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엽다’는 말, 오늘 촬영장의 금지어였죠. 그런데 진지하고 멋진 가운데 순간순간 귀여운 모습들이 튀어나오긴 해요.
제 스타일리스트가 그런 걸 좋아하나 봐요. 저를 통해서 계속 자신만의 도전을 하는 걸 보면. 그런데 제가 잘 못 받아 먹는 것 같아요.
패션에 별 관심이 없다죠?
관심이 없다기보다는 관심이 적은 겁니다.(웃음) 잘 모르니까 그들의 대화에 끼지 못하고 겉돌 뿐이죠. ‘인싸’는 아니에요. ‘인싸’가 되고 싶은 ‘아싸’랄까요. 노력은 하고 싶으나 마음처럼 쉽진 않은 수준이죠.
패션이라는 단어가 나오니까 굉장히 쑥스러워 하네요.
(웃음) 제 말이 점점 짧아졌나요?
2년 전 인터뷰에서 “오늘 인터뷰를 하고 나서 내가 소통이 부족했다는 걸 새삼 느꼈다”고 얘기했는데, 요즘은 어떤가요? 그
날 제가 어떤 옷을 입고 있었는지도 기억나요. <내성적인 보스>라는 작품 자체가 소통과 관계에 관한 작품이라 더 그런 주제에 파고들었던 것 같아요. 특히나 극중 인물에 나 자신을 많이 대입해서 생각했던 작품이라 끝나고 나서는 마음이 허해진 느낌도 들었어요. 그런 걷잡을 수 없는 기분 때문에 이후에 쉬지 않고 작품을 했고요.
<7일의 왕비> <이판사판> <프리스트>까지 연이어 세 편을 달렸죠.
내 공허한 마음을 달래줄 길은 내 일을 계속하는 거구나 생각했거든요. 그게 나를 지켜봐주는 팬들에게 내가 할수 있는 소통이라고도 생각했고요. 마음 가는 대로 하다가 여기까지 온 것 같아요. 때론 어떤 문제를 깊게 생각하는 것보다 그냥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는 게 나은 것 같아요. 시간이 지나보면 그게 다 살아갈 힘이더라고요.
새 드라마 <너의 노래를 들려줘>에서 피아니스트 역할을 맡았어요. 연주 연습은 잘 돼가나요?
지금 쇼팽의 ‘녹턴’을 한창 연습하고 있어요. 어렸을 때 피아노 학원에 조금 다녀본 정도라 사실 악보 보는 법부터 하나하나 새롭게 배워가고 있어요. 요즘 클래식의 멋을 알아가고 있는 중이에요. 사실 음악에 대한 갈증이 있었거든요. 예전만큼 음악을 많이 듣진 못하니까요. 요즘엔 확실히 제 몸의 리듬이 좋아지는 걸 느껴요. 연기에서도 일상에서도요.
친동생이 작곡가라죠. 이번 역할을 준비하면서 도움받은 부분도 있을 것 같아요.
동생이 저 연습하라고 집에 피아노 건반을 갖다 놓았어요. 굉장히 고맙죠. 덕분에 집에서도 습관적으로 10분씩이라도 연습하려고 해요. 성격적으론, 제가 투박한 스타일이고 동생은 굉장히 세심하고 우아해요. 감정 이입도 잘하고요. 나랑 참 다르다고 느낄 때가 있죠. 제가 지금 좋은 쪽으로 얘기하고 있는 거 맞나요? (웃음)
그럼요.
동생은 저보다 감수성이 훨씬 뛰어나요. 그래서 유해 보이기도 하고요. 아무튼 동생에게 많은 도움을 받고 있어요. 동생을 디스하는 건 아닙니다.
이번 드라마, 미스터리가 가미된 로코물이라죠. 원조 로코 장인이잖아요. 어떤 배우들은 로코가 액션이나 스릴러 같은 다른 장르에 비해 훨씬 어렵다고 고충을 토로하던데요.
오버와 절제 속에서 선을 잘 타야 하니까요.
연우진의 로코를 보면서 한 번도 과하다고 느낀 적은 없거든요. 오히려 어쩜 저렇게 능청스러울까 감탄한 적은 있죠.
잘 못해요. 어렵고, 힘들고. 그냥 제가 그 때 느끼는 것들만 잘 표현하자는 주의예요. 모르는 건 어떻게 할 수가 없더라고요. 예전에는 그런 걸 연기로 꾸미려고 했는데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요. 그러다 보면 제 바닥만 보이고 스스로 자괴감이 들고요. 그냥 내가 알고 있는 선까지만 진실되고 솔직하게 표현을 하는 게 저만의 철학이에요. 예전에 로코를 할 땐 제 스스로도 신이 나 있고 오감이 다 깨어 있던 것 같아요. 아이디어도 막 솟구치고. 자유분방하게 뛰어놀면서도 날이 선 감각들이 있었는데. 사실 요즘은 저 자신이 ‘로맨틱코미디’랑은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왜요?
기본적으로 제가 밝고 재밌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오히려 지금이 더 나답게 살고 있는 거죠. 데뷔 초엔 이것저것 다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잖아요. 거기서 벗어난 것 같아요. 어떻게 저런 열정이 있었지? 어떻게 저런 아이디어를 떠올렸지? 돌이켜보면 신기해요. 시간이 지나면 내가 더 발전하고 더 깨어나고 더 표현력이 좋아지고 그럴 줄 알았거든요? 그것도 아닌 것 같아요.
