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훈 김덕훈 작가는 세밀한 흑연의 획을 중첩하여 그 물성을 드러내며 정물화, 영화의 장면, 도시의 풍경 등을 표현한다.
대학에서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후 디자이너로 일하던 시절, 작업을 해야겠다고 결심했을 때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해보려는 마음으로 연필로 작업하기 시작한 게 여기까지 오게 됐다. 이후 수년간 흑연 작업을 하면서 이 심플한 도구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하게 됐다. 원래도 흑백의 작업을 좋아했지만 흑연의 회색은 모든 색이 뒤섞여 있는 색으로서 모든 색의 상위 개념에 해당하는 컬러이자 물질이다. 그처럼 흑연으로 포착한 장면에는 순간이자 영원이 담겨 있는 듯 느껴진다. 지금은 다른 재료에 대한 필요성을 그다지 느끼지 못하고 있다.
이 도구들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는 작업실 풍경을 묘사한다면?
다른 회화 작가들에 비해 매우 단출한 편이다. 책장과 책상이 있고 한 구석에 액자들이 쌓여 있다. 한쪽 벽에 화이트보드에 쓰이는 코팅된 철판이 붙어 있고 그 위에 자석으로 종이를 붙여 작업한다.
회화적 프로세스에서 이 도구들이 어떤 역할을 하는가?
연필은 칼을 사용해서 심을 길게 노출시키고 필요에 따라 끝부분은 사포로 뾰족하게 다듬어 사용한다. 지우개는 칼로 잘라 예리한 면을 사용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자르다 보니 온전한 형태가 없다. 자는 종이에 보조선을 긋기 위해 사용하는데 그림을 벽에 대고 그리기 때문에 얇고 가벼운 그레이딩 자(의상디자인용)를 사용한다. 최근에 예전에 했던 크리스마스 트리 시리즈를 다시 시작했는데 트리를 덮고 있는 여러 크기의 오너먼트를 그릴 때 마트료시카가 유용하게 사용된다.
가장 좋아하는 도구의 시각적 형태나 촉각적 질감이 있다면?
티타늄 코팅된 가위를 좋아한다. 재작년에 구입해서 사용 중인데 종이를 사정없이 깔끔하게 절삭할 때의 쨍한 느낌이 매우 만족스럽다.
앙리 마티스 같은 경우는 말년에 건강 때문에 유화 기법 대신 파피에 콜레 작업에 몰두했는데, 그처럼 전혀 다른 도구를 사용하는 것도 상상해본 적이 있나?
지금 하고 있는 연필 작업이 팔에 꽤 무리가 가는 편이어서 몇 년 안에는 다른 방식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삶에 의미를 부여해보려는 어쩔 수 없는 몸부림.
윤향로 오늘날의 대중문화 이미지가 생산·전유되는 방식을 회화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히어로 코믹물에서 차용한 이미지를 디지털 편집 기술과 에어브러시 등을 통해 추상적으로 그리는 작업을 지속해왔다.
기본적으로 나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지만 회화적 표현을 위한 도구로서 붓을 제외한 다른 도구를 쓰려고 한다. 예를 들면, 인쇄의 기법과 비슷한 도구인데, 특히 스프레이 건이나 에어브러시 등을 주로 사용하고, 물감을 담아 펜처럼 쓸 수 있는 도구나 스펀지 등을 활용한다. 에어브러시나 스프레이 건으로 작업을 하는 것은 물감을 분사해 그림을 그린다는 것인데, 이를 위한 부재료로 각종 마스킹테이프나 비닐이 달린, 소위 말하는 커버링 테이프, 마스킹테이프를 커팅하기 위한 나이프 등을 함께 쓰기도 한다. 궁극의 마스킹테이프를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는데, 제일 좋은 조합은 차량 도색용 마스킹테이프와 마스킹을 위해 제작한 용액의 조합이었다. 건강을 위해 라텍스 장갑과 얼굴 전체를 덮는 마스크, 방진복을 늘 착용한다. 물감은 골덴(Golden) 사의 물감과 각종 미디엄을 함께 사용한다.
