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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국내 연극 무대에 서는 심은경의 여섯 가지 페르소나

5월 22일 시작하는 연극 ‘반야 아재’를 앞둔 심은경과 나눈 대화.

프로필 by 고영진 2026.04.30

SIX PERSONA


카메라 앞에 선 심은경에게 무대 위에서 독백하는 배우가 되어달라 했다. 마치 기다렸다는듯, 대사를 읊는 얼굴에는 금세 기쁨과 슬픔, 의문과 분노가 서렸다.



멀티 컬러 재킷, 플리츠 스커트는 Thom Browne. 더비 슈즈는 Dr. Martens.


오버사이즈 화이트 셔츠는 Thom Browne. 레더 팬츠는 Arket. 더비 슈즈는 Dr. Martens.


러플 포인트 미니드레스는 Loewe. 레더 팬츠는 Arket. 힐은 Lemaire.


셔츠는 Thom Browne.


하퍼스 바자 연극 <반야 아재>의 대사죠? 카메라 앞에서 줄곧 읊었던 말이요.

심은경 맞아요. 요즘 언제 어디서든 대사가 툭 튀어나올 수 있게 훈련하고 있거든요. 그때그때 떠오르는 대사들을 복기하는데, 아까 중얼거렸던 건 2막의 어떤 장면이었어요. 카메라 앞에서 대사를 읊어보니 긴장도 금방 풀리네요. 표정도 훨씬 풍부하게 나오는 것 같고요.

하퍼스 바자 <반야 아재>는 한국에서 처음 오르는 연극 무대죠. <여행과 나날>로 일본 키네마 준보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이후 일본에서 작품 활동을 이어갈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처음 해보는 일에 뛰어들었어요. 어떤 마음을 먹은 건가요?

심은경 연극 대본이 들어왔을 때 사실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어요. 자신이 없었어요. 일본에서 연극을 경험해 봤는데, 그때를 돌이켜보면 무대가 굉장히 큰 부담으로 느껴지거든요.(심은경은 2019년 일본에서 톰 스토파드가 곡을 쓰고, 앙드레 프레빈이 작곡한 음악극 <Every Good Boy Deserves Favor>로 무대에 선 적이 있다.) 무대와 배우, 관객밖에 없는 극장에서 라이브로 연기를 하는 것 자체도 두려운데, 일본어로 해야 했으니 부담이 배가 되었던 것 같아요. 그때 생각했어요. 연극은 어마어마한 힘이 필요한 작업이구나. 나는 아직 힘이 없는 배우인 것 같다. 이 작품을 마주했을 때도 비슷한 마음이었는데, 동시에 저기 마음 한쪽 구석에서 ‘나는 이 연극을 할 수밖에 없겠다’는 예감이 스멀스멀…. 그런 작품들이 있거든요. 일종의 ‘작품 내림’이라고 해야 하나.(웃음) 운명처럼, 혹은 신의 계시처럼 이끌리게 되는 작품이 있더라고요. 배우로서의 목표에 가까워지기 위해 이 과정이 필요하다면 할 수밖에 없겠구나, 하고 담담히 받아들이게 되는 거죠.

하퍼스 바자 배우로서의 목표라면?

심은경 되고 싶은 예술가의 면모가 있어요. 이를테면 임윤찬 피아니스트 같은. 하고자 하는 예술을 보여주는 데 있어 진중하고 열정적인 모습을 보면서 감명을 받았거든요. 구도자의 면모가 있는 예술가라고 생각해요. 꿈꿔왔던 이상향의 모습이고요. 저는 오래, 꾸준히, 진실한 연기를 하는 배우가 되고 싶거든요. 그렇다면 편안한 길을 택하기보다 두려워도 나아가는 쪽을 택해야겠죠. 비단 배우에게만 적용되는 건 아닌 것 같고, 인간의 삶이 다 그런 것 같아요.

하퍼스 바자 생애 첫 악역을 맡은 드라마 <대한민국에서 건물주 되는 법>도 같은 맥락에서의 선택이었던 거고요?

