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로 갓 등단한 소설가가 쓴 '시작' 이야기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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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로 갓 등단한 소설가가 쓴 '시작' 이야기

읽고 쓰는 자들에게 신년이란 신춘문예의 때다. 신춘이라니. 누군가는 아직 바람이 차다고 말하겠지만 새 문인이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먼저 도래하는 봄인지도 모른다. 2022년 1월 1일 신춘문예로 등단한 임현석, 박민경 작가가 <바자>에 단편소설을 보내왔다. 이것은 시작에 관한 이야기이자 시작에 관한 이야기의 이야기이다.

BAZAAR BY BAZAAR 2022.02.09
 
카라쿰 사막의 싱크홀과 알바생 드로잉
독립출판물 만들기 원데이 클래스. 8명 정원인 모임이었다. 그날 가장 먼저 도착한 사람은 나였다. 원형 테이블 쪽에 마련된 빈자리에 앉았다. 차 드릴까요? 독립서점 주인은 물었다. 나는 물이면 된다고 하려다가, 탁자 위에 놓인 메뉴판을 보고 뭐라도 시켜야 한다는 걸 알았다. 디카페인 홍차로 하겠다고 했다. 그리곤 혼자 유독 일찍 도착했다는 게 머쓱해서 제풀에 말했다.
“눈이 와서 지하철을 탔는데 모임 시간보다 30분이나 일찍 도착했네요.”
“이럴 땐 택시를 타는 것보다 대중교통이 낫죠.” 서점 주인은 차를 우려내는 동안 내게 적당히 대꾸했다.
실은 회사에서부터 서둘렀다. 일을 모두 마치고 오후 6시가 되자마자 가방을 둘러멨다. 나는 원데이 클래스 모임에 참석하는 것 자체가 처음이었다. 낯선 기분에 약간은 긴장했는데, 그러면서도 동시에 꽤 많은 걸 모임에서 기대하고 있었다.
내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다. 몇 번은 친구들에게도 들려준 적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 심드렁해했다. 예전에 같은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동료를 좋아했고 그 아이의 어떤 점들은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는 내용이었는데, 그건 어떤 면에선 매우 흔한 종류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막상 상대방이 지루하다는 식으로 반응하면, 나는 좀 당황하곤 했다. 그럼 나는 정말이지 대수롭지 않다며, 다른 화제로 돌렸다. 내가 MBTI가 ‘인팁(INTP)’인데 종종 이렇게 심각해진대. 네 MBTI는 뭐지? 그건 내가 화제를 돌리는 방식이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건 중앙아시아 투르크메니스탄 카라쿰 사막에 있는 한 거대한 분화구 같은 것이다. 그곳에선 천연가스가 조금씩 누출되고 있어서, 싱크홀 안에 붙은 불이 수십 년째 꺼지지 않는다. 언제 꺼질지 알 수 없다.
모임 시간이 다가오자 사람들이 하나둘씩 도착하기 시작했다. 머리와 어깨에서 눈을 털면서 들어오는 사람들. 그 중 몇 명은 이런 모임이 익숙하다는 듯이 서점 주인과 친밀한 인사를 주고받았고, 자연스럽게 자리를 찾아 앉았다. 꽤나 근사한 코트를 입은 커플이 서점 안으로 들어오더니, 내 옆으로 다가온다. 나는 허둥지둥 의자 자리 간격을 조정한다.
지금 시작해볼까요. 강사는 서점 주인이었다. 그는 자신이 만든 독립출판물을 보여주었다. 해외의 풍경을 담은 사진집과 드로잉 일기 몇 권이었다. 모임 인원들은 그것을 서로 돌려보았다. 나는 한 권씩 넘겨받았고 책을 펼쳐본다. 그때 서점 주인은 말했다. “이제 우리 각자 뭘 쓰고 싶은지 말해보도록 하죠.”
순서는 시계 방향으로 돌아갔다. 스쿠버다이빙 여행기를 쓰겠다는 사람도, 석사 과정 때 지도교수를 욕하다가 연인이 된 대학원생 커플도, 우연히 집으로 들어온 고양이를 10년째 기르고 있는 프리랜서 디자이너도 있었다.
“제 이야기는 여러분들이 말씀하신 것과 비교하면 그렇게 흥미롭지는 못한데요” 이윽고 내 차례가 됐고, 그렇게 말문을 열었다. 이야기를 하는 중에 말이 길어진다고 문득 느꼈는데, 다행히도 사람들은 조용히 내게 귀 기울이고 있었다. 나는 조금 더 이야기를 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번엔 끝까지 끌고 갔다. “저로선 그 아이가 해준 말이 중요하다고 늘 생각해왔습니다.”
내가 말을 끝내자, 그들은 내 이야기에서 빠져나왔다. 서점 주인이 의견을 보탰다. 이미지가 선명한데 그림으로 그려보면 어떠냐고. 그러자 스킨스쿠버와 디자이너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걸 그려보겠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그 순간부터였다. 내게 일어났던 일들을 그림으로 그려본다면 어떤 장면을 책에 실어야 하는지 한 장면씩 구성해보기 시작했다.
그건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것과는 또 다른 새로운 형태의 이야기였고, 어떤 장면을 상상할 땐 그 안으로 깊숙하게 빠져들어갔다. 나는 아주 잠시 고요해졌다.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중이었다. 그건 편의점에서 그 아이를 처음 만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글/ 임현석(싸이월드의 시절, 일일 방문자 1~2명에 불과한 미니홈피에도 뭔가를 계속 끄적거리는 유형이었다. 202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 당선된 후 지인들에겐 “이전부터 계속 글을 써왔고 나는 줄곧 작가였어.”라고 고백했다.)