이 도구들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는 작업실 풍경을 묘사한다면?
우선 온몸을 방진복, 방진마스크, 고글, 라텍스 장갑이 감싸고 있다. 그리고 이 도구들과 나는 사방에 분사되어 공기 중에 떠도는 물감 입자와 당시 사용하고 있는 색으로 작업실을 가득 물들인다.
회화적 프로세스에서 이 도구들이 어떤 역할을 하는가?
본격적으로 캔버스에 그림을 그려 발표한 시점은 2017년 정도쯤인 것 같다. 그전까지 계속 회화 작업을 한다고 이야기했지만, 비디오, 인쇄, 태피스트리, 라이트 박스 등 다른 기법과 재료로 회화를 표현하는 방향으로 주로 작업했다. ‘이 시대의 회화’에 대해 고민을 해왔는데, 시대가 담긴 회화를 만들려면 이 시대가 바라보는 이미지, 혹은 생산해낸 이미지에 대한 태도 등을 함께 수반하며 작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이미지를 송출하는 디바이스의 방식이나 태도까지도. 그래서 지금 내가 사용하는 도구의 조합은 내가 생각하는 현재의 이미지와 그것을 바라보는 태도가 함께 조합된 것이다. 개인적으로 작가의 필력이나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회화적’ 회화보다 다른 방식의 회화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태도나 고민이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 미디엄의 선택과 제작 과정에도 영향을 미쳤고, 조금 다른 태도와 방식으로 물감을 다루는 방향으로 나를 이끌었다.
가장 좋아하는 도구의 시각적 형태나 촉각적 질감이 있다면?
내가 사용하는 스프레이 건 두 개는 물감을 담는 부분이 흰색 플라스틱으로 되어 있는데, 이 부분이 방금 쓴 물감의 색과 그 때까지 작업에서 사용한 물감 색의 흔적으로 물든다. 거기서 열심히 작업한 기분을 만끽하며 변화하는 색을 관찰하곤 한다. 그리고 에어브러시와 스프레이 건 모두 그림을 그리고 나면 분해해서 세척을 해야 하는데, 이때 총기를 다뤄본 적은 없지만 총기를 다듬는 느낌이랄까. 차가운 도구의 질감과 모든 부품을 분해해 세심하게 닦으면서 전장에 나갈 대비를 하거나 정리를 하는 기분에 비장한 마음까지 갖게 된다. 나는 세상의 모든 컬러를 사랑하는데, 작품에서 가장 자주 보이는 컬러는 푸른색 계열인 것 같다. 다른 컬러를 사용하는 경우에도 푸른색의 온도를 가지는 어떤 색을 사용하는 것 같다고 느낀다.
앙리 마티스 같은 경우는 말년에 건강 때문에 유화 기법 대신 파피에 콜레 작업에 몰두했는데, 그처럼 전혀 다른 도구를 사용하는 것도 상상해본 적이 있나?
아이를 혼자 양육하게 되며 작업과 양육의 시간을 배분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해졌고, 시간과 장소의 제약에 대한 생각을 계속 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택한 작업 방식은 시간, 장소, 건강에 매우 취약한 부분이 있는데, 이런 것을 조금 다른 방식의 작업으로 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아마 올해 스스로도 예상치 못한 작업을 시작하게 되지 않을까 기대한다.
나에게 재현은 내가 살고 있는 시간에 대한 기록이다. 나는 이미지를 생산하는 사람이니까, 이미지로 시간과 시대를 기록하려고 한다. 내가 만드는 이미지가 세상의 한 부분에 대한 기록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안동선은 컨트리뷰팅 에디터이다. 오일 페인팅의 두껍게 쌓이는 불투명함, 수채화 물감을 머금은 붓이 종이 위를 스무드하게 스치면서 남기는 투명한 물기 등 회화 도구의 촉각적인 물성을 경험한 후로는 그림 보는 일이 공감각적인 매혹에 다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