데, 이마저 2/3 분량은 몇 주 전 처분한 것이라고. 〈그라모폰 매거진〉, 올라퍼 엘리아슨의 〈더 키친〉, 〈아트 포럼〉 등 미학·건축·스트리트 아트·클래식 음악·현대미술·고전철학까지 작품처럼 주제도 다양하다. 누군가는 그를 정체성을 논하기 어려운 작가라고, 어떤 이는 변신의 귀재라고 한다. 김구림의 작품들은 실험예술이 배척되어온 시기에 일본과 뉴욕에서, 귀국한 이후에는 국내보다는 해외 미술 기관과 평론가들에게 연구되어왔다. 런던 테이트모던에서 2012년 개최된 «A Bigger Splash: Painting after Performance» 전시회에서는 잭슨 폴록, 데이비드 호크니, 쿠사마 야요이 등과 전시했고, 한국인으로서 처음으로 테이트 라이브러리 스페셜 컬렉션에 ‘김구림 아카이브’가 소장되었다. 학연과 지연에서 벗어나 아웃사이더 예술가로 살아왔지만, 그 어떤 평가에도 초연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수없이 많은 처음이 그와 예술 사이에, 존재했다는 것이다. 말기암과 심장판막부전증을 앓고 있는 예술가에게 올해는 예사롭지 않은 해다. 광주비엔날레뿐만 아니라 5월 MMCA와 구겐하임미술관이 공동기획한 그룹전 «한국 실험미술 1960-1970», 8월 MMCA 서울관에서 미발표작을 포함한 개인전을 앞두고 있다. 선구자로 산다는 것, 개척한다는 것, 예술적 삶에서 길어 올린 처음의 순간들에 대해 묻자, 그는 거리낌없는 진심을 펼쳐놓았다.
〈핵, Nucleus〉, Oil, Steel on Wood Panel, 91x58cm, 1964

〈핵, Nucleus〉, Oil, Steel on Wood Panel, 91x58cm, 1964

 
 

예술가의 언어

“우리 집안이 의사 집안이에요. 그 피가 남아서 그런지 아주 어린 시절에는 의사가 되고 싶었어요. 외과의사가 수술하는 일이 참 재미있어 보이더라고. 곤충과 개구리를 해부하고 놀았더니 나중에는 밥을 못 먹겠어서 관두었어요. 그 다음엔 과학자가 되려고, 집에 있는 기계란 기계는 전부 뜯어 조립하며 별짓을 다 했어요. 나는 항상 세계적인 걸 원했는데, 한국에서는 세계적인 과학자가 못 되겠더라고요. 영화나 음악은 혼자서 시작할 수 없는 창작이고,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전에 없던 것을 창조할 수 있는 예술이 미술이었죠. 대학에 가니 끊임없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미술에 대한 질문에 대답해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만두고, 그 돈으로 평론가의 책을 쌓아두고 미군 부대에서 〈타임〉과 〈라이프〉를 공수해 읽으며 예술을 공부했어요. 미술뿐만 아니라 영화, 무용, 연극까지 샅샅이 보며 ‘전위예술이란 이런 거구나, 예술가는 이런 방식으로 세상에 새로운 창조를 만들어내는 거구나’ 깨달았어요. 진정한 예술가는 작품을 통해 감상자가 어떠한 질문을 던져도 자기 논리로 대답할 줄 알아야 하는 사람이에요.”
 
1970년 한강 살곶다리 부근에서 잔디를 태워 삼각형 4개 모양을 낸 대지 예술 〈현상에서 흔적으로-불과 잔디에 의한 이벤트〉. 새순이 자라는 변화의 과정을 통해 생명의 순환을 은유한다.

1970년 한강 살곶다리 부근에서 잔디를 태워 삼각형 4개 모양을 낸 대지 예술 〈현상에서 흔적으로-불과 잔디에 의한 이벤트〉. 새순이 자라는 변화의 과정을 통해 생명의 순환을 은유한다.

