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 샤덴프로이데 심리학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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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 샤덴프로이데 심리학

점차 강도를 더해가는 온라인판 마녀사냥을 보면서 이제 샤덴프로이데가 일종의 시대정신이 되었다는 공포를 느낀다. 대체 이 못된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BAZAAR BY BAZAAR 2022.03.26
 
 
샤프프로이데는 상반되는 뜻을 담은 두 독일어 단어 schaden(손실,고통)과 freude(환희,기쁨)의 합성어로 남의 불행이나 고통을 보면서 느끼는 기쁨을 일컫는다. 우리말로 하자면 '쌤통의 심리학'이랄까. 점차 강도를 더해가는 온라인판 마녀사냥을 보면서 이제 샤덴프로이데가 일종의 시대정신이 되었다는 공포를 느낀다. 심리학자에게 물었다. 대체 이 못된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장기하의 새 노래 ‘부럽지가 않어’의 화자는 끊임없이 누군가에 대한 부러움을 부정한다. 그러더니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그게 다 부러워서 그러는 거지 뭐. 부러우니까 자랑을 하고 자랑을 하니까 부러워지고…”
유명인 혹은 소위 셀럽에 대한 질시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다지만 그 양상은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과 함께 예전과 다른 차원으로 진화하는 듯하다. 과거에는 무대 뒷면에서 아는 사람들끼리 반쯤 비밀스럽게 공유하던 가십들이 이제 소셜미디어라는 사적이자 공적인 공간에서 역동적인 사회운동 취급을 받는다. 소셜미디어가 그렇듯 이 운동에도 모든 이용자들이 구경꾼이자 연기자로 참여한다. 최근 넷플릭스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전 세계적 유명세를 얻은 한 여성 유튜버가 ‘가품’ 의혹과 함께 비난 세례를 받았다. 그녀에 대한 비난에 참여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결코 범죄나 폭력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행동은 정당하고 공정한 세상을 만들기 위한 헌신이고, 이 세상에서 허위와 위선, 가식을 몰아내고 사회정의를 실현하려는 노력일 뿐이었다. 더 놀라운 건 그렇게 비난받은 셀럽의 팔로어 수가 여전히 많다는 사실이다. 싫으면 찾지 말고, 찾아다니면 좋아하는 것 아닌가. 결국 비난과 열망이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다는 거다. 왜들 이러는 걸까? 소셜미디어 때문일까? 신기술과 현대사회가 인간성을 망치고 있는 걸까? 어쩌면 인간의 본성이 그런지도 모른다.
 
프로이트(Freud)는 인간이 건전한 성인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세상의 규범을 내면화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봤다. 대개는 부모와의 동일시(identification)를 통해 이루어진다. 부모가 좋아하는 건 자기도 좋아하고, 부모가 옳다고 믿는 걸 자기도 옳다고 믿으며 기성세대의 가치관과 도덕율이 마음 깊이 심어진다는 거다. 그 결과가 초자아(super-ego)다. 그런데 이 동일시라는 게 따지고 보면 불쌍한 자기 위안이다. 내가 곧 부모니까 부모가 즐기는 것은 내가 즐기는 것과 마찬가지라니. 그냥 ‘정신 승리’ 아닌가. 인간은 현실적인 동물이라 웬만해서는 이런 착각에 빠지지 않는다. 특정한 조건에서만 이 비루한 논리에 의존해 만족을 추구한다.


첫 번째 조건은 불가능한 목표에 대한 강렬한 욕구다. 
유명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돌이켜보라. 3살짜리 아이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성적으로 차지하겠다는 욕구가 모든 일의 시작이다.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 욕구가 너무 강렬해 참을 수도 없다. 
 
두 번째 조건은 현실적인 위협과 그로 인한 불안이다. 예를 들어, 앞서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완성하는 건 거세불안이다. 욕심을 따라 아버지를 죽이려다 만약 실패하면 거세당하고 말 것이라는 (착각에 기초한) 불안 때문에 무의식 속의 자아는 급하게 타협안을 찾는다. “네가 곧 아버지이니 아버지가 어머니를 소유하고 있으면 네가 소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라는 타협안이다. 이렇게 동일시가 완성된다. 그렇다면 소셜미디어 속에도 이 두 요소가 있을까?
 
