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한강에 있으면 많은 생각이 들거든요. 은경 씨는 어때요?
사실 자주 와보지는 않았어요. 가끔 올 때마다 온갖 감정이 섞여 있는 곳 같다는 생각은 들었어요. 운동하는 사람도 있고, 피크닉 나온 사람도 있고. 그 많은 사람 중에 밝게 웃고 떠드는 사람도 있는 반면에 강을 보며 상념에 잠기는 사람도 있을 거고. 강은 말 없이 한자리에서 오랫동안 흐르잖아요. 우리의 삶과 가까이 오래 닿아 있는 것 같아 나도 그와 닮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요.
드라마 〈머니게임〉을 마치고 일본에서 활동을 시작했어요. 그게 벌써 2년 전이네요.
작품을 찍으러 나갔다 코로나가 심해지면서 체류가 길어졌어요. 예상 못하고 가족들한테도 “일 보고 다시 올게” 했는데.(웃음) 운 좋게 스케줄이 계속되고 시상식도 있어서 지내다 보니 2년이 지났어요.
셔츠는 Salvatore Ferragamo. 팬츠는 Bottega Veneta. 타이는 Prada. 슈즈는 Celine by Hedi Slimane.
오랜만에 관객과 만날 작품으로 로맨스 영화 〈별빛이 내린다〉를 선택했어요. 어떤 점에 이끌렸나요?
하고 싶은 역할을 할 때도, 전혀 예상치 못한 작품을 하게 될 때도 있어요. 이번에는 후자인데요. 〈머니게임〉이 그랬어요. 시놉시스나 대본을 읽었을 때 뭔가 너무 어렵겠더라고요. 그런데도 이건 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더 어렸을 때 〈태양의 여자〉에서 김지수 선배님 아역으로 나왔을 때도 그랬고요. 공통점은 어렵게 다가온다는 거예요. 어려우니까 이걸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맞는 걸까 맞지 않는 걸까 생각은 하지만, 느낌이 ‘하게 될 것 같다’ ‘또 고생 시작이네’(웃음) 이렇게 되는 작품들이 있어요. 이런 작품들은 연기에 대한 고민이 훨씬 많죠. 또 시작됐어요.
연기에 대한 고민이 들 때 어떻게 해법을 찾나요?
어릴 때부터 촬영 현장에 있으면서 저절로 몸에 익어버린 감각들이 있어요. 앵글이 이렇게 있으니까 내가 이렇게 하면 되겠다, 스스로를 또박또박 그리곤 했어요. 이걸 없애보면 어떨까 하던 참에 〈드라이브 마이 카〉라는 영화를 보면서 연기에 접근하는 방식에 대해 새롭게 생각해보게 됐어요. 예전부터 하마구치 감독님이 배우들과 트레이닝을 한다는 얘기를 들어왔거든요. 책을 읽는 것처럼 대사를 소리 내서 읽어 보거나 제 안에서 감정을 쪼개보기도 하고. 무엇보다 내가 캐릭터를 어떻게 생각하고 감정을 내비칠 수 있는지, 감독님이 수용해주실지 아니면 다른 생각을 갖고 계시는지, 그런 상호작용이 굉장히 중요한 작업이라는 생각을 곱씹곤 해요.
영화를 보면서 단순히 즐기지 못하고 살펴보게 되는 일종의 직업병이네요.(웃음)
그런 게 힘들고 벅차서 한동안 영화를 안 봤어요.(웃음) 훌륭한 영화를 보면 ‘내가 저렇게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먼저 드니까. 밖에서 사람들을 만나거나 혼자서 산책하면서 환기를 시켰어요. 그러다 작년 연말에 갑자기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내가 정말 열심히 한 게 맞았나, 열등감과 제대로 마주하지 않았던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번뜩 들더라고요. 서른을 앞두고 너무 늦된가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계속 보고 듣고 느끼는 수밖에 없구나 싶어 다시금 영화를 보기 시작했어요.
나이의 앞자리 숫자가 바뀔 때마다 이런저런 생각이 드는 건 누구라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다가오는 서른이 어떻게 느껴지나요?
빨리 30대가 됐으면 좋겠어요. ‘청춘’이라는 카테고리에서 조금 더 멀어지잖아요. 저는 그게 기대가 되나 봐요.(웃음) 청춘의 한자가 푸를 ‘청’에 봄 ‘춘’, ‘청춘’이라 명명하는 것들은 빛나지만 내면의 방황이나 분열도 있으니까요.
재킷은 Gucci. 싸이하이 부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그 청춘을 누구보다 청춘답게 보냈어요. 갑자기 유학을 간 것도 일본으로 떠나는 결정도요. 그건 용기일까요?
용기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아직까지 소심한 면도 많고 낯도 많이 가려요. 연기에 살고 연기에 죽는다! 어릴 때는 이런 느낌이었어요.(웃음) 앞으로의 연기 인생을 위해 경험을 많이 하자 싶어 한 선택인데 어느 순간 그 선택들이 제 발목을 붙잡기도 했어요. 연기밖에 모르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팬분들이 제가 어릴 때 했던 인터뷰를 찾아주신 적이 있는데 내 자신이 어떤지에 대해 어필하고 있었어요. “나 이래. 나 이러니까 나 좀 봐줘.” “평생 연기를 할 거예요.”라는 말도 자주 했는데 연기라는 게 예술이고, 예술적인 것들을 많이 접하고 예술적으로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이 컸어요. 지금은 일이죠. 일본 활동을 시작하고 영화와 드라마, 광고까지 일이 이어지면서 의외로 정신없이 지나갔어요. 잘 모르니 한번 해보자가 되고 그렇게 두려움이 없어졌어요. 다시금 연기를 새롭게 바라보게 된 계기가 됐어요. 그리고 언젠가는 물러서야 할 때가 올 거고 그때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고요.
