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정 작가의 #인생예술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Art&Culture

윤혜정 작가의 #인생예술

예술 같은 하루와 현대미술이 만나면 어떤 화학작용이 일어날까? 피처 에디터로, 갤러리스트로, 작가로 지난 20년간 문화계 최전선에서 예술과 호흡해온 윤혜정이 <인생, 예술>을 펴냈다. 타인의 사적인 예술 고백록을 통해 나의 삶과 예술 사이의 쉼표를 발견한다.

BAZAAR BY BAZAAR 2022.08.29
 
〈바자〉에 연재한 ‘아트 에세이’를 기반으로 현대미술과 사적인 경험을 연결하는 〈인생, 예술〉을 펴냈다. 왜 하필 예술 산문인가?
현대미술을 이야기하는 글에는 대부분 ‘나’가 빠져 있다. 본래 현대미술이 난해한 면도 있겠지만, 그래서 쓰는 사람도 힘들고 읽는 사람도 어려워하는 것 같다. 매우 이론적인 글과 매우 감상적인 글 사이에서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글이 현대미술을 즐기는 하나의 제시가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출발했다. 〈바자〉에 ‘아트 에세이’를 연재하면서 “미술 이야기에서 출발하되 더 나아가 사람과 연결되는 지점에 대해 쓰고 싶다”고 말했었다. 어찌 보면 육아나 일, 일상과 관계에 대한 이야기들인데 연재분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결’이 보이더라. 당시 내가 골몰하던 문제가 그즈음 쓴 글에 어쩔 수 없이 고스란히 드러나기 마련이다. 똑같은 작품이라도 온 세상이 핑크빛일 때와 힘들고 지칠 때 보는 느낌이 다를 수 있다. 이번 책을 쓰면서 새삼 미술과 삶이 이어진다고 느꼈다.
“사람들은 미술 작품을 보면서 위로도 받고 치유도 받고 심지어 울기도 한다던데, 솔직히 난 그런 경험이 없어. 다들 그렇게 감수성이 발달한 거니? 아님 내가 이상한 거니?”라고 묻는 소꿉친구에게 당신은 로스코의 ‘넘버 301’을 떠올리며 대답을 준비한다. 첫 장을 로스코로 시작한 의도가 분명해 보인다.
현대미술의 딜레마 혹은 어떤 모호한 부분을 로스코라는 작가가 상징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미술을 잘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공통적으로 대면하는 딜레마이며, 미술은 항상 그런 존재였다. 다들 현대미술을 즐기는 법에 대해서 묻는다. 나는 늘 작품을 실제로 보고 알아가는 최소한의 시간과 노력, 그리고 애정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친구를 처음 사귈 때처럼 말이다. 예컨대 우리나라에서 미술을 즐기는 인구가 다른 선진국에 비하면 10분의 1 수준이고, 이는 평균보다 약 다섯 배 적은 수치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해외에는 할머니부터 어린아이까지 다양한 층의 관람객이 미술을 보러 다닌다. 하지만 그들이 모두 미술을 잘 알기 때문에 즐긴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그들이 모두 작품을 살까? 아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현대미술이라 하면 일단 컬렉팅부터 이야기한다. 물론 중요하다. 컬렉팅은 현대미술 작가들을 직접적으로 지원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다 해서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분야로 일축할 필요는 없다. 최근에 음악을 좋아하는 어떤 친구가 “미술은 정말 모르겠던데”라고 말하더라. 그러면 나는 이렇게 묻는다. “음악을 듣는 것만큼 많이 보려고는 했고?” 진입장벽이 있다는 소리다.
“미술 작품의 가치에 눈을 뜬 고객만큼이나 미술의 순수한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관람객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국제갤러리 디렉터로서 근거리에서 변화를 목격하고 있을 텐데, 달라진 분위기를 실감하나?