 

제4집단

“난 누가 가르쳐주면 재미가 없어져요. 직접 스스로 연구해서 터득해야 지식이 내 머릿속에 들어오지. 1969년 공기와 물, 기름을 비닐에 넣는 최초의 일렉트릭 아트  〈공간구조 69〉를 만들던 시기에 혼자서 전선의 구조를 배우면서 고생했어요. 그때 화가 혼자 힘으로는 이상적인 예술작품이 탄생하지 못한다는 걸 알았어요. 협업이 있어야 한다. ‘제4집단’을 결성해 엔지니어, 무용가, 음악가 모든 분야의 사람들을 모집했지요. ‘4’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죽을 사’자를 싫어하는 미신을 타파하기 위해서 붙였어요. 〈수호지〉를 보면, 나라가 피폐해 엉망일 때 전국 각지에서 영웅호걸이 등장하잖아요. 학벌에 상관없이 초등학교만 나와도 좋고, 전기 기술, 돌 깎는 기술 1인자라면 영입을 시키겠다는 생각이었죠. 예술을 위한 국가를 만드는 데 동의하는 사람은 모두 모이라는 생각으로 선언문을 썼어요. 선언문이 신문에 발표되니, 당시 중앙정보부에 잡혀가 1년이 채 못 되어 해체됐지요. 10년 아니, 5년이라도 지속되었더라면 우리나라의 현대미술이 확 바뀌었을 텐데.”
자신만의 미학적 언어로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의 주축으로 활동하던 그는 화가, 조각가, 미술평론가로 이루어진 단체 대신 전위예술 그룹을 결성하고자 했다. 의상 디자이너, 스님, 시나리오 작가 등으로 이루어진 제4집단은 기성 문화와의 결별을 고하며 관을 들고 장례를 진행하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정신과 물질을 일체화한다는 장자의 무체사상에 영향받은 선언과 강령은 다음과 같다. “1. 우리는 인간을 본연으로 해방한다. 1. 우리는 순수한 한국문화의 독립이 세계 문화의 주체임을 확립한다. 1. 우리는 참여로서 모든 체계를 통합한다. 1. 우리는 무체로서 일체를 이룬다.”
 
 

동시대의 판화

“과연 현대적인 판화가 무엇인가. 혼자서 곰곰이 연구한 주제예요. 책도 두 권을 썼지요. 처음 판화가 생겨난 건, 돈 많은 귀족들은 화가를 데려다 초상화를 그렸지만 서민들은 미술을 즐기고 싶어도 그걸 못하니 인기 있는 작품을 여러 점 찍어 팔며 ‘에디션’의 개념이 생겨난 거죠. 기계문명이 발달한 현대에는 판화의 의미가 과거와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판화를 순수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일 방법을 궁리했죠. 1974년에 일본 국제 판화 비엔날레에 테이블보를 세 개 사서 걸레로 물이 번진 것처럼 자국을 딱 찍었어요. 커피 컵 자국이 찍힌 자리도 옆에 두었죠. 그리고 테이블을 구해 깔아둔 다음 “이게 나의 판화다” 했더니, 그게 접수가 됐어요. 최종 심사 날, 심사위원이 내 작품이 평론가들에게 더 높은 점수를 받았지만 한국 출신 심사위원이 없어 그랑프리를 받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나의 관심사는 과거의 행위와 미래가 현재에 교차되는 ‘시간성’에 대한 문제였어요. 이듬해 한국에 돌아와 동아 국제 판화 비엔날레 초대 작가로 선정됐어요. 이와 유사한 작품을 냈더니 작품이 아니라고, 철거하라고 하더군요. 그렇게 〈동아일보〉 신문을 통해 미학 논쟁이 시작됐어요. 아홉 명의 평론가와 내가 작품을 주제로, 글로 싸우기 시작했죠. 나는 내 작품의 논리성에 대해 누구보다 잘 설명할 수 있으니, 결국 설득했죠.”
 
