펀칭 리플 블라우스는 Caruso.
김은숙 작가가 당신을 보고 “한국의 양조위가 되세요”라고 덕담한 이유를 알겠다. 스태프들이 그 시적인 눈빛에 감탄하는 동안 정작 본인은 속으로 이 상황이 어색하고 부끄러워서 죽을 것 같았다던데.
오늘 저도 모르는 제 모습을 본 것 같다. (웃음) 연기할 때는 카메라가 부담스럽지 않은데 사진 찍을 때는 카메라가 매우 낯설다. 개인적으론 셀카 한 장 안 찍는 타입이다 보니 화보 스케줄이 잡히고 나서 걱정이 앞서더라.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바자〉 과월호를 보면서 내가 보여줄 수 있는 자연스러운 모습이 무엇일지 미리 연습도 하고 왔다.
방영 예정인 〈더 글로리〉 시즌 2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스포일러를 할 수 없으니 난감하겠지만 그래도 묻겠다. ‘하도영’은 이제 어떻게 되나?
딱 떠오르는 단어는 분노와 절망이다. 하도영이 자신의 분노를 연진에게 분출하는 장면이 나온다. 소리 지르고 화내고 지금껏 꾹꾹 눌러왔던 감정이 폭발한다.
“나 너 좋아하냐?” “이 안에 너 있다” “애기야 가자” 같은 김은숙 작가 특유의 대사를 처음 접한 배우들의 반응 또한 가지각색이더라. 당신에게 가장 어려웠던 대사는?
“제냐, 베르사체 방금 다 망했네.” 자칫하면 느끼해 보일 수 있는 대사라 최대한 담백하고 명확하게 전달될 수 있도록 신경 썼다. 김은숙 작가님이 대단하신 게, 한 끗 차이로 부자연스럽거나 손발이 오그라들 수도 있는 대사를 적재적소에 자연스럽게 쓴다는 점이다.
송치 소재 재킷, 팬츠는 Kimseoryong. 앵글부츠는 Prada. 슬리브리스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약 1년 전 〈바자〉 인터뷰에서 송혜교가 다음 날 크랭크인하는 〈더 글로리〉 촬영의 긴장감과 기대감에 대해 토로했던 기억이 있다. 같은 날, 당신은 어떤 상태였나?
생생히 기억난다. 불안해서 자다 깨다 대본을 몇 번씩 들춰봤다. 사실은 늘 그렇다. 지금 하고 있는 공연 〈뷰티풀 선데이〉도 막이 오르기 전까진 무대 뒤에서 긴장하고 있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그 긴장감을 즐기는 것 같다.
‘나이스한 개새끼’ 하도영이라는 인물을 어떻게 해석했나?
하도영은 재력부터 교육 수준까지 살면서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인물이다. 대본 안에 답이 있다고 생각해서 어떻게든 그 안에서 실마리를 찾으려고 했다. 하도영의 양면성을 가장 명확하게 표현하는 대사는 극중에서 혜정이 말한 “나이스한 개새끼”, 장면으로 꼽자면 비오는 날 운전기사에게 값비싼 와인을 건네며 충고하는 신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적게 입었는데 그게 다 디올이라서”도 마찬가지다. 천박해 보일 수 있지만 천박해 보이지 않아서 좋았다는 뜻이니까. 한편으론 안길호 감독님께서 이 인물의 말투, 행동, 태도에서 양조위 같은 분위기가 나왔으면 좋겠다고 하셔서 〈화양연화〉부터 〈해피 투게더〉까지 그의 전작을 쭉 돌려 봤다. 감히 내가 따라갈 순 없고 그저 약간의 분위기라도 가지고 오고자 했다. 말보다는 진정성 있는 눈빛을 살리는 쪽으로.
터틀넥은 Off-White™. 부츠컷 슬랙스는 Recto.
말한 대로 하도영은 보통 사람과는 다른 인생을 사는 캐릭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으로 공감하는 지점도 있었을 텐데.
나 역시 아이가 있다 보니 하도영이 예솔을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특히 더 이해가 가더라. 부모 마음으로 보자면 나나 하도영이나 다르지 않다.
한편으론 저렇게 똑똑한 남자가 부인의 수상함을 눈치채지 못했을까 의문도 생겼다.
시리즈가 공개되면 가족들과 함께 볼 계획인가?
혼자 볼 생각이다. 제가 연기하는 걸 화면으로 잘 못 본다. 모니터링도 쉽지 않다. 시즌 1이 공개되었을 때도 그랬다. 마침 공연 연습이 한창이라 이틀 정도 연습실에서 먹고 자는 와중이었다.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가 며칠 뒤에 혼자 챙겨 봤거든. 지인들이 왜 계속 ‘짤방’을 보냈는지 그 이유를 나중에야 알았다.