심은경 일단 여성 배우가 그런 캐릭터를 맡았던 사례가 없었거든요. 이 캐릭터를 통해 저만이 표현해낼 수 있는 악인을 만들어보는 것이 숙제였어요. 제가 관심 있었던 건 ‘요나’의 악함이 아니라 다면성이었어요. 이 사람이 얼마나 악한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악한 사람이라고 해서 순수하지 않을 거라는 편견을 뒤엎는 것이 제가 할 일이라고 생각한 거죠. 인간은 누구나 다양한 얼굴을 갖고 있잖아요. 전부터 악역을 해보고 싶었던 건 그런 이유들이었어요.

하퍼스 바자 <반야 아재>에 불가항력의 힘을 느낀 이유 중 하나는 안톤 체호프라는 역사적인 작가의 글이라는 점도 큰 작용을 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원작인 <바냐 아저씨>는 고등학생 때 처음 접했다고요.

심은경 꼭 읽어야 한다는 어른들의 추천으로, 뭣도 모르고 읽었죠. 사실 ‘나 체호프 읽었다!’ 하려는 거였지, 체호프의 희곡에 매력을 크게 느끼진 못했어요. 솔직히 지금 읽어도 지루한 면이 있어요. 근데 보다 보면 ‘나도 저런데’ 하면서 살풋 웃게 돼요. 안톤 체호프의 작품이 높이 평가받는 이유가 바로 이런 지점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따분하고 때로는 우스꽝스럽고,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은 장면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가 있어요. 지극히 평범한 인물들 사이, 제대로 된 소통도 없고 별일 없는 것 같지만 각자의 내면에는 욕망이 그득하죠. 전부 드러내고 표현하지는 않지만 상황에 미묘하게 묻어 있기 때문에 은근한 긴장이 흘러요. 하면 할수록 웬만한 서스펜스보다 그 정도가 세다고 느낄 정도로요.

하퍼스 바자 은경 씨가 연기한 ‘은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거절당하고, 무너지는 삼촌을 옆에서 지켜봐야 하는, 일상의 잔잔한 좌절과 슬픔 가운데서도 묵묵히 일상을 살아내는 인물이에요. 그리고 종국에는 이 극에서 가장 유명한 대사를 뱉죠.

심은경 “우리 살아가요. 힘겨운 낮과 기나긴 밤들이 영원히 반복되어도, 하루하루 살아나가요.” 어쩌면 이 극은 이 대사를 향해 가는 여정이기도 해요. 은희는 어리지만 한 가정을 이끌고 나아가는 가장다운 면모가 있어요. 자기 꿈을 이루는 것보다 가족의 안위를 생각하죠. 동시에 몇 년 동안이나 ‘해일’이라는 의사 선생님을 마음에 품고 있어요. 어떻게 보면 유일하게 표현되는 그녀의 욕망이자, 삶의 탈출구인데 바라던 사랑이 실현되지는 않아요. 근데 은희는 자신의 사랑이 실패한 와중에도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위로를 건넬 수 있는 사람이에요. 강인하고 섬세한 은희의 면면을 차곡차곡 잘 쌓아두어야만 마지막에 사막에서 뱉는 그 대사에 큰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준비하고 있어요.

하퍼스 바자 은희는 대체로 조용하고, 따뜻하며, 이 극에서 어쩌면 가장 도덕적인 인물이자 말없이 모든 관계를 지탱하는 축이기도 해요. 오늘 본 심은경이라는 사람과도 닮아 있는 것 같고요.

심은경 닮았다고 하기에 은희는 너무나도 큰 사람이에요. 사실 처음엔 은희라는 캐릭터가 너무 크게만 보여서 망설인 것도 있어요. 앞서 언급한 은희의 마지막 대사만 봐도 그렇죠. 저한테는 그런 자세가 없거든요. 지금 이렇게 거창하게 말하고 있지만, 사실 이 모든 건 제가 도달하고 싶은 모습에 가까워요. 인터뷰는 기록으로 남잖아요. 뱉어두면 어떻게든 실천에 옮기게 되더라고요. 그러니까 지금은 실재하는 나 말고, 꿈꾸는 삶의 방향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하퍼스 바자 4년 전 <바자>와 했던 인터뷰도 기억해요? 빨리 30대가 되었으면 좋겠다, ‘청춘’이라는 카테고리에서 조금 더 멀어지는 것이 기대가 된다고 말했죠. 지금까지 겪어본 30대의 삶은 어떤 것 같아요?

