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Culture

요즘 가장 핫한 서체 둥켈산스체를 만든 함민주 디자이너

“글자의 모든 획을 누구보다 두껍게, 가능한 더 볼드(Bold)하게!” 함민주 독립 서체 디자이너의 둥켈산스체는 한글 서체 중에서도 단연, 독보적으로 ‘뚱뚱’하다. 존재감이 남다른 둥켈산스체는 출시 이후 3년 동안 ‘더 볼드한’ 한글 서체의 출시를 부추겼으며, 특히 서체 트렌트의 최전선에 있는 북커버 디자이너들에게 유난스러울 정도의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올 한 해에만 벌써 둥켈산스체가 북커버 디자인에 채택된 횟수는 10회가 넘는다.

BYBAZAAR2021.10.14

한글은 더 뚱뚱해질 수 있다

월북 〈디테일 사전-도시 편〉

월북 〈디테일 사전-도시 편〉

독일 베를린에 머물면서 독립 서체 디자이너로 활동한지 6년째예요. 그곳에서의 생활은 어떤가요? 
전반적으로 만족스러워요. 서체 디자이너라는 직업적인 배경으로나 개인의 성향과 도시의 궁합을 따져보아도 말이죠. ‘난 어느 도시에서 살아야 할까?’라는 생각을 자주 하는데, 현재로서는 이곳을 벗어날 생각이 없어요. 굉장히 많은 세계 곳곳의 서체 디자이너들이 이곳에 모여 산다는 점이 무엇보다 매력적이에요. 전 세계에서 뉴욕 다음으로, 어쩌면 그곳보다 더 많은 서체 디자이너가 모인 도시가 바로 베를린일 거예요. 비교적 저렴한 물가와 유럽 내 다른 도시로 이동하기 쉬운 지리적 이점, 서체 디자인과 관련된 국제 컨퍼런스나 커뮤니티의 활성화 등이 긍정적으로 작용한 것 같아요. 어쨌거나 저와 관심사가 같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다는 건 행운이에요. 게다가 여기서는 절대 저만 이방인이 아니에요. 10명이 모이면 독일인은 한두 명 정도이고, 나머지는 다른 나라 도시 출신의 이방인‘들’이죠.
독일에 정착하기 직전에 네덜란드 헤이그 왕립예술대학(KABK)에서 타입미디어 석사 과정을 수료했다죠. 
요즘은 한국도 독립 서체 디자이너가 느는 추세이지만, 당시에는 서체 디자이너라면 특정 회사에 소속되는 게 일반적이었어요. 저 또한 서울여대를 졸업한 뒤 대학원 진학과 회사 취업을 두고 고민했고, 결론적으로 취업을 택했었죠. 그렇게 6년가량 회사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늘 저만의 서체 디자인에 대한 갈증은 줄지 않았어요. 그래서 혼자 공모전에 지원하고, 서체 디자인과 영어를 공부하는 등 자기계발에 힘을 쏟았어요. 그러던 어느 날 대학 재학 당시 발견했던 정보가 떠올랐어요. 네덜란드 헤이그 왕립예술대학으로의 유학이 바로 그것이었죠. 퇴사 직후 네덜란드로 떠났고, 도착한 지 2주 만에 새 학기가 시작됐어요.
 
현암사 〈걸어간다, 우리가 멈추고 싶을 때까지〉

현암사 〈걸어간다, 우리가 멈추고 싶을 때까지〉

한글 서체를 만들려면 유학 이후 한국행을 택했을 법도 한데요. 왜 독일로 떠났나요? 
벌써 약 10년 전의 이야기인데요. 유학을 떠날 당시의 저는 그 시절 한국의 20대 후반 여성들이 흔히 할 법한 생각을 했었어요. ‘회사를 다니면서 돈을 이만큼 모았고, 그럼 이만큼만 나를 위해 쓰고, 나머지는 결혼할 때를 대비해 모아두자’라는 생각 말이에요. 한데 네덜란드에서 맞닥뜨린 자유롭고 인터내셔널한 환경과 인간관계가 저를 조금씩 바꾸더라고요. 이전까지는 ‘자기계발에 열심히 투자하는 나’ 자체에 만족했고 “결혼해서 애 낳으면 인생 끝”이라는 식의 말들을 자연스레 받아들였다면, ‘그게 전부는 아니다’라는 생각을 조금씩 해보게 된 거죠. 그렇다면 ‘일단, 유럽에서 일 년만 더’라는 생각으로 독일로 떠났어요.
현재는 기업 소속이 아닌 독립 서체 디자이너로 활동 중인데요. 팬데믹의 장기화가 끼친 부정적인 영향은 없었나요? 
다행히 영향은 적었어요. 2018년 9월에 제 첫 리테일 한글 서체인 ‘둥켈산스’를 선보였는데요. 초반에는 사람들의 관심이 미미했는데, 점진적으로 인기가 커지더라고요. 둥켈산스체는 특히 북커버 디자인에 자주 쓰이고 있죠. 그런 관심 덕분에 ‘타이포잔치 2019: 국제 타이포그래피 비엔날레’의 큐레이터로 선정됐고, 그 외 다양한 경로로 프로젝트 의뢰를 받고 있어요.
둥켈산스체는 올 한 해에만 벌써 10여 권의 책 표지에 사용됐어요. 한국에서 특정 독립 디자이너의 서체가 북커버에 자주 사용된 사례 자체가 희귀한데 말이죠. 
맞아요. 얼마 전 모 매체의 기자님도 그러시더라고요. 서점에 갈 때마다 둥켈산스체를 본다고요. 저도 얼른 한국의 서점에서 그 광경을 보고 싶어요.
 
