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전드 모델 나오미 캠벨을 만나다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Fashion

레전드 모델 나오미 캠벨을 만나다

나오미 캠벨은 스스로 자신을 정의하려 한다.

BAZAAR BY BAZAAR 2023.04.01
 더 이상 전 증명할 것이 없어요. 일은 여전히 힘들지만 동시에 즐거워요. 누구에게나 자신의 일을 즐기는 것이 가장 중요하죠.
 
코트는 Jacquemus. 벌룬 펌프스는 Loewe.

코트는 Jacquemus. 벌룬 펌프스는 Loewe.

슈퍼모델이자 활동가, 패션 아이콘, 때로는 다혈질적인 모습의 나오미 캠벨.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겠지만, 캠벨을 둘러싼 스토리의 중요한 부분은 그녀의 출신으로부터 시작된다. 런던 스트리탐(Streatham) 출신의 평범했던 15살 소녀 캠벨은 웨스트엔드(West End)에서 윈도쇼핑을 하던 중 모델 스카우터의 눈에 띄게 된다. 인스타그램을 통해 스카우트되거나 유명한 부모 덕에 쉽게 데뷔하는 요즘 시대의 모델 스토리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다. 동료이자 절친인 케이트 모스(Kate Moss)와 캠벨. 1990년대의 두 아이콘은 과거 한 세대 동안 토요일 오후 옥스퍼드 스트리트의 톱숍(Topshop) 주변을 서성거리며 ‘모델’처럼 보이기 위해 또 누군가에게 ‘발견’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영국 10대 소녀들의 롤모델이 되었다.
 
캠벨의 삶은 일종의 ‘적절한 장소와 적절한 때’라는 우연성을 대변하는, 마치 신데렐라 스토리와 같아 보였다. 하지만 유럽의 한 호텔 스위트룸에서 그녀와 마주했을 때 그녀의 성공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도드라진 광대뼈와 완벽하게 균형 잡힌 통통한 입술. 이는 마치 천상의 창조물 같았다. 나는 평생토록 그녀가 유명인의 삶을 누릴 것이라고 조심스레 상상했다. “정말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책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어요.” 그녀는 소파에 앉은 채 말했다. 캠벨의 회고록에 대한 기대치는 상상을 초월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장식했던 타블로이드 헤드라인 중 과연 진실이 무엇인지 모두 궁금해하기 때문. 하지만 그녀는 여태껏 답변을 보류해왔다. “회고록은 시간이 많이 걸릴 거예요.”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유령 작가를 통해 대필하고 싶지 않다고 단호히 말했다.
캠벨은 스스로를 1990년대 최고의 전성기를 누린, 모델계의 올드 할리우드(Old Hollywood)라고 칭한다. 요즘 떠오른 스타들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친밀감이나 겸손함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그녀의 인스타그램은 화려함 그 자체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움직인다. 그리고 우리의 대화에서는 인스타그램에 등장하는 그녀의 절친이자 유명 셀러브리티, 패션 디자이너의 이름이 자주 강조되었다. 30년이 넘도록 패션계의 중심에 머무르고 있는 캠벨. 그녀의 이름은 업계의 역사에 굳게 새겨졌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나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크리스마스 다음 날 그녀와의 ‘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비행기에 몸을 실을 수밖에 없었다. 캠벨의 당당하고 거만한 태도 그 이면에는 때때로 소녀스러운 무언가가 있다. 예를 들어 그녀가 담배를 피울 수 있도록 모두가 호텔 테라스로 자리를 비켜주었을 때, 그녀는 나에게 선언하듯 속삭였다. “새해 전야에는 꼭 끊을 거예요.”
 
밀라노에서 마이애미로, 마이애미에서 런던으로, 런던에서 이집트로(2023 F/W 디올 멘즈웨어 쇼의 프런트 로에 초청받았다), 그리고 브리티시 패션 어워즈(British Fashion Awards)  참석을 위해 다시 런던으로, 또 아프리카에서 최초로 열리는 샤넬 공방 쇼를 위해 세네갈의 수도 다카르까지. 그녀는 어지러운 몇 주간의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다.  그리고 이제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런던으로, 런던에서 뉴욕으로, 그리고 다시 런던으로 돌아간다. 그 후 바로 중동 일정을 마친 후 세네갈에서 휴가를 보낼 계획이다. 나는 그녀에게 왜 아직까지 이토록 왕성하게 활동하는지 물었다. 사실 그녀가 활동하던 시대의 모델 대부분은 레전드에 대한 캠페인에 등장할 뿐 은퇴한 지 오래되었다. 하지만 캠벨은 그들과 다르게 지난 1년 동안에만 발맹, 휴고 보스, 뷰티 브랜드 팻 맥그라스 랩스(Pat McGrath Labs)의 캠페인에 등장하며 전성기 시절만큼이나 바쁜 스케줄을 보냈다. 과연 그녀에게 새로운 영역을 확장할 만한 열정이 여전히 남아있을까? 
 
