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Culture

비디오 아트의 거장 빌 비올라

그의 느릿한 카메라는 고독의 순간을 제시함으로써 보는 이를 격려하는 힘을 발휘한다.

BYBAZAAR2020.12.17
 
 

나의 감정을 이해하는 슬픔 

 
빌 비올라(b. 1951), 〈The Quintet of the Astonished(놀라움의 5중주)〉, 2000, 비디오 설치, 컬러 비디오 리어 프로젝션, 140x240cm, 15분 20초. 연기자: John Malpede, Weba Garretson, Tom Fitzpatrick, John Fleck, Dan Gerrity

빌 비올라(b. 1951), 〈The Quintet of the Astonished(놀라움의 5중주)〉, 2000, 비디오 설치, 컬러 비디오 리어 프로젝션, 140x240cm, 15분 20초. 연기자: John Malpede, Weba Garretson, Tom Fitzpatrick, John Fleck, Dan Gerrity

 
누구나 이런 경험은 있을 것이다. 우연히 지인을 만나 대화를 나눈다. 그때, 나는 모르지만 상대는 아는 제3자가 나타나는 바람에 말이 끊긴다. 반가움으로 부산 떠는 그들 사이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절대 끼어들 수 없는 근황 체크가 끝날 때를 기다리는 것뿐이다. 만약 그 순간 머쓱하거나, 민망하거나, 난감함을 느낀다면, 내가 어떠한 관계로부터 철저히 소외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상황은 중개 및 소개의 형식적인 절차를 거쳐 대부분 자연스레 해결된다. 단지 통성명하고 인사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제외되어 있던 어떤 세계 안으로 돌연 발을 들이기 직전까지 그 찰나의 순간, 완벽한 이방인인 ‘나의 상태’는 과연 어떨까? 아마 어찌할 바 모르겠다는 애매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피고, 땅바닥을 응시하다, 하늘을 슬쩍 올려다보며 그 순간을 견딜 것이다. 문제는 고작 몇 초 만에 인간의 감정이 총천연색 해상도로 요동친다는 것보다 이런 감정의 움직임을 정작 나 자신은 인식조차 못한 채 지나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은 비디오 아트의 거장, 빌 비올라(Bill Viola)의 작품 〈인사〉(1995)에서 완벽하게 펼쳐진다. 작가는 자신의 인장과도 같은 슬로모션 기법으로 본래 45초 남짓인 만남이라는 사건을 10분으로 늘임으로써, 감정을 포착하고 연장한다. 카메라가 재창조한 13배의 시간적 간극은 바람에 흔들리는 시폰 치맛자락만큼이나 드라마틱하게 감정과 무의식적 제스처의 정체를 대면하게끔 하는 장치로 작용한다. 그렇게 느릿한 시선으로 발견되는 감정의 파노라마는 관객의 사유를 물리적 영역(지금, 여기, 전시장)에서 심리적 영역(자아와 타인)으로 부지불식간에 순간이동시킨다. 작가는 자코포 다 폰토르모의 종교화 〈방문〉(1528~29)에 영감받아 〈인사〉를 만들었다. 그리고 성모마리아와 성 엘리자베스가 서로 인사 나누는 장면을 묘사한 신성한 원작을 인간적인 상황으로 대치함으로써 신과 인간이 구분되는 지점, 즉 휴머니티의 본질이 바로 감정임을 강조한다.
 