민음사 〈젊은 ADHD의 슬픔〉

민음사 〈젊은 ADHD의 슬픔〉

북커버에 둥켈산스체가 자주 쓰이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봤나요? 
한국에서는 의아하게도 북커버뿐만 아니라 큰 포스터를 만들 때도 본문용 명조체를 비롯한 소위 ‘얇은’ 서체를 쓰는 게 굉장히 흔한데요. 그렇다 보니 볼드하고 굵직한 인상의 둥켈산스체가 그래픽 디자이너들에게 신선하게 보인 것 같아요. 한글 서체의 다양성에 대해 고민하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고요. 동시에 최종 단계에서 서체를 결정하는 분들의 보수적인 기준도 조금씩 느슨해지고 있음을 느껴요.
다른 한글 서체 디자이너들에게도 적잖이 영향을 미치는 듯해요. 
주변에서 그런 얘기들을 종종 전해주세요. 학생들의 작업물이나 그 외 경로를 통해 한글 서체의 트렌드를 살펴보면 둥켈산스체 같은 뚱뚱한 서체들이 많아지고, 쓰임도 다양해지는 것 같다고요. 이런 이야기는 언제나 듣기 좋은 것 같아요.
굵직한 한글 서체의 부재에 대한 아쉬움으로 둥켈산스체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을까요? 
북커버나 포스터를 디자인할 때 얇은 서체를 키우는 게 아니라, 애초에 굵직한 서체를 사용하면 더 멋지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자주 했거든요. 라틴에 비해 한글 제목용의 굵직한 서체가 실제로 다양하지 못한 점도 불만스러웠고요. 볼드한 스타일로 분류되는 몇몇 한글 서체도, 제 기준으로 바라보면 그리 두껍지 않죠. 저는 A4 용지 기준으로 9자 정도를 채운다고 가정했을 때 뭔가 그림처럼 꽉 차는 느낌이 들어야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제목에 쓰일 굵고 강한 슈퍼 블랙을 콘셉트로 둥켈산스체를 만들었어요.
 
작가정신 〈인간만세〉

작가정신 〈인간만세〉

둥켈산스체는 여성의 ‘보이스’를 강조하려는 서적에 특히 자주 사용됐어요. 정확히는 여성의 강인함을 어필하고자 하는 서적에 둥켈산스체가 빈번히 채택됐죠. 이 사실을 인지하고 있나요? 
제 서체가 어디에서 어떤 용도로 쓰였는지 일일이 알 수는 없어요. 마트로 유통된 제품이 익명의 누군가에게 선택을 받는 것과 같죠. 특별한 계기로 그 사실을 분명히 인지한 적이 있긴 해요. 어느 날  〈우먼 디자인〉(민음사, 리비 셀러스 저, 신소희 역)의 출판 담당자가 연락을 해왔어요. “디자인 산업에서의 여성들의 이야기와 업적을 묶은 책을 준비 중인데, 둥켈산스체 소개와 더불어 책 표지와 각 장의 제목에 둥켈산스체를 사용해도 되느냐”는 내용이었죠. 당연히 승낙했고, 이는 매우 좋은 경험으로 남아 있어요.
해당 서적 외의 다수의 사례들은 우연의 집합이었군요. 다만 그런 생각은 들어요. 둥켈산스체의 굵직한 모양새에서 비롯된 강인한 느낌이 공급과 수요의 측면에서 한국의 페미니즘 서적들과 필연적으로 통한 것 같다고요. 
대화를 이어가면서 저의 아이덴티티 중 일부가 서체에 반영됐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드네요. 불의를 못 참고 할 말은 꼭 하는 성격이거든요.(웃음) 실제로도 폰트를 만들 때 힘차고 강인한 느낌을 의도했고, 그런 점에서 서체가 페미니즘 서적 담당자들의 눈에 들었을 수 있죠. 다만 ‘둥켈산스체=페미’와 같이 폰트의 성격이 좁혀지지는 않았으면 해요.
 