그저 제 일을 좋아해요. 스스로 일을 선택할 수 있는 특권을 받았죠. 여전히 기회가 주어진다는 자체가 축복이라 생각해요. 더 이상 전 증명할 것이 없어요. 일은 여전히 힘들지만 동시에 즐거워요. 누구에게나 자신의 일을 즐기는 것이 가장 중요하죠.
 
프란체스코 스카불로(Francesco Scavullo)가 촬영한 캠벨(〈하퍼스 바자〉 1990년 10월). 피터 린드버그(Peter Lindbergh)가 촬영한 캠벨(〈하퍼스 바자〉 1997년 2월).
캠벨에게 일이란 모델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녀의 시간 중 상당 부분은 허리케인 카트리나 피해자를 위해 2005년 설럽한 비영리 단체 ‘패션 포 릴리프(Fashion for Relief)’의 자선, 문화 대사 활동에 쓰인다. 단체는 현재까지 전 세계로부터 1천5백만 달러 이상의 자선 기금을 모았다. 또 지난 10월 카타르에서는 갈라와 패션쇼를 통해 전 세계 신흥 커뮤니티에서 발굴한 창의적인 차세대 인재를 홍보하는 데 중점을 둔 이니셔티브 ‘이머지(Emerge)’를 론칭했다. 이는 패션은 물론 예술, 엔터테인먼트 그리고 테크에 이르는 창의적인 산업의 멘토링과 기술 개발을 의미한다. 넥스트 패션 크리에이티브 발굴을 위한 그녀의 열망. 이는 자신의 소속으로 데려온 수많은 젊은 모델의 숫자가 뒷받침해준다. 그들 중에는 캠벨의 지원 사격 덕분에 모델계의 스타덤에 오른 인형 같은 얼굴의 23살 남수단 태생 모델 아두트 아케치(Adut Akech)가 있다. 아케치가 말한다. “엄마가 아이를 어떻게 돌보는지 아시죠? 엄마 곁에 있으면 안전함을 느끼잖아요. 캠벨은 아늑한 담요 같아요. 친어머니는 멀리 떨어져 계시지만 제겐 또 다른 엄마가 있는 셈이죠.” 아케치는 2017년 흑인 모델만 캐스팅해 유명해진 포토그래퍼 팀 워커(Tim Walker)의 피렐리 캘린더(Pirelli Calendar,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주제로 했다) 촬영장에서 캠벨을 처음 만났다. “팬으로서 정말 흥분되는 순간이었어요. 이상한 행동을 하지 말자고 마음속으로 다짐했죠.” 몇 달 후 뉴욕으로 이사한 아케치는 자신에게 전화번호를 준 캠벨에게 연락을 했다. “그녀는 절 마치 친딸처럼 대해줘요. 함께 시간을 보낸 후 집으로 돌아갈 때마다 제가 차에 안전하게 탔는지 매번 확인하죠. 그리고 집에 도착하면 꼭 문자를 보내달라고 말해요. 아마 문자를 보내지 않으면 캠벨은 잠들지 않을 거예요.” 
 
