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으로 간 한식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지금 런던에서 가장 뜨거운 음식은 비빔밥과 김치 그리고 ‘치맥’이다. 음식에 무심하기로 유명한 런더너들이 한국인처럼 먹기로 작정한 이유. | 레스토랑,음식,런던,한식,한국

지구상에서 음식에 가장 관심 없는 종족을 꼽으라면 아마 영국인일 거다. 런던에서의 점심이란 샌드위치나 감자칩을 ‘걸어가면서’ 허겁지겁 먹는 것을 뜻하고 저녁은 맥주로 대신하기 일쑤, 프렌치나 이탤리언이 저녁식사에 두 시간씩 투자하는 것을 시간 낭비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음식은 물론 먹는 행위 자체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 선천적인 ‘안티 푸디’들이 최근 예상 밖의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내가 아는 런더너 중 가장 힙스터(스타트업에 근무하고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며 채식주의자)라 할 수 있는 벤이 뜬금없이 이렇게 물었다. “온 더 밥(On the Bab) 가봤어? 그게 진짜 서울에서 먹는 한식이야?” 그런가 하면 내가 아는 런더너 중 가장 영국인스러운 입맛을 가진(아침으로는 구운 콩과 토스트, 저녁은 기네스면 충분하다고 믿는) 매튜는 이런 말로 나를 놀라게 만들었다. “치맥이 무슨 뜻이야? 그게 그렇게 맛있다던데.” 이게 무슨 일인가? 과거 우리나라 정부의 오랜 염원이었고 처참한 실패작인 ‘한식 세계화’ 정책이 이제서야 빛을 보기라도 하는 걸까? 과장이 아니다. 실제로 한식은 지금 런던에서 가장 ‘힙’한 식문화로 꼽힌다. 이건 ‘국뽕’도, K팝 팬들만의 리그 같은 것도 아니다. 등 영국 주요 언론사에서 ‘Korean Food’를 검색하면 ‘런던 최고의 한식 식당 22’ ‘지금 당장 런던에서 해야 할 일-한국 식당에 가는 것’ 같은 제목의 기사를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명실상부 한식의 대표주자라고 할 수 있는 김치는 현재 런던에서 ‘새로운 미소(Miso)’라고 불리는데, 내 주변에만 해도 직접 김치를 담가 판매하는 이들이 셋은 된다. 그중엔 BTS가 누군지도 모르는 영국인 커플도 있다.직접 길거리에 나가보면 한식의 인기를 곳곳에서 목격할 수 있다. 런던의 번화가인 쇼디치, 코벤트 가든 그리고 소호에 위치한 코리안 스트리트 푸드 레스토랑 ‘온 더 밥’에 들어가려면 어느 지점이든 기본 30분은 줄을 서야만 한다. 어찌나 인기가 좋은지 5월엔 파리에 새로운 지점을 오픈할 정도다. 런던에서 가장 유명한 수제 버거 레스토랑인 ‘어니스트 버거’ 역시 워런 스트리트 지점의 스페셜 메뉴로 한식을 선택했다. 한국에서 직접 공수한 생김치 혹은 깍두기를 토핑으로 얹고 불고기 소스로 절인 베이컨 그리고 고추장 소스를 결들인 ‘김치 버거’는 런던 언론사 에서 ‘2018년 런던의 10대 버거’ 중 하나로 선정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어니스트 버거’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참이슬을 배경으로 먹음직스럽게 세팅된 김치버거 사진과 불고기, 김치, 고추장에 대한 설명이 포스팅돼 있다. 이런 슬로건과 함께. “한국인처럼 먹자(Eat Like a Korean)”. 도대체 왜 런더너들이 한국인처럼 먹는 데 관심을 갖게 된 걸까? ‘온 더 밥’을 비롯해 코리안 BBQ 레스토랑 ‘코바(Koba)’, 한식 델리 ‘미 마켓(Mee Market)’ 등 런던에서 다양한 한식 비즈니스를 선보이고 있는 린다 리 대표는 한식의 메인스트림화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여기엔 두 가지 주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는 한국, 그중에서도 서울로 여행을 가는 사람들의 수가 많아졌기 때문이에요. 우리의 음식 문화를 접하고 돌아와서도 그 음식을 즐기고 싶어하는 것이지요. 