〈걸레〉 1974, 작가 제공

〈걸레〉 1974, 작가 제공

 

음과 양

“많은 작가들이 처음엔 다양한 작품을 하다가, 하나가 성공하면 평생 죽을 때까지 그것만 그려요. 그건 매너리즘이에요. 나의 예술은 테크닉과 아름다움이 목적이 아닙니다. 나는 라디오를 들으며 이미지를 상상하는 시대를 거쳐, 흑백 티비에서 컬러 티비로, 컴퓨터로 물질의 변화를 겪었어요. 시대가 변하기 때문에 내 작품은 변화할 수밖에 없어요. 〈음양〉 시리즈를 만들게 된 건, 빛과 어둠, 하늘과 땅, 자연과 인공적인 것처럼 정반대의 것들은 하나로서 존재한다는 걸 이야기하고 싶어서예요. 있음은 곧 없음의 상대성이라는 것을. 나의 페인팅은 죽은 이미지와 살아있는 행위를 결합시키는 행위예요. 죽어 있는 디지털 이미지를 뽑아 캔버스에 붙이고, 살아있는 내가 붓질을 하며 하나하나 형상을 지워냅니다. 일부러 추상회화를 의도한 게 아니라, 극과 극에 있는 걸 한자리에서 부딪혀 존재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지금은 꽃이 피는 시기가 뒤죽박죽이 되고, 기후가 혼란스럽죠. 그런 것도 내 작업의 소재가 돼요. 세상이 나한테 작품을 만들라고, 고발하라고, 직시하라고 지시하는 것 같아요.”
김구림은 뉴욕에 머물던 1980년대 중후반부터 현재까지 〈음양〉 시리즈를 지속하고 있다. 전혀 관계없는 이미지와 물성을 하나의 작품 안에 공존시켜 관계를 맺게 하는 작업으로, 우주의 이치를 되새기는 큰 주제 이면에는 현대인의 억압된 현실을 해방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있다. 성형을 통해 모두의 외면이 엇비슷해지는 현상, 바다 위에서 죽음을 맞이한 난민의 모습, 스마트폰 내비게이터에 중독된 현대인들의 초상까지 목도한 현실 속 최전선의 사람들이 작품의 소재가 되어왔다.
 
〈Yin and Yang 18-L.D. 2〉, Mixed media on paper, 33.0x 25.5cm, 2018

〈Yin and Yang 18-L.D. 2〉, Mixed media on paper, 33.0x 25.5cm, 2018

〈Yin and Yang 22-S 72〉, Mixed media on canvas, 2022. 가나아트 제공

〈Yin and Yang 22-S 72〉, Mixed media on canvas, 2022. 가나아트 제공

 

1백 년 후의 예술가

“기억되고 싶은 수식어는 생각해본 적도 없어요. 마음대로 평가하고, 마음대로 기억해도 좋지만 내가 죽고 난 뒤 1백 년 후에 진정한 예술가가 누구였는지, 후대의 사람들이, 미술사가 나라는 예술가를 어떻게 알고 있을지 그걸 목격하고 싶어요. 나는 항상 그 생각을 하며 작품을 만들어요. 화랑에서 잘 팔리고, 인기를 얻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어요. 그저 계속해서 연구될 만한 가치가 있는 작가가 되고 싶지. 머릿속에 명료하게 구상을 마친 작품은 무수히 많지만, 내가 죽기 전에 꼭 완성하고 싶은 작품이 하나 있어요. 아주 큰 전시장 안에, 바닥의 모양을 비스듬히 만들어서 신문지를 깔아놓고, 그 바닥 안에는 팬을 설치해 신문지들이 춤을 추듯 날아다니도록 만드는 거지. 10년 전부터 이 세상의 모든 중요한 사건들에 대한 자료를 모으고 있어요. 그걸 한자리에 갖다 놓고, 사운드가 흐르고, 사건들이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새어나오는 작품. 언젠가 그 작품을 보여준 후 죽고 싶어요.”  
 
작품에는 작가의 손길이 담겨야 한다는 원칙으로, 어시스턴트를 두지 않고 홀로 작업을 완성한다.

작품에는 작가의 손길이 담겨야 한다는 원칙으로, 어시스턴트를 두지 않고 홀로 작업을 완성한다.

 
나의 예술은 테크닉과 아름다움이 목적이 아닙니다. 나는 라디오를 들으며 이미지를 상상하는 시대를 거쳐, 흑백 티비에서 컬러 티비로, 컴퓨터로 물질의 변화를 겪었어요. 시대가 변하기 때문에 내 작품은 변화할 수밖에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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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에디터/ 안서경
    사진/ 하태민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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