엄마가 되기 위한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존재한다. “저는 많은 사람들의 엄마예요.” 캠벨은 늘 엄마가 되고 싶었다고 말한다. “언제나 말이죠.” 그리고 2021년 5월, 캠벨은 딸을 맞이했다고 발표했다. “시기는 중요하지 않아요. 모든 사람들은 각자 다른 삶의 과정을 거치잖아요. 누구와 함께인지가 더 중요하죠. 남은 삶과 연결된 중요한 문제니까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래서 혼자 하기로 결정했어요.” 50세에 한 부모가 되는 것은 꽤 힘든 일이다. 자신의 선택으로 인한 미래가 걱정되지 않을까? “전혀요.” 잠시 후 그녀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음, 아마 걱정될 수도 있죠. ‘내가 잘하고 있는 걸까?’라고 생각에 빠질 수 있지만 삶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따라가면 될 뿐이죠.” 캠벨은 아이에 대한 계획을 대부분의 사람들과 공유하지 않았다. 이야기를 털어놓았던 사람 중 한 명은 캐머런 디아즈(캠벨은 그녀를 ‘Cammie’이란 애칭으로 부른다)인데, 그녀에게 양육에 대한 조언도 구했다. “오랫동안 그녀를 알고 지냈어요. 정말 사랑하고 존경해요. 계획을 말했더니 그저 ‘그래’라고 대답할 뿐이었죠. 그녀는 저를 전적으로 옹호해주는 진정한 친구예요.” 캠벨은 모성이라는 주제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노출하는 것을 꺼려한다. 모성이란 어머니가 된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정의하는 내러티브(narrative)가 되는 것을 경계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호텔 스위트룸에서 테라스로 자리를 옮긴 후 대화를 계속 이어나갔다. 해가 지기 시작했다. 높은 곳에서 저 멀리 반짝이는 인근 마을의 불빛을 내려다보니 말문이 막힐 정도로 낭만적인 풍경이 펼쳐졌다. 아름다운 배경 속에서 캠벨은 한층 부드러워졌다. 
 
패션 포 릴리프의 2019 런던 자선 갈라쇼에서 캠벨과 아두트 아케치.

패션 포 릴리프의 2019 런던 자선 갈라쇼에서 캠벨과 아두트 아케치.

며칠 후 그녀는 세네갈로 휴가를 떠날 예정이다. 캠벨은 스스로를 ‘글로벌 시민’이라고 칭한다. 그녀의 진실된 마음이 이 세계 곳곳에 새겨진 것이 분명하다. “아프리카에서 느끼는 거라면 인종차별이 없다는 거예요.” 미묘한 인종차별적 공격에 걱정할 필요가 없고, 모든 피부색이 진정으로 섞일 때 내려놓을 수 있는 심리적 무게감에 대해 이야기했다. 또 캠벨은 자신의 집이 있는 케냐의 환상적인 아름다움에 대해 꿈꾸듯이 이야기했다. “사람들이 마침내 아프리카 대륙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어 기뻐요.” 그녀는 체부젠(thieboudienne)이나 야사(yassa) 같은 세네갈 음식에 대해서도 열광적으로 설명했다. 물론 늘 그렇듯 패션을 빼놓을 수 없다. 캠벨은 케네스 이즈(Kenneth Ize)나 스티브 프렌치(Steve French), 테베 마구구(Thebe Magugu) 같은 자신이 좋아하는 아프리카 디자이너들에 대해 나열했고, 또 아프리카의 경제 성장을 창출해줄 잠재적인 패션 산업에 대해 흥분감을 감추지 못했다. 
 
패션은 10억 달러 규모의 사업이에요. 제가 아프리카에 가는 이유죠. 신흥 시장이 아프리카의 크리에이티브에 투자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제가 하고 있는 일의 목적입니다.
 
아프리카 패션 산업의 경제력과 투자에 대한 대화는 지난 12월, 불과 며칠 사이에 일어난 카이로 기자 피라미드 앞에서 펼쳐진 킴 존스의 2023 F/W 디올 옴므 컬렉션과 다카르에서 선보였던 샤넬의 공방 컬렉션(Métiers d’art show), 이 두 가지 이벤트를 상기시켰다. 하지만 나는 아프리카와 패션계의 관계가 단순히 추출적이거나 착취적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 대해 걱정했다. 현재 아프리카에 이목이 집중되는 것이 단순한 트렌트로 끝날 수 있는 위험성 또한 우려된다. 이러한 우려를 캠벨에게 드러내자, 그녀는 평온하게 답변했다. “단순 트렌드로 끝나지 않을 거예요. 제가 그렇게 두지 않을 거니까요.” 그녀는 디올과 샤넬이 현지 커뮤니티에 대한 장기 투자를 약속했다고 말해주었다. 이는 쇼에 참석하기로 한 그녀의 전제 조건이었다. “예전에 아프리카 디자이너의 쇼란 이유만으로 저를 앞자리에 앉히고 싶다는 초청에 몇 차례 거절했던 적이 있었어요. 하지만 이집트와 아프리카에 대한 킴 존스의 약속은 진심이죠. 세네갈을 향한 샤넬 또한 마찬가지구요. 그들은 단순히 진입만 했다가 쇼를 선보이고 떠나는 유형이 아니에요. 그들은 지역의 인프라에 대해 약속했어요.”
 