두 번째는 유럽 내에서 전반적으로 아시아 음식의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는 거예요. 더욱 모험적인 태도로 음식을 즐기는 데 재미를 느끼고 각 나라의 전통적인 음식에 대한 호기심과 수요가 늘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건 예전 ‘한식 세계화’ 정책이 그랬듯 무작정 (그 사용처는 불확실하나) 자본을 쏟아붓고 ‘비빔밥엔 고기 2 야채 8’ 같은 고리타분한 이론으로 갑자기 이룩된 게 아니라 자연스러운 문화적 작용과 반작용의 결과라는 거다. 본래 음식의 세계화란 식재료와 조리법, 사람과 문화가 뒤섞이면서 이뤄지는 법이니까 말이다.사실 한식 트렌드는 뉴욕이 한 발 빨랐다. 뉴욕에서의 한식은 이미 여러 스타 셰프들을 배출하며 진화에 진화를 거쳐 3세대로 접어들었다는 평이다. 뉴욕에서 한식이 파인 다이닝과 스트리트 푸드 신에 고루 스며든 것에 비해 런던에서는 캐주얼 다이닝 위주로 전개되고 있기 때문에 아직 3세대라고 말하긴 이르지만, 기본적으로 런던에서 한식이 뿌리 내린 풍경은 뉴욕의 그것과 무척 닮아 있다. 일단 런던은 뉴욕 못지않게 여러 인종과 문화, 언어가 한데 섞인 도시다. 낯선 문화에 대한 호기심이나 적응력이 애초에 탑재돼 있으며 자국 식문화가 견고하지 않은 탓에 음식에 관해서는 더욱 그렇다. 뉴욕의 한식이 1세대 이민자들이 형성한 맨해튼 32번가의 K타운에서 출발한 것처럼 런던에서의 한식 트렌드 역시 런던 외곽의 작은 K타운이라 할 수 있는 뉴몰든에서 지극히 한국적으로 시작됐다. 결속력 강한 이민자들의 커뮤니티 속의 한식은 처음엔 주로 한국인만을 겨냥한, 향수를 달래줄 음식점 정도였다. 때문에 그간 유럽에서 한식당이 허름한 분식집 정도의 이미지나 존재감 제로에 가까웠던 것도 무리는 아니다. 조명, 음악, 분위기 없이 가성비 좋게 배를 채울 수 있는 곳 혹은 오직 한국인에 의한, 한국인을 위한 식당 말이다. 지금 런던에서 한식 트렌드를 이끌고 있는 이들은 이민자라기보다는 개척자에 가까운 태도를 보인다. 이제 런던의 한식은 더 이상 무작정 얼큰하고 구수한 고향의 맛이 아니다. 현재 런던의 거대 푸드 트렌드인 ‘클린 이팅(Clean Eating)’, 채식 붐에 맞춰 액젓을 뺀 비건 김치샐러드처럼 현지화된 한식의 가짓수도 꽤 많은 데다 식당마다 시그너처 메뉴가 정해져 있는 식이다. 자연히 한식당 자체의 이미지도 달라졌다. 앞서 소개한 몇몇 식당을 비롯해 유튜버 ‘영국 남자’ 조시가 한식 트렌드의 중심으로 소개한 레스토랑 ‘진주(Jinjuu)’, 고급스러운 분위기로 데이트나 비즈니스 미팅 장소로 인기인 ‘김치(Kimchee)’ 등 근사하고 아름다운 인테리어를 갖춘 한식 레스토랑 역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그곳을 찾는 사람들은 런던 자체가 그렇듯, 그야말로 다양한 인종과 문화적 배경을 자랑한다. 과거처럼 한국인 8, (그리고 그 한국 친구와 함께 온) 외국인 2 정도의 비율이 아니라는 얘기다. 간단한 점심으로 테이크 아웃을 원하는 직장인, 데이트를 즐기는 커플들, 한국의 맛이 그리운 유학생이나 이민자, 그리고 전 세계에서 온 수많은 관광객들이 런던의 힙 플레이스이자 데일리 플레이스로 한식당을 찾고 있다. 물론 대부분의 식당에서 웨이팅은 필수다.그래서 음식에서 가장 중요한 것, 맛은 어떻냐고? 솔직히 “서울에서 먹던 것과 똑같아요!”라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런던의 한식은 전반적으로 조금 덜 맵고 덜 짜며, 조금 더 기름진 인상으로, 전통 한식과는 차별화된 하나의 장르로 나아가고 있다. 사실 어떤 민족의 전통 음식이라는 건 늘 진화의 여지가 있는 법이니, 당연한 수순이 아닐까 싶다. 우리나라의 중국 음식이 결코 상하이에서 먹는 중국 음식과 같지 않고 미국의 이탤리언이 로마에서 먹는 것과 다른 것처럼, 그렇다고 그것을 가짜라고 치부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런던의 한식은 결코 온몸으로 한식의 정체성을 부르짖지 않는다. 그저 런더너에겐 새로울 맛과 문화를 소개하고 ‘교류’하는 데 집중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드디어 한식은 세계화에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