 
새로운 하루
가끔 그럴 때가 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뭔가 너무 푹 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 아무런 방해도 없이 몹시도 개운한 기분으로 눈을 뜰 때. 아직 알람도 안 울렸는데 이상하네. 설마 하는 마음에 손을 뻗어 핸드폰을 확인해보니 전원이 꺼져 있다. 충전기가 꽂혀 있는데도 먹통이었다. 설마 고장인가. 어제 밤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새벽 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핸드폰은 일할 의지를 아주 상실해버린 상태였다. 신이시여. 주원은 아직 남은 할부를 헤아리며 잽싸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방에 시계가 없어서 거실까지 달려 나가 시간을 확인해야 했다. 9시. 많은 디테일을 생략하면 겨우 지각은 면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대충 세수랑 양치만 하고 어제 입었던 옷을 그대로 입고 집을 나섰다.  
택시를 탈까 지하철을 탈까 고민하다가 결국 지하철을 탔다. 월요일 아침은 모험을 하기에 변수가 너무 많다. 게다가 회사는 지옥의 뱅뱅사거리를 지나야 한다. 강남으로 출근하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무렵에도 오늘과 비슷한 일이 있어서 택시를 탔던 적이 있었다. 그때 요금이 얼마가 나왔더라…. 요금도 요금이었지만 그 무력감이라니. 꼼짝없이 택시 안에 갇혀 무시무시한 강남의 교통체증과 기사 아저씨의 나지막한 짜증을 견뎌야 했던, 하지만 끝내 지각은 면치 못했던 악몽 같은 경험을 다시금 반복하고 싶진 않았다.
이맘때의 지하철은 늘 그렇듯 만원이었다. 주원은 습관적으로 핸드폰 액정을 만지작거렸다. 시간을 모르니 답답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핸드폰에 시선을 박고 있었다. 평소였다면 주원도 저 무리에 합류했을 것이다. 신년 기념 특가로 뜬 인터넷 영어 회화 수업을 결제한 게 불과 일주일 전이었다. 매일 1클래스 이상 100일간 수강 챌린지에 성공하면 일정 금액을 환급해준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오늘도 해야 하는데. 핸드폰 바로 고칠 수 있으려나? 일단 출근부터 하고 점심에 근처 수리점에 맡겨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주원은 옆에 선 남자가 보고 있는 유튜브 영상을 곁눈질로 훔쳐봤다. 마스크 위로 솟아오른 광대만 봐도 아주 재미있는 영상을 보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괜히 노선도를 확인하는 척하면서 슬쩍 옆으로 목을 빼고 화면을 힐끔거렸다. 요즘 유행하는 예능의 핫 클립이었다. 일반인들이라고는 하나 스펙은 전혀 일반적이지 않은 일반인들이 나오는 데이팅 리얼리티 쇼. 마침 새로 합류한 남자가 자기소개를 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진짜 인연을 찾고 싶습니다. 다른 참가자들의 박수가 이어졌다.