캠벨과 넬슨 만델라(1998년 남아프리카공화국). 런던 패션 포 릴리프 자산 갈라쇼에서의 아케치와 학생들(2019년). 세네갈 대통령 마키 살(Macky Sall)과 함께(2022년 다카르).
2020년 (거의 모든 다른 산업과 함께) 패션계는 ‘Black Lives Matter’ 시위와 인종차별에 대한 대화를 통해 다양성과 진화한 BIPOC(Black, Indigenous and People of Color, 백인이 아닌  인종) 운동을 약속함으로써 대응했다. 하지만 1년 후 〈뉴욕 타임스〉가 진행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변화는 거의 없었다. 반인종주의 사회정의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이 지치거나, 때로는 ‘충분하다고’ 느끼기 시작하면서 저항이 끝나는 시점이 온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단호하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우리는 그저 그런 트렌드가 아니에요.” 캠벨이 인종차별에 대해 얼마나 큰 목소리를 내고 있는지 감안할 때, 지난 10월 파리패션위크 기간 가장 큰 논란을 일으킨 이지(Yeezy) 쇼에서 워킹을 한 건 꽤 의외다. 칸예 웨스트는 인종차별적인 슬로건 ‘White Lives Matter’ 프린트 티셔츠를 런웨이에 세웠다. “보지 못했어요. 저는 가장 위에 있었거든요.” 그녀는 현장 배치 때문에 티셔츠를 보지 못했고 호텔에 돌아와서야 에이전트로부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고. “저 역시 충격을 받았어요. 결코 제가 용납했던 게 아니에요.” 나는 그녀에게 저항적인 분위기를 느꼈다.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죠.” 긴장된 침묵이 우리를 덮쳤다. 그녀가 말하기 싫어하는 것만큼이나 나 또한 아직 이 주제로부터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당신의 함정에 빠지지 않을 거예요. 여기 앉아서 제 자신을 욕보이고 싶지 않아요.” 아마 그녀는 다른 흑인 유명인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시나리오에 빠지고 싶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 인정한다. “잘 알지 못한 상태로 난처한 상황에 빠지는 건 불공평해요. 전 좋은 의도로 쇼에 참석했거든요.”   
 
블라우스, 팬츠, 목걸이, 벨트 모두 Chanel.

블라우스, 팬츠, 목걸이, 벨트 모두 Chanel.

캠벨을 인터뷰하고 불과 며칠 후, 영국의 전설적인 디자이너 비비안 웨스트우드가 향년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소식을 접했을 때 1993년 비비안 웨스트우드 쇼에서 길리(Ghillie) 플랫폼 힐을 신고 워킹을 하던 중 넘어진 캠벨의 유명 일화가 떠올랐다. 그 이미지가 패션 역사의 유명한 순간으로 남아있다는 것은 캠벨의 상징성을 증명하는 것과 같다. 모든 패션 업계가 웨스트우드에 대한 경의를 표했다. 캠벨 역시 인스타그램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전했다. “당신의 유산은 이제 막 시작되었어요. 패션계에서 당신의 기여도는 헤아릴 수 없기 때문에 영원토록 비석에 새겨질 거예요.”
어떤 유산을 남기고 싶냐고 묻자 캠벨은 살짝 비웃듯 대답했다. “그런 생각을 전혀 해보지 않았어요. 단지 내가 해야 할 일을 열정적으로 할 뿐입니다.” 지금 그녀에게 보상이란 ‘다음 세대가 잘하는 것’이다.“ 이 점이 요즘 절 진정으로 행복하게 만들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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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에디터/ 윤혜영
    번역/ 채원식
    사진/ Dakar,Senegal
    ⓒInternational Center Of Photography
    Francesco Scavullo Trust
    ⓒ Peter Lindbergh
    Peter Lindbergh Foundation,Paris
    Dave Benett
    Getty Images For Fashion For Relief
    Yann Gablin
    Paris Match Via Getty Images
    Anadolu Agency Via Getty Images
    스타일리스트/ Marika-Ella Ames
    글/ Otegha Uwagba
    헤어/ Karim Belghiran
    메이크업/ Esther Edeme(Pat Mcgrath Labs)
    매니큐어/ Solange Mendy
    프로덕션/ Western Promises And Incredible Studios
    Special thanks to/ Black Rock Senegal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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