인간의 감정을 보다 직접적으로 탐색하는 〈아니마〉(2000)와 〈놀라움의 5중주〉(2000)는 빌 비올라식 ‘파토스의 초상’이다. 〈놀라움의 5중주〉는 네 남자와 한 여자의 표정을 통해 기쁨, 슬픔, 분노, 두려움 혹은 모든 것을 아우르는 감정의 매 순간들을 펼쳐놓고, 보는 이들로 하여금 독립적이면서도 압도적인 감정 흐름의 이면을 상상하게 만든다. 작품 속 인물의 표정 변화는 언뜻 알아차리기 어려울 정도로 천천히 진행된다. 그러나 일견 정지한 듯한 표정에서는 숨결이 느껴지고, 어느덧 미묘하게 누그러지거나 미세하게 고양되는 상태를 목격할 수 있다. 빌 비올라의 작품은 “비디오와 회화의 고유한 특성을 공히 모호하게 만들어버린다”는 혐의를 받기도 했는데, 특히 액자 형태의 작업 〈아니마〉는 오히려 이를 작정한 듯 보인다. 그러나 더 중요한 건 내가 어떤 영상이나 회화 작품보다도 이 작품들 앞에서 오래 머물렀다는 사실이다. 누군가의 감정의 면면을, 이토록 순수하게 발현하는 순간을, 사연과 내러티브를 걷어낸 상태로 이렇게 유심히 들여다본 적이 있었나 싶다.
 
1970년대 당시 빌 비올라가 비디오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을 때는 아무도 이 기계가 예술적 매체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인정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빌 비올라는 비디오카메라로 자기 자신과 세상의 이면을 정직하게 응시하는 것으로 기나긴 작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슬로모션이 예컨대 렌티큘러만큼이나 한물간 기술 취급을 받는 최근까지도 이를 주요 화법으로 삼음으로써 오히려 시대를 초월하는 면모를 보인다. 게다가 그가 어떤 시대에서도 미래지향적이지 않은 적 없었던 영상을 활용해 다루어온 건 다름 아닌 인간의 탄생과 죽음, 존재와 무의식, 영적 상태와 깨달음의 순간 같은, 지나치게 거대하고 웅장하여 예술로 다루기엔 진부하다 취급 받는 개념들이었다. 그는 자신의 스승인 백남준 같은 기계를 애정한 당대의 예술가들과는 달리 시대정신 혹은 예술 자체가 아니라 ‘내면의 삶(inner life)’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다. 아이러니하게도, 모두가 다 알거나 궁금해하는 진실인 인간과 삶을 고찰함으로써 그 혁신성과 전위성을 획득할 수 있었던 셈이다.
 
빌 비올라는 지난 40여 년간 세 가지의 형이상학적 질문과 힘겹게 싸워왔습니다. 나는 무엇인가, 나는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큐레이터 제롬 뇌르트는 지난 2015년 국제갤러리 도록 글에 이렇게 썼다. ‘카메라를 든 구도자’의 명상적인 작업은 이 문장의 출처이기도 한 이슬람 수피즘뿐 아니라 기독교, 선불교 등 작가 스스로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다양한 종교와 그러한 상태를 상기시킨다.(실제 빌 비올라는 세인트 폴 대성당이나 피렌체 전역에서 과거 거장들의 작업과 자기 작품을 나란히 선보이는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더욱이 어머니와 아버지의 죽음 등의 개인사는 그로 하여금 신의 손을 놓지 않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들여다보게 만들었다. 가까운 이를 보낸 후의 무력감을 떨쳐낼 수 있는 방법은 죽음을 이해하고 납득하는 것뿐이었고, 자연히 그의 카메라는 죽음과 등을 맞대고 있는 삶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엘제리드호(빛과 열의 초상)〉(1979)에서 빌 비올라의 카메라는 튀니지 사하라 사막의 신기루를 담아낸다. 세상에서 가장 마른 땅의 뜨거운 빛과 열이 만들어내는 현상이 일종의 특수효과가 되어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흐린다. 물속으로 뛰어드는 한 남자를 통해 수중세계의 우주적 신비로움을 담은 다섯 개의 스크린 작업 〈밀레니엄의 다섯 천사〉(2001)는 ‘무한한 우주와 유한한 육체가 합쳐지는 경계’를 능가하는 숭고함을 담아낸다. 그러나 그의 작업이 어떤 풍경이나 광경의 직관적인 아름다움이나 경이로움에 국한된 적은 없었다. 사막이든, 물속이든, 어디든 그곳을 한참 들여다보다 보면 막막하지만 아늑하고, 숨이 막히기도 하지만 포근하다. 지금 내 앞의 이미지는 사막 혹은 수면 아래의 절대적인 풍경이라기보다는 나의 마음, 나의 정신, 나의 감정이 만들어내는 정신적 풍경인 셈이다. 그의 작업에 물이 ‘정화’의 상징처럼 표현되는 이유도, 6살 때 익사할 뻔한 경험에 대한 작가의 기억 익사 그리고 그 와중에도 눈앞에 펼쳐진 신묘한 순간에 매료되었기 때문일 텐데, 생각해보면 이런 모순적인 양가성이야말로 삶의 필수전제조건이다.
 
