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지가 알려줬지, ‘난 달라’라고
서태지는 내 학창 시절의 정신적 지주였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데뷔한 1992년에 나는 중학생이었는데 랩을 하며 춤추는 것 자체가 신선한 충격이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반 친구들 전체가 그랬다. 그러면서 일종의 소속감을 느낀 것 같다. 우리라는 집단으로 묶이는 세대 의식 같은 게 생겼다고 할까? 학창 시절을 광주에서 보냈는데 당시만 해도 서울에서 유행하는 게 지방까지 내려오는 데엔 시간이 좀 걸렸다. 그래서 4집
‐ 김수향(향기 전문 브랜드 ‘수향’ 대표, 1979년생)
레코드숍을 유영하던 미래의 작사가는
중·고등학교 시절 방과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면 압구정동에 있는 단골 레코드숍 ‘환타지아’에 들르곤 했다. 인터넷이나 SNS가 없던 시절이라 음악에 관한 소식을 가장 빠르게 접할 수 있는 곳은 동네마다 자리한 작은 레코드숍이었다. 아무래도 단골 손님의 취향을 잘 아는 사장님이 새로운 음반을 추천하기도 하고, 정식으로 수입되지 않은 앨범을 들어보라며 테이프에 녹음해주기도 했다. 일종의 ‘디깅’이 가능했던 거지. 그렇게 보물찾기하듯이 음악을 듣다 보니 취향에 맞지 않다고 여겨지는 음악을 듣는 경우도 생기지만 정서적으로 풍부한 경험이 가능했던 것 같다. 게다가 90년대는 <가요톱텐>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이 태진아나 송대관과 1위 경쟁을 벌이거나 김종환과 H.O.T.가 1위 후보에 나란히 오르던 시대였다. 요즘처럼 채널이나 플랫폼에 따라 뮤지션의 세대가 구획화되진 않았다. 내 음악 취향이 잡식성인 건 아무래도 그 시절의 영향 덕분인 듯하다. 그런데 서태지의 ‘교실이데아’가 나왔을 때 처음으로 가사에 공감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90년대 대중가요 가사는 아무래도 어른들의 이야기처럼 들려서 10대 입장에서는 가사의 공감대보단 그냥 음을 즐기는 재미로 들었던 것 같은데, ‘교실이데아’는 처음으로 내 얘기를 하는 노래라고 느꼈다. 덕분에 진정한 문화소비자로 대접받는 기분이었고, 동시대 문화의 주인공이라고 느끼게 됐다. 흥미로운 게 요즘 음악계에서는 40대가 소비의 주체라는 얘기가 적지 않게 나온다. 강다니엘 팬 중에 40대가 많다는 얘기도 있고. 좀 의아하지만 알고 보면 그 40대 대부분이 90년대에 X세대라 불리던 세대일 거다. 10대나 20대 때 취향을 적극적으로 소비했던 세대가 나이가 들어서 다시 그런 관성을 찾아간 것 같다. 생각해보면 90년대는 즐겁게 노는 게 죄악처럼 느껴지지 않는 시절이었다. 다른 사람 눈치를 살피지 않는 게 멋이었고, 내 취향에 대한 떳떳함이 있었다고 할까? 그런 시대에 태어난 음악들도 그만큼 자유롭게 낭만을 노래한 것 같고. 돌이켜보면 그만큼 소비지향적인 시대였다는 것도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90년대 대중가요 중에는 무분별한 소비를 비판하거나 풍요롭기만 한 세태를 풍자하는 가사들이 꽤 있었는데, 아마 그 당시 우리 사회가 물질적인 풍요를 더 폭넓게 누린다고 느꼈기 때문에 그런 가사도 나올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물론 IMF 이후로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지만, 요즘처럼 위로가 절실한 시대는 아니었다. 확실히 그런 낭만이 있었다. X세대라 불렸던 그 시절에는.
‐ 김이나(작사가, 1979년생)
듀스를 사랑한 VJ, 방탄소년단 다큐를 만들다
중학생 시절에는 서태지와 아이들 앨범이 발매된다 하면 학교를 ‘땡땡이치고’ 나와서 레코드점으로 달려가 테이프를 사기 위해 줄을 섰다. 지금은 콘서트 티켓을 온라인으로 구매하지만 그때는 은행에서 팔았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열렸던 솔리드 콘서트 티켓도 지금은 사라진 제일은행에서 샀던 것으로 기억한다. 90년대 초반 조기유학 열풍이 불면서 유학생이 많아졌는데 10대 때부터 외국에서 보고 접한 것이 많아진 만큼 패션에 대한 관심도 새로워졌던 것 같다. 압구정 같은 길거리에서 일반인의 스트리트 패션을 소개하고 구매처까지 알려주는 <마담 피가로>의 기사를 즐겨 보는 사람도 많았다. 힙합바지가 유행했는데 다리 폭만 28인치였던 ‘징코’ 바지가 큰 인기였고, 그거 입으면 정말 바닥을 다 쓸고 다녔다. 힙합바지에는 닥터 마틴이나 팀버랜드 워커처럼 큰 신발을 신어야 했는데, 그게 아니면 ‘짝퉁’이라도 신어야 했다. 유학 시절 방학에는 다시 한국에 들어와 낮에는 학원에 다니고, 밤에는 친구들과 나이트에 다녔다. 사실 당시 강남 나이트에 셋 중 하나는 고등학생이었는데 나는 노래와 춤이 좋아서 자연스레 나이트를 좋아했다. 가장 유행하는 노래와 춤은 나이트에서 듣고 볼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요즘 클럽 다니는 친구들은 희한하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당시 강남 일대의 나이트는 12시면 문을 닫았다. 그래서 더 놀 사람은 새벽 2~3시까지 영업하는 이태원으로 넘어가기도 했고. 90년대 노래방은 요즘 코인노래방처럼 500원짜리 동전을 넣어서 한 곡씩 부를 수 있었는데 노래방 화면에는 대부분 채널V나 MTV가 나왔다. 1995년쯤 국내에서도 케이블방송이 시작되면서 요즘 유튜브처럼 젊은 층을 겨냥한 다양한 콘텐츠가 나왔다. 특히 엠넷과 지금은 사라진 KMTV 같은 음악 전문 채널도 등장했고, 전화로 지원해서 장기자랑을 하는 프로그램도 인기였다. 그 당시 나는 미국 유학 중에 VJ라는 직업을 알게 돼서 관심을 갖고 있던 차에 한국 채널에서 시청자 투표로 VJ를 뽑는 경연 프로그램이 기획됐다는 걸 듣고 기회다 싶어 참여했다가 1등으로 뽑혀서 VJ 활동을 시작했다. 나중에는 리포터 일도 하고, 코디네이터 업무를 비롯해 다양한 기획 연출 업무까지 하면서 자연스럽게 방송계에 있게 됐다. 최근 2년 동안은 유튜브 오리지널에서 제작한 방탄소년단, 지드래곤, 박재범과 같은 뮤지션 다큐멘터리를 비롯한 자체 콘텐츠 제작을 총괄 지휘하는 일을 했다. 사실 나는 듀스나 솔리드를 너무 좋아해서 팝컬처의 중심에 들어오고 싶었고, 마음껏 즐기다 보니 결국 원하던 일을 하게 됐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성덕’일지도?
‐ 조석준(크리에이티브 디렉터, 1978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