매일 체감하고 있다. 이를테면 8월 21일까지 열리는 유영국 작가 전시가 좋은 예다. 유영국은 예전부터 평론가나 학자들의 지지를 받아온 작가다. 2016년에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유영국 탄생 100주년 회고전을 진행했는데, 당시 도록을 보면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아서 아쉽다’ ‘작가에 대한 연구가 더 이뤄져야 한다’는 말로 마무리되어 있다. 국제갤러리에서도 4년 만에 유영국 작가 전시를 열었는데, 달라진 분위기에 깜짝 놀랐다. 이른 아침부터 관람객들이 찾아든다. 전시를 보는 행태도 훨씬 더 열정적이라고 할까. 중장년부터 MZ세대까지 연령층도 다양하다. 이유는 여러 가지일 것이다. 이건희 컬렉션이 부상했고 방탄소년단 RM 같은 젊은 인플루언서들의 미술 사랑에 힘을 입기도 했을 것이다. 어찌 됐든 관객층이 확장되면서 고객과 관객을 동시에 응대해야 하는 갤러리의 역할이 더 강화됐다. 미술 현장과 시장에서 공히 위력이 있는 작가들 중에서 관객의 지지를 받지 않는 작가는 없다. 물론 미술계에서 유난히 더 알아주는 작가도 있지만 손님 없는 잔치가 풍성할 리 없다. 이제 막 관심을 가진 관객에게 미술을 제대로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고 싶다. 미술이 뜨거운 트렌드로만 그치는 것이 지금 상황에서는 가장 나쁜 시나리오다.
제목을 〈인생, 예술〉로 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인생과 예술 사이의 쉼표는 무엇을 함축하나?
출판사에서 〈인생 예술〉을 제안했다. 내 원고를 객관적, 주관적으로 읽는 첫 독자이자 전문가인 그분들의 느낌과 감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 작품들이 나의 인생의 어느 부분을 함께했다는 의미에서 ‘인생 예술’이 맞지만 또 전부는 아니고, 각자의 인생 예술이 다 다를 텐데 너무 단정 지어 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 우려도 있었다. 미술 작품을 들여다보고 경험하는 과정을 제안하고 싶었던 것이지, 이 작품들이 정답 혹은 최종 목적지는 아니라는 거다. 게다가 이번 책을 작업하면서 세상에는 훌륭한 예술가들이 정말 많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됐다. 그래서 쉼표를 넣자고 제안했다. 쉼표는 책 속의 예술가 28인은 물론 다뤄지지 않은 이들의 존재를 함축한다. 그리고 쉼표로 인해 ‘인생, 예술’은 ‘인생 그리고 예술’이 될 수도 있고 ‘인생과 예술’이 될 수도 있으며 ‘인생 그러나 예술’이 될 수도 있다. 인생과 예술 사이에 나는 짐작하지 못하는 누군가의 다양한 감정과 통찰이 존재함을 존중하는 쉼표이기도 하다. 예술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독자들의 해석도 달라질 수 있어 더욱 흥미롭다.
작가 28인과 작품 28점을 선별한 기준이 있나?
나로 하여금 쓰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든 작품들이었다. 글을 의도하지는 않았음에도 어떤 작품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될 때가 있다. 이를테면 크리스티앙 볼탕스키의 작품을 보고, 책에 썼듯 ‘아버지가 죽음을 선명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 혹은 경험’이 그의 작품 ‘황혼’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또 다른 예로, 박진아 작가의 ‘노란 바닥 01’을 처음 보는 순간 에디터 시절의 어느 날이 불현듯 떠올랐다. 당시 촬영장의 긴장감, 공기의 습도, 계절의 냄새 같은 것들이 순식간에 상기된 거다. 내가 겪은 삶과 내가 보는 작품이 조우해 생겨난 예기치 못한 화학작용을 경험했다. 그럴 때는 쓴다. 쓸 수밖에 없다. 반대로 작품은 너무 좋고 감동적이고 심지어 유명한데, 글까지 인연이 닿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언제일지 모르는 다음을 위해 간직해뒀다.
 