심은경 그때는 젊다는 사실이 너무 괴로웠어요. 젊음 하면 무언가를 부단히 꿈꾸고, 생동감 넘치는 삶이 그려지잖아요. 전 그런 사람이 아니었거든요. 항상 그 반대 지점에 있었어요. 늘 고민에 쌓여 있고, 마구 내달리고 싶지도 않고, 내성적인 모습이었죠. 적어도 30대 정도는 되어야 이런 나의 모습과 어울리는 나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그런 모습도 열정의 한 단면이었던 것 같아요. 잘하고 싶어 주저하고 고민한 시간들도 결국 청춘의 일부였던 거죠. 바라던 30대가 되었고, 아주 조금씩 여유가 생기기 시작하니 보이더라고요. 요즘은 그때와 많이 달라요. 일단 더 많이 웃고 있고요, 사람들과 더 잘 어울릴 수 있는 나만의 방식도 생겼어요. 그리고 아직 나는 젊고, 늦지 않았다고 느껴요. 진심으로요. 그럼에도 그땐 그게 최선이었을 거예요. 시간이 흐른 뒤 깨달을 수밖에 없는 것들이 있는 거겠죠. 그러니 불안할 땐 마음껏 불안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하퍼스 바자 적어도 30대가 된 심은경에게 겁이 늘지는 않은 것 같아요. 올해만 해도 악역과 연극, 처음 해보는 일을 벌써 두 가지나 벌였잖아요. 매번 도전인 선택을 할 수 있는 건 순수한 향상심 때문인가요?

심은경 일단 저는 제가 하는 것들을 두고 그렇게까지 큰 도전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선택의 이유에 향상심만 있지도 않은 것 같고요. 결국은 후회가 저를 이끌어준 것 같아요. 후회하지 말자고들 하지만, 저는 그럴 수 없는 사람이에요. 뒤돌아보고, 반성하고, 잘한 건지 모르겠다면서 고민하는 사람이죠. 이런 내 자신이 미련하게 느껴질 때도 많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렇더라고요. 그 미련한 구석이 저를 지금까지 이끌어준 거예요. 인간을 표현하는 것이 제 업이잖아요. 내면에 소용돌이치는 불안과 고뇌를 표현하는 것이 일인 사람이라는 건데, 저는 겉으로만 표현하는 배우가 되고 싶지는 않아요. 두려움을 감내하고서라도 그 안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게 맞겠죠. 연극도 그래서 선택한 거고요.

하퍼스 바자 첫 공연을 한 달 앞두고 있고, 무의식 중에도 대사가 툭 튀어나올 정도로 노력했음에도 여전히 두렵나요?

심은경 하루는 연습 끝나고 혼자 벤치에 앉아서 연극을 올리게 될 해오름 극장을 넋 놓고 바라봤어요. 왜 하겠다고 했지? 드라마 끝나고 좀 쉬어도 됐을 텐데, 왜 그랬을까? 내 의지인 척했지만 결국은 주변에서 연극을 했으면 좋겠다는 권유에 속아 넘어간 게 아닐까? 왜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까? 별별 생각이 다 들어요. 마치 성경에서 예수가 죽기 전 “내가 왜 죽어야 합니까” 하는 대목의 심정이었던 거죠. 그렇다고 제가 예수와 비할 사람은 결코 아니지만요. 어찌 됐든 나는 은희를 연기하게 되었고, 은희만큼 강인한 인물은 못 되기에 우리 사이 간극을 어떻게든 좁혀 보려 애써야겠구나. 결국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터덜터덜 집으로 갔죠. 불과 며칠 전 일입니다.(웃음) 요즘은 이런 날들을 보내고 있어요. 소용돌이 한 가운데를 지나고 있는 중인 거죠. 아마 연극이 끝날 때까지 이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을 거예요.


플라워 패턴 코트는 Dries Van Noten.


플라워 패턴 코트, 화이트 셔츠는 Dries Van Noten.


드레스는 Tod’s.


벨벳 재킷, 팬츠는 Wooyoungmi. 화이트 셔츠는 Dries Van Noten. 슈즈는 Lemaire.


Credit

  • 사진/ 박배
  • 헤어/ 이에녹
  • 메이크업/ 이봄
  • 스타일리스트/ 이지민
  • 어시스턴트/ 신형진
  • 디자인/ 이예슬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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