첫 번째 조건, 소셜미디어 속에서는 늘 하나의 강렬한 욕구가 불타오르고 있다. 전문 용어로 사회적인 영향력 발휘에의 욕구, 정보의 바다에 밈(meme)을 남기고자 하는 욕구, 혹은 자기를 중심으로 공동체를 확장하려는 욕구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 타인의 관심과 인정을 향한 욕구다. 미디어 이용자들이 틈날 때마다 열심히 자기표현을 하는 건 결국 이것 때문이다. 처음에는 얻기 쉬워 보인다. 누구든 미디어에 가입하기만 하면 유명인 혹은 셀럽과 DM을 주고받을 수 있으니 나도 곧 저렇게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곧 나와 그들 사이의 격차를 깨닫는다. 기술적으로는 같은 데이터를 사용하고 동등한 권리가 있다. 하지만 평등은 거기까지다. 
 
소셜미디어는 평등이 아니라 돈과 인기의 격차를 명백하게 드러내는 곳이다. 
 
누구는 수십억짜리 펜트하우스에서 이미 가진 것을 자랑하며 더 많은 돈을 벌고, 누구는 그저 방구석에서 작은 화면으로 그걸 구경할 뿐이다. 원래 바로 눈앞에 목표를 두고 겪는 좌절감이 제일 강렬하다. 나도 저렇게 살고 싶지만 그럴 수 없기에 더욱 그러고 싶다. 두 번째 조건인 위협도 충분하다. 소셜미디어 속에서 누구나 원하는 것이 타인의 관심이지만 그 속에는 어둠도 있다. 관심은 어떤 경우에는 호의적이고 어떤 경우에는 매우 가혹하다. 최악의 경우에는 신상 정보 다 까발려지고 전 국민 앞에서 망신당해 죽고 싶어질 수도 있다. 실로 무서운 위협이다.
 
욕망과 위협이 충족되었으니 동일시가 이루어진다. 그 대상은 누구일까? 우선 연예인이나 소위 셀럽들이다. 요컨대 미디어 이용자들은 셀럽의 삶을 마치 자기가 누리는 것처럼 여기며, 그들의 가치관이나 생활방식을 자기 것으로 내면화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들의 영상을 보는 순간만큼은 나도 그들과 같은 존재다. 동일시의 다른 대상은 바로 내가 생각하는 다른 이들의 생각, 소위 인터넷 여론이다. 미디어 속에서 습득한 모호한 이 동네의 규범, 도덕 말이다. 요컨대 소셜미디어 이용자들의 무의식 속에는 ‘온라인 초자아’가 만들어져 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초자아는 상상과 현실을 구별 못하는 ‘진성 꼰대’다. 온라인 초자아도 그렇다. 누군가의 행동만이 아니라 단순한 말실수, 막연한 상상이나 욕구까지도 단죄의 대상으로 삼는다. 
 
명인에 대한 '동일시’와 ‘온라인 여론을 전제한 앞뒤 없는 단죄.
 
최근 소셜미디어에서 발생한 사건은 결국 이 둘로 요약할 수 있다. 정리하면,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소셜미디어 속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이루어질 수 없는 열망과 그 사이에서 생기는 불안의 결과물이다.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도 행복할 수 없다. 행복하다 느끼는 건 잠깐의 허상이고 사실은 모두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해 속상하고 혹시라도 욕먹을까 불안할 뿐이다. 노래 ‘부럽지가 않어’ 속 화자는 질문한다. “나는 과연 네 덕분에 행복할까? 내가 더 많이 가져서 만족할까?” 우리도 머리를 맞대고 한번 생각을 해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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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에디터/ 손안나
    글/ 장근영(심리학자)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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