오랜만에 국내에서 만나는 개인전 «조우»(부산시립미술관, 2021년 4월 4일까지)에서도 마찬가지지만, 빌 비올라의 작업은 늘 관객이 이미지와 감정에 몰두할 수 있는 진공의 시공간을 창조해내는 데 최선을 다하는 것 같다. 시간을 자유자재로 조각해내는 그의 작품 앞에서는 당연하게도 다른 속도의 시간이 나를 지배한다. 덕분에 물에 풍덩 몸을 던지는 예의 그 작품 속 남자처럼, 작가의 미학적 세계에 온전히 젖어들게 된다. 그렇게 빌 비올라의 정신적 여정에 동행하다 보면, 그를 이끌어온 ‘예술가의 역할’에 가닿는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작가로서 우리가 전해야 할 메시지는 어떠한 목적을 달성하고 쟁취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 새로운 통로(path)를 밝히는 데 있습니다. 무언가를 증명하거나 시사하는 것이 아닌, 무언가로 살아가고 그것이 되어가는 과정이 더욱 중요합니다. (‘Reasons for Knocking at an Empty House. Writings 1973-1994’ 中)
빌 비올라의 심오한 작업이 미술비평 세계와는 별개로, 대중 관객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건, 그의 작업이 무언가로 살아가고 그것이 되고자 원하는 현대인에게 통로의 절실함을 새삼 일깨웠기 때문이다.
 
물론 나의 또 한편의 현실은, ‘새로운 통로’를 모색하는 데 있어 빌 비올라의 예술만큼이나 수전 밀러의 별자리 점괘가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전갈자리의 11월 운세를 이렇게 점쳤다. “당신이 무엇을 할 때 행복한지 생각해 보고, 그걸 하세요. 행운이 따를 겁니다.” 차라리 곧 큰돈이 나갈 예정이니 대비하라 충고했다면 바로 적금을 부었겠지만, 행복이라니. 고민에 빠졌다. 며칠이 지난 지금도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여전히 오리무중이니, 이것이 나라는 인간의 무수한 결핍 중 본질이기도 하겠다. 굳이 변명하자면, 나는 누구나처럼, 꽤 오랫동안, 어떤 감정이 생겨날 때마다 언어화 혹은 구체화하지 못한 채 그냥 지나치며 살았다. 기쁨과 환희 같은 긍정적인 감정은 즉각 수용해버리고, 슬픔이나 분노 등 부정적인 감정은 처리하거나 해결하거나 이도저도 안 되면 삭제했다. 바쁜 삶이란 늘 다음 단계로 신속히 넘어가야 하는 실용성을 담보해야 했고, 이것이 좋은 감정이든 나쁜 감정이든 어떠한 감정의 상태에 지긋이 머무를 자유를 스스로에게서 박탈하는 것이었음을, 타인들의 다양한 감정을 적나라하게 대면하고서 다시금 깨닫는다.
 
빌 비올라의 〈관찰〉(2002)에는 타인의 슬픔을 대면하는 인간의 슬픔이 담겨 있다. 그러나 타인의 감정을 이해해야 한다는 의무감만큼이나 나의 감정에 기꺼이 나의 시간을 내어주는 책임감이 절실할지도 모르겠다. 연민과 공감으로 출발한 빌 비올라 작업의 예술성은 결국 스스로의 상태를 대면하는 가장 고독하고도 슬픈 순간을 제시함으로써 나라는 인간 안에서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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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에디터/ 손안나
  • 글/ 윤혜정(국제갤러리 디렉터)
  • 사진/ 부산시립미술관 제공
  • 웹디자이너/ 김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