일본에서 큰 상을 여섯 번이나 탔어요. 일본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신문기자〉로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받고 흘린 눈물에 많은 게 담겨 있을 것 같은데.
전혀 예상을 못해서 아이가 놀라 우는 것처럼 눈물이 나왔어요.(웃음) 예전에 백상에서 상을 탔을 때도 똑같은 기분이었어요. 내가 아는 분신이 대신 받은 것 같은데 집에 가면 트로피가 놓여 있고.(웃음) 마냥 기쁘다는 단순한 감정이 되지는 않더라고요. 상에 취해 안주하면 안 된다, 안주하면 도태된다. 문화의 흐름과 사람들의 생각은 계속 바뀌는데 저도 그에 맞춰 고민해야 하고 만약 반론이 생기면 그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고. 많은 생각을 하다가도 결론은 갑작스러운 변화에 혼란스러워하지 않았으면 싶은 것밖에 없어요.
일본 작품 중에서 〈블루 아워〉의 “한가하니까요.”라고 말하는 개구쟁이 같은 모습이 기억에 남아요. 외국인 배우가 아닌 그냥 배우로 영화 속에 녹아 있었다고 할까요.
대본에 윙크는 없었는데 나중에 보니 순간적으로 애드리브한 장면을 썼더라고요.(웃음) 낡고 지친 분위기의 주인공 옆에서 계속 “이거 해볼까요? 저거 해볼까요? 이거 어때요?” 하는 마치 〈알라딘〉의 지니나 〈겨울왕국〉의 올라프 같은 존재였어요. 지금까지 필모 안에서 전혀 해본 적 없는 역할이었고 일본어가 익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슬랭 같은 일본어를 쓰는 역할이라 저에게도 참 독특한 기억으로 자리 잡고 있어요. 무더웠던 여름 딱 2주 동안 주연 배우인 카호 씨와 동고동락하고 스태프들과 으샤으샤 하면서 마냥 행복했어요.
요즘 좋아하는 게 뭔가요? 항상 문화를 열렬하게 좋아했죠.
영화를 다시 보기 시작하면서 항상 좋아했던 음악이 주가 되는 영화들을 찾아봤어요. 그 중에서 〈벨벳 골드마인〉을 인상 깊게 봤어요. 특히 영화의 엔딩이 뇌리에 깊이 남아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사람들, 그 사람들이 기억에서 잊혀지는 순간들, 그럼에도 기억해줬으면 좋겠다는 염원을 담고 있는 것 같아서. 자연스럽게 글램 록에도 빠져 있어요.
플레이 리스트가 궁금해지네요. 전부 글램 록인가요?
1980년대 신스팝이나 록 뮤직을 많이 들어요. 펫 숍 보이스, 브론스키 비트, 컬처 클럽. 그 시대에 대한 동경이 생겼어요. 세계적으로 80년대는 정말 멋스러웠던 시대였던 것 같아요. 무모하기도 했지만 정제된 것과 날것 사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가 좋아요.
빈티지 러플 셔츠는 Bell & Neauvo.
태어나기도 전이죠.(웃음) 동시대에 좋아하는 뮤지션은 에스파인가요? 팬심이 기사화되었어요.
‘Savage’ 컴백 때 인스타 스토리에 “너무 좋아서 눈물을 너무 많이 흘린 나머지 우리 집은 바다입니다.”라고 썼는데 신문 기사에 ‘심은경 에스파 때문에 울어. 대체 무슨 일?’ 이렇게 나오니까 괜스레 너무 주책맞았나 싶더라고요.(웃음) 케이팝도 너무 좋아해서 다 들어요. 특히 에스파 분들의 음악이랑 콘셉트가 매우 록스타 같았어요. 직접 기타를 들지 않아도 되게 록스타 같잖아요. 옛날 런어웨이즈 보는 것 같고.
필름카메라를 가져왔네요. 풍경을 몇 장 찍었어요.
영화 보기나 책 읽기가 저한테는 공부의 카테고리에 들어가기 때문에 취미가 될 수 없더라고요.(웃음) 일본의 사진가인 치카시 스즈키 상과 작업을 하다가 필름카메라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내 취미는 뭐지? 하다가 치카시 상의 얘기가 떠올라 함께 신주쿠의 중고 카메라 거리에 가서 추천받은 카메라를 샀어요. 사서 돌아가는 길에 도로랑 하늘을 찍었는데 다 흔들렸더라고요.(웃음)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사진도 많은데 그것 또한 보는 재미가 있어 종종 찍게 됐어요.
연기를 시작한 11살의 심은경과 지금의 심은경은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가요?
아역배우로 데뷔하기 전이었던 것 같아요. 엄마한테 제가 그랬대요. “작품 하나는 하고 그만둔다”고요. 그만큼 연기를 위해서 모든 걸 다 하고 싶었어요. 인생에서 처음 잘해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느끼게 해준 게 연기였으니까. 그때의 모습을 항상 생각해요. 열정은 조금 사라졌지만 그 마음이 다음을 만들어줬어요. 지금은 고민이 있고 힘들더라도 일단 밥 먹을 시간에 밥 먹고 할 일을 하며 하루를 잘 보내는 어른이 되었고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