셔츠는 Lemaire.
사실 〈미오 프라텔로〉를 본 연뮤덕들은 당신이 그렇게 차갑고 진중하기만 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공연할 때부터 매체로 나오기까지 오랜 시간을 함께 지켜봐주신 분들께 감사할 따름이다. 1인 6역으로 종합선물세트 같은 인물이었는데 당시에도 “쟤, 왜 저래?”라는 쪽과 “원래대로 하는데?” 두 가지 반응이었다. 하도영에게선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긴 하지.
조만간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짓궂은 연기를 선보일 수 있을 것 같은데.
저는 원래 코미디 전문 배우다.(웃음) 요즘엔 정장을 입고 무표정으로 목소리 깔지만 말이다. 이 또한 내가 가진 여러 모습 중에 하나인 만큼 앞으로 더 다양한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다.
2007년 연극 〈강풀의 바보〉로 데뷔한 이래 지금까지 연기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연기가 좋았다. 떠나고 싶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지원 사업으로 할 수 있는 공연에 최대한 참여하면서 어떻게든 연기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했다. 혹시라도 기회가 생길까 봐. 사실 데뷔 초반엔 기획사에 들어가고 방송에 나오고 대중에게 보여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는데 돌이켜보니 그러지 못했던 게 다행인 것 같다. 그때 주목받았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테니까. 학자가 대학, 대학원, 석사, 박사 과정을 밟으며 공부하듯 저에게는 공연이 곧 공부였다.
자카드 롱 코트는 Niche2night.
당시 답답한 마음에 연기를 잘하는 선배들에게 “어떻게 연기를 잘할 수 있는지?”물었고 “나이 먹으면 잘하게 된다”는 답을 들었다고 알고 있다. 그 말을 믿고 10여 년을 버텼다. 어떤가? 나이 먹으니 정말 연기를 잘하게 되던가?
아니다. 나이를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다른 것 같다. 결국 스스로가 어떤 마음을 먹고 어떤 시간을 보내느냐에 달려있지 않을까.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래도 중심을 잃지 않으려고 열심히 살았다.
그렇게 생각하는 정도가 아니라 저는 완전히 노력형이다. 오늘처럼 화보 촬영이 있다고 하면 포즈 하나 하나 공부해오는 인간이니까.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나부터 자신감이 떨어지고 그건 여지없이 티가 나더라. 나 자신에게 가혹한 타입은 아니지만 늘 무언가 부족하고 어디 하나 모자란 느낌이랄까. 말하자면 나는 ‘난 나야’보단 ‘난 누구?’ 타입인 것 같다.
이순재 선생님은 지금도 대학로에서 공연하신다. 나이가 들어서도 무대 위에 존재할 수 있다는 건 진짜 멋진 일이다. 희망사항이지만,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 사실 〈더 글로리〉 이후의 갑작스러운 관심이 불안하기도 하다. 금방 사라질 것들이니까. 지금의 상황을 최대한 남 일처럼 대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대신 내 눈앞의 일들에 집중하고자 한다. 공연은 공연대로, 연습은 연습대로.
마지막에 본인이 돌아갈 곳은 결국 무대 위인가?
돌아갈 곳이 아니다. 늘 있어야 하는 곳이다.
파이핑 재킷, 펀칭 러플 블라우스는 Caruso. 부츠컷 슬랙스는 Recto.
스스로를 ‘난 나야’라고 확신하기보단 ‘난 누구지?’라고 질문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했기 때문에 이 질문으로 마무리하고 싶다. 30대 때 〈언체인〉이라는 공연 중에 했던 인터뷰다. “만약 40대의 내가 우연하게 이 글을 다시 보게 된다면, ‘아직도 좋아하고 있냐’라고 스스로에게 묻고 싶다. ‘너는 정말로 좋아서 공연을 하고 있고, 정말 행복하냐? 네가 얘기한, 네가 좋아하고 지키고 싶다고 이야기한 것들을 잘 지키고 있냐? 그리고 지금 거울을 보고 ‘누구야’라고 물어봐라. 어떤 느낌이냐.’(한국증권신문, 2019년 5월 14일)”
하하하. 이런 질문을 던져주어서 감사하다. 지금 나에게 딱 필요한 물음이다. 아직도 공연을 좋아하고 있느냐고? 다행히도. 아니, 더 좋아하고 있다. 내가 좋아하고, 지키고 싶다고 이야기한 것들을 잘 지키며 살고 있다. 네가 누구냐고? 지금까지 네가 알던 그대로의 너다. 잘 살았어, 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