첫 번째 인터뷰집 〈나의 사적인 예술가〉에서 다룬 작가들은 대체로 제외되었지만 양혜규, 로니 혼, 우고 론디노네는 예외였다.
세상에는 수많은 예술가가 있고, 한 사람이라도 더 소개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 세 사람의 경우에는 또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작업 반경이 광범위하다. 양혜규의 최근 작품을 보면 ‘창고 피스’ 같은 초기작을 예측하기 힘들다. 그런데 나는 ‘창고 피스’가 양혜규를 양혜규이게 한 용기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창고 피스’를 통해 느낀 작가의 결핍과 용기는 지금의 내게도 매우 중요한 주제,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로니 혼의 ‘You are the weather’는 작가의 작업 세계에서 차지하는 중요도에 비해 첫 책에서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 이 글을 썼던 2년 전 여름 날씨가 정말 요상하기도 했고. 날씨를 말하면서 이 작품을 통해 로니 혼 작업의 핵심으로 들어가는 과정이 흥미로웠으므로 역시 써야 했다. 우고 론디노네의 ‘수녀와 수도승’은 신작이었다. 부산에서 우고 론디노네의 전시 «넌스 앤드 몽크스 바이 더 씨» 기자간담회로 정신이 없는 와중에 친한 친구의 부고 소식을 들었던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첫 책에서 다룬 우고의 ‘수동성과 능동성’이 결국 ‘삶과 죽음’과 연결되는 데다, 슬픔과 상실을 경험한 그때 그 작품이 내 앞에 있었다는 게 중요하다. 어쨌든 쓰고 싶었다. 아니, 쓰게 됐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양혜규의 ‘창고 피스’를 이야기하며 ‘닥치는 대로 책을 읽고 영화를 보았으며 전시를 보러 다’니며 결핍을 극복해보려고 애썼던 당신의 대학 시절을 떠올리기도 한다. 그 시기에 마음을 움직인 첫 아트 피스를 기억하나?
대학교 신입생 때 국제갤러리에서 앤서니 카로 전시를 봤다. 가물가물하지만, 1996년 즈음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세자르 전시에서 폐자동차나 폐철 같은 재료로 만든 작품을 보고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프랭크 스텔라, 사이 톰블리, 요셉 보이스 같은 작가들의 작품도 그즈음 접했던 것 같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당시 내 인생에는 미술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긴급한 게 많았던 것 같다.(웃음)
가장 최근에 사로잡힌 작가와 작품은 무엇인가?
마음이 가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이상하게 마음이 가는 작품들이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나너의 기억»에서 본 안리 살라의 영상 작품 ‘붉은색 없는 1395일’이 그랬다. 사라예보 내전을 소재로 한 작품을 보고 나왔더니, 삼청동의 풍경이 무척 초현실적으로 다가왔다. 공기도, 햇빛도, 바람도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시종일관 여자가 불안한 표정으로 걷고 뛰면서 내던 숨소리와 영상 전반에 깔리던 저음의 바순 소리가 좀체 잊히지 않았다. 그러다 텅 빈 거리를 달려가는 사람을 포착한 사진 작품을 봤는데, 그 이미지가 나를 확 낚아채는 듯한 기분이었다. 덕분에 무리한 일정에도 안리 살라에 대해 썼고 다행히 이 책에 실을 수 있었다.
“예술 감수성이란 어떤 작품에 어떤 작가에게 내 마음을 온전히 내어줄 수 있는 상태”라고 정의했다. 어떻게 해야 예술 감수성을 키울 수 있을까?
나는 예술가들이 작품을 통해 던지는 질문들이 ‘축지법’에 기반한다고 생각한다. 축지법은 시간과 속도의 문제가 아니라 실은 땅을 접는 법, 즉 인식의 문제다. 일상은 소중하지만 동시에 한정된 시공간이다. 그 속에서 예술가들의 이런 질문을 통해서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지구 반대편의 일에 가 닿게 된다. 그래서 작품을 보다 보면 작가가 이를 구상하고 구축해온 시간 같은 게 느껴지곤 한다. 비문학적인 에피소드랄까? 실제 내 눈앞에 전시된 작품은 바다와 대륙을 건너, 수많은 이들의 손을 거쳐 이곳에 당도한다. 그 여정 자체가 특별하게 다가오는 거다. 그래서 보지 않은 작품, 사진으로 본 작품, 실제 본 작품은 모두 다를 수밖에 없다. 인터뷰를 하기 전의 나와 후의 내가 같은 인간일 수 없듯이. 순진한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나는 여전히 미술, 그리고 이를 본다는 것에 대한 순수한 경외감을 갖고 있다. 데이비드 색스가 〈아날로그의 반격〉에서 “LP로 음악을 듣기 위해 해야 하는 과정들이 ‘음악을 경험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고 했는데 나 역시 미술 작품을 보기 위한 모든 과정이야말로 ‘미술을 경험한다’는 느낌을 선사한다고 생각한다. 전시를 본다는 건 골치가 아프면 아픈 대로, 혼란스러우면 혼란스러운 대로 그 감정에 나를 맡기는 행위인데, 그런 진공의 시간을 통해 예술 감수성이 성장한다고 생각한다.
지난 20년 동안 피처 에디터로, 갤러리스트로, 작가로 문화계 최전선에서 예술가들과 만나왔다. 당신에게 예술이란 곧 인생인가?
예술이란 나의 인생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나의 인생의 일부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의 인생 뒤에 붙은 쉼표, 나의 인생을 다른 시간, 다른 인생, 다른 예술의 존재와 연결하는 그 쉼표다.
당신이 인터뷰 말미에 자주 던지는 질문으로 되묻고 싶다. “당신의 판타지는 무엇인가?”
모 작가가 얘기했듯 그냥 사라지는 것. 지금 내가 하는 모든 일을 그만두고 완전히 다른 삶을, 예술보다 더 흥미진진한 삶을 살아보는 것. 그게 영영 요원할 것 같은 나의 판타지다. 예술은 인생을 더 흥미롭게 만들지만 예술보다 흥미로운 것이 바로 ‘인생,’이니까. 그럼 판타지가 아닌 꿈은? 소설이 되었든, 시나리오가 되었든, 한 번도 보지 못한 글이 되었든 세상의 모든 예술에 대한 예술보다 더 흥미진진한 글을 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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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에디터/ 손안나
    사진/ 안주영, 을유문화사(표지)
    헤어&메이크업/ 정해인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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