민음사 〈지렁이 울음소리〉

민음사 〈지렁이 울음소리〉

둥켈산스체를 보면 수십 년 전 한국의 영화 홍보물이나 정치 선전물, 간판 디자인이 떠오르기도 해요. 그렇다 보니 한국에서 최근 몇 년 메가 트렌드로 부상한 ‘레트로’를 의식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봤어요. 
1948년에 개봉한 영화 〈Hamlet〉의 한글 포스터 〈함〉에서 영감을 얻은 것은 사실이에요. 누군가 손으로 그렸을 제목 글씨가 인상적이었죠. 한데 그게 문제였어요. 서체를 만드는 동안 레트로가 유행하기 시작하더라고요. 동시에 여러 기업에서 레트로 서체를 출시하기 시작했고, 독립 디자이너인 저까지 거기에 끼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함께 일하는 독일인 파트너에게 작업물을 보여준 뒤 의견을 구했죠. 친구가 그러더라고요. “레트로 폰트를 원해? 그게 아니라면 조금 다른 점을 만들면 어떨까?”라고요. 그 말을 듣고 더 신선한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조금 더 굵게, 더 두껍게 그려보게 됐어요.
닷페이스 ‘온라인 퀴어퍼레이드 2021: 우리는 어디서든 길을 열지’와 세종문화회관 ‘2021 세종시즌: 만나요’의 주요 홍보물에는 ‘블레이즈페이스’ 서체가 쓰였어요. 이 서체도 둥켈산스체와 마찬가지로 뚱뚱한 한글 서체로서 이목을 끌고요. 
블레이즈페이스는 기존에 라틴으로만 운영되던 서체예요. 원작자의 허락을 받고 한글 버전으로 작업했죠. 무엇보다 특별한 점은 퓨처폰트(Future Fonts)라는 플랫폼에서 지속적으로 발전해나가는 서체를 발표한 것인데요. 해당 플랫폼을 통해 1차 버전을 출시한 뒤 꾸준히 서체를 업데이트하고 있어요. 서체를 판매하는 방법도, 구매 방식도 새롭게 시도해본 거죠. 향후 둥켈산스체도 작은 크기로 작업했을 때의 가독성을 끌어올릴 수 있는 형태로도 업데이트할 예정이에요.
 
민음사 〈여성, 정치를 하다〉

민음사 〈여성, 정치를 하다〉

두 서체의 닮은 점과 차이점을 직접 꼽는다면? 
생김새를 보자면 다른 한글 서체들과 섞어두었을 때 둥켈산스체와 블레이즈페이스 모두 확 튀는 점이 닮았어요. 일단 뚱뚱하잖아요. 다른 점을 조금 재미있게 말해보자면, 둥켈산스체는 한국의 옛날 포스터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어진 만큼 ‘신토불이’ 같은 키워드가 잘 붙는 것 같고요. 블레이즈페이스는 외국의 라틴 서체가 배경이 된 만큼 소위 ‘교포’ 같은 인상을 지닌 듯해요.(웃음)
독립 서체 디자이너로서 다양한 시도를 즐기시는 듯한데요. 앞으로 또 어떤 작업을 준비 중인가요? 
라틴 서체를 만드는 파트너와 ‘하이퍼타입’이라는 팀을 결성했고, 웹사이트를 만들고 있어요. 올해 중 웹사이트를 정식 오픈하는 게 소소한 목표죠. 숍 기능을 더하려다 보니 작업이 순탄치만은 않네요. 그곳에서 사람들이 서체에 대한 정보를 얻을 뿐만 아니라 서체로 디자인한 상품을 바로 구매까지 할 수 있었으면 하고 바라죠. 서체 디자이너의 장점 중의 하나가 제 서체로 무엇이든 만들어서 팔 수 있다는 점인데요. 이를 통해 수입이 불안정한 직업적인 한계를 조금이라도 부수면 좋겠어요. 아주 먼 미래를 내다보자면, 할머니가 되어서도 글자를 만들고 싶어요. 글자와 노는 게 제일 재미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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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글/ 김수정(프리랜서)
  • 에디터/ 손안나
  • 웹디자이너/ 민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