일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해봄직한 고민이네요. 대신 일과 일상의 균형이랄지 나다운 것에 대해선 더 잘 이해하게 됐잖아요?
맞아요. 오히려 그런 점은 있죠.
아까 원조 로코 장인이라 표현했지만 사실은 그 작품들 사이에 사극, 호러, 저예산 독립영화 가리지 않고 다양하게 출연했어요. 로코 장인으로만 보이는 것에 서운함이 있나요?
최대한 덜 쉬면서 드라마, 독립영화, 상업영화까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려고 나름의 노력을 해왔어요. 서운함은 없고요. 두려움은 있죠. 이제 그런 시간마저 없어질까봐요. 이대로 안주할까봐. 한숨 푹 쉬면서 힘든 건 안 하게 될까봐. 지금 같은 마음과 열정이 사라질까봐 그게 걱정이죠.
김종관 감독이 연출한 <더 테이블>은 연우진의 새로운 면을 보여준 영화예요. 최근에 <아무도 없는 곳>으로 김종관 감독과는 두 번째 호흡을 맞췄죠. 어떻게 재회하게 됐어요?
<프리스트>를 찍는 동안 감독님과 계속 얘기를 주고 받다가 드라마가 끝나고 나서 촬영에 들어갔어요. 감독님께서 감사하게도 제 일정을 많이 조율해주셨어요.
김종관 감독이 아이유와 함께 찍은 <밤을 걷다>와 이어지는 내용이라고 하던데, 맞나요?
전에 감독님 작업실을 놀러 갔을 때 살짝 편집본을 보여주셨는데 세계관이 이어지더라고요. <아무도 없는 곳>은 김종관이라는 감독이자 작가를 통해 그려지는 상실과 어둠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예요. 저도 아직 완성본을 못 봤거든요. 굉장히 궁금해요. 아마 한국에서 많이 접해보지 못한 장르와 톤, 주제의식을 담고 있기 때문에 관객들이 색다르게 평가를 해주실 것 같아요.
저예산 영화이다 보니까 촬영 회차가 총 10회였다고요. 연기할 때 집중도가 엄청났겠어요.
짧은 회차 속에서 한 신 한 신 중요하지 않은 장면이 없었기 때문에 굉장히 밀도 높게 진행됐어요.인간의 상실과 죽음에 대해 깊게 고뇌하는 영화이다 보니 스스로를 좀 더 괴롭히면서 내 감정의 본질을 찾아가보려고 애썼어요. 그래서인지 촬영이 다 끝나고 나서도 평소에 느끼지 못한 묘한 기분이 들더라고요. 김종관 감독님과의 작업은 연기자 연우진뿐만 아니라 인간 연우진으로서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한번씩 길을 찾게 하는 시간이에요.
김종관 감독도 어떤 인터뷰에서 고마움을 표현하던데요. “그의 온화하고 부드러운 연기의 맛이 이 영화의 장점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저 지금 소름이…. (웃음)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부끄럽네요.
<아무도 없는 곳>에서 연기한 소설가 ‘창석’은 김 감독 본인과 가장 닮은 캐릭터이던데요. 이렇게 앞으로 그의 페르소나가 되는 건가요?
글쎄요. 전 그냥 감독님께서 허락만 해주신다면 언제든 감독님의 세계관 안에서 작은 힘이 되어드리고 싶어요. 배우와 감독의 관계가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공통점이 많은 분이에요. 감독님 덕분에 위스키에도 입문하게 됐고요. 감독님이 워낙 몰트 위스키 마니아라서 작업실 놀러 가면 한 잔씩 얻어먹죠. 같이 있으면 정서적인 공감이 잘 이루어지는 분이라서 편안해요. 둘이서 별 이야기를 나누지 않더라도 느껴지는 공기의 흐름 같은 게 있잖아요. 사실 <아무도 없는 곳> 촬영하면서 감독님의 어떤 옆모습에서 포인트를 잡은 것도 있고요.
어떤 옆모습이었나요?
초반에 캐릭터 감을 잡기가 힘들었거든요. 감독님과 종로의 한 위스키 바에서 술 한잔 하는데, 조용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둘이 다 가만히 있었어요. 왜 알딸딸한 상태에서 손 하나 까딱하기 싫을 때 있잖아요. 그렇게 멍 때리고 있다가 문득 감독님을 쳐다봤는데 순간 찌릿했달까. 제가 고민하고 있던 창석이라는 인물이 거기 있는 거예요. 바의 배경과, 감독님이 입고 있던 의상과 눈빛과 표정에서 느껴지는 어떤 분위기가 제 프레임에 각인됐어요. 그렇게 술 취한 상태로 집에 돌아 가서 대본을 처음부터 다시 읽었어요. 그때 캐릭터의 감을 잡았다고 할까요.
쓸쓸해 보였나봐요?
너무나요.(웃음)
올해로 데뷔 10주년인데 어떤 기분인가요?
그냥 앞으로도 시간의 흐름에 몸을 잘 맡겨야겠다는 정도? 그리고 무사히, 무탈히, 큰 사건사고 없이 잘 지나왔다는 것에 저 자신한테 축하의 위스키 한 잔 정도는 건네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