다행히 지각 3분 전에 아슬아슬하게 세이프했다. 주원은 자신의 목에 합격 목걸이를 걸어주는 상상을 했다. 김주원 씨, 우리랑 함께 갑쉬다. 그러믄요. 함께 가야죠. 당장 2개월 후면 연봉 협상 시즌이었다. 주원은 파티션 너머 팀장의 눈치를 살폈다. 주원은 그에게 아주 작은 꼬투리도 잡히고 싶지 않았다. 그나마 자리라도 등지고 있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주원은 빠르게 PC 카톡에 접속했다. 어제 12시쯤 잠들었으니 자그마치 10시간 만의 접속이었다. 그리웠다. 이 소속감. 이 유대감. 주원은 밀린 카톡을 정신없이 정독했다. 날이 춥다, 배고프다, 졸리다…. 원초적이고 시시콜콜한 대화들이 무더기로 쌓여 있었으나 놀랍게도 그 중 주원이 사라진 10시간에 대해 궁금해하는 톡은 하나도 없었다. 엊그제 싸운 뒤로 잠수를 탄 남자친구도 여전히 감감무소식이었다. 주원은 불현듯 방금까지 자신을 들뜨게 했던 유대감의 정체가 의심스러워졌다. 나, 사실은 그 어떤 것에도 연결되어 있지 않은 건 아닐까. 그냥 카톡창에서 1을 지우는 하나의 전자신호에 지나지 않은 건 아닐까. 주원은 문득 쓸쓸해졌고 그 탓인지 주변의 조도가 한층 낮아진 것을 느꼈다.  
점심시간에는 핸드폰 수리점을 찾아갔다.
메인 보드가 나갔을 수도 있어요. 확실한 건 저희도 열어봐야 알아요. 혹시 충전기 정품 안 쓰세요?
수리점 직원의 말끝이 묘하게 날카로웠다. 주원은 다급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집에서는 정품 쓰는데 회사에서는….
컴퓨터에 고속 충전 케이블을 연결해 썼다. 삼킨 말이 짐작 간다는 듯 직원이 차트에 뭔가를 빠르게 갈겨 썼다. 주원은 죄책감이 들었다. 그러면 안 되는 거였나?
단정할 순 없지만 그게 원인이 되기도 해요. 전력 입출력에 문제가 생길 수 있거든요. 내일이나 모레면 될 것 같은데 임대폰 대여해드릴까요?
임대폰은 언제 적 모델인지도 모를 구형 모델이었다. 주원은 혈압을 체크하듯 핸드폰을 쥐락펴락했다. 손에 꽉 차지 않는 그립갑이 낯설었다. 사무실로 복귀하는 길에 빵집에 들렀다. 먹고 싶었던 잠봉뵈르가 없어 크랩 샌드위치와 커피를 샀다. 오늘은 무엇 하나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복귀 시간에 늦지 않으려 꾸역꾸역 샌드위치를 먹는 동안 머릿속에서 자꾸만 진짜 인연을 찾고 싶다는 영상 속 남자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진짜 인연이라는 게 뭘까? 정품 충전기 같은 걸까? 안정적이고 딱 필요한 만큼 효율적인….
주원은 뭔가 중요한 걸 잊은 것 같은 답답한 기분이 들었으나 퇴근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 저녁을 먹을 때까지도 그 기분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그러다 오늘치 영어 회화를 공부하고 남자친구의 연락을 기다리는 동안 그런 기분을 느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었다. 아마 내일쯤이면 오늘 느꼈던 얄팍한 유대감으로 인한 씁쓸함과 반짝였던 깨달음조차 잊게 될 것이다. 바로 어제의 결심 따위는 얼마든지 번복해도 될 만큼 주원은 아주 젊었고 새로운 하루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주원은 잊지 않고 알람을 맞췄다. 오늘 해결되지 않은 생각들은 내일 해도 늦지 않았다.
 
글/ 박민경(가장 나다운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와중에 빗방울이 지고 눈이 내립니다. 땅이 젖은 후엔 무엇이든 피어난다는 믿음으로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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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에디터/ 손안나
    사진/ Getty Images
    사진/ 임효진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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