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NABE BARBIE
“바비는 언제나 나에게 영감을 주었죠. 그녀에게 예쁜 옷을 입히는 건 모든 소녀들의 꿈이었으니까요.” 드레스 디자이너 림 아크라의 말처럼, 바비인형은 어릴 적 내게 옷 입기(혹은 옷 입혀주기)의 즐거움을 알게 한 유일무이한 존재였다. 돌이켜보면 공주 드레스 한번 입어보지 못하고 자란 내가 패션계에 흥미를 갖게 된 것도 어쩌면 그 바비인형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정작 현실에서 바비는 나의 패션 스타일에 단 1퍼센트의 영감도 주지 못했다. 예나 지금이나 리본 달린 블라우스, 러플 장식의 드레스, 벌룬 스커트와 같은 소위 ‘공주풍’ 옷들은 내 옷장 어느 한편도 차지한 적 없을 만큼 철저하게 외면당해왔으니 말이다.(물론 최근 바비들은 드레스를 넘어 꽤나 과감한 패션도 선보인다.) 그러던 중 이에 대해 어떤 깨달음을 느낀 순간이 찾아왔다. 바로 얼마 전 파리에서 열린 2019 S/S 빅터 앤 롤프 오트 쿠튀르 쇼를 눈앞에서 목도하게 된 것. “I’m Not Shy. I Just Don’t Like You” 등과 같은 강렬한 메시지와 상반된 동화 같은 무드, 튤 소재를 아낌없이 사용한 거대한 실루엣의 쿠튀르 드레스들은 오프닝부터 피날레까지 한시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는 오색빛깔 돌 드레스를 보니 자연스레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건 셀린이나 질 샌더 쇼를 보고 느끼는 충족감과는 전혀 다른 감정이었다. 내가 ‘입고’ 싶은 옷이 아닌, 내가 ‘보고’ 싶은 옷을 볼 때 느끼는 행복감이 존재했던 것이다.
1990년대 후반 즈음 유행했던 <프린세스 메이커> 게임을 기억하는가? 아빠가 되어 딸을 공주님으로 키워낸다는, 생각해보면 롤리타신드롬 그 자체였던 그 게임엔 소녀를 위한 다채로운 드레스가 등장한다. <프린세스 메이커>를 즐겼던 한 사람으로서 고백하건대 자신이 일상에서 입을 수 없는 화려한 옷들을 소녀에게 입히고, 또 그 모습을 보면서 일종의 대리만족을 느꼈던 것 같다. “저는 밤을 위한 드레스를 좋아해요. 또 꿈을 사랑하죠. 마치 환상적인 드레스와도 같은 꿈을 말이에요. 그것들은 여성을 꿈꾸게 해주니까요.” 랑방에서의 전성기 시절, 마치 동화책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돌 드레스들을 선보였던 알버 엘바즈는 천부적인 드레스 메이커였다. 물론 현재의 하이패션계에도 그처럼 동시대의 프린세스 메이커를 꿈꾸는 드레스 메이커들이 존재한다. 특히 2019 S/S 시즌엔 주요 트렌드로 지목될 만큼 그 존재감이 남다르다. 게다가 올해는 바비인형 탄생 60주년을 맞는 해이기도! 이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서 주목해야 할 몇몇 컬렉션을 짚어보면 다음과 같다.
드레스는 물론이거니와 머리를 장식한 장미, 튤 장식, 베일로 완벽하게 동화 같은 컬렉션을 선보인 로다테, 중세시대 갑옷을 입은 왕자님과 함께 피날레를 장식한 라이언 로, 거대한 러플과 리본, 코르사주 장식이 달린 대담한 실루엣의 피스로 또 한 번의 드라마틱한 컬렉션을 완성한 마크 제이콥스, 마지막으로 패션계의 대표적인 바비 마니아 제레미 스콧의 모스키노 쇼에는 마치 그가 스케치북에 그려왔던 바비 걸들이 3D로 환생한 듯한 룩들이 등장했다. 실용성을 강조하는 시대에 현실감이 떨어지는 트렌드는 자연스레 소외되기 마련. 분명 이런 옷이나 트렌드는 현명한 스타일링 팁이 되어주진 못할 것이다. 하지만 꼭 바비가 아니더라도 동화책 속, 디즈니 만화 속 공주들과 함께 자라왔다면 누구나 갖고 있을 드레스에 대한 로망, 혹은 열망을 충족시키는 데 이보다 좋은 매개체가 또 있을까? “저는 항상 저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을 찾고 있어요. 이 일에서 내가 하는 모든 것들은 그 기쁨을 전달하려고 노력하는 겁니다. 패션은 항상 재미있어야 하니까요.” 바비 마니아이자 패션 행복 전도사인 제레미 스콧의 말이다. 꼭 입을 수 없다 해도 괜찮다. ‘보는’ 즐거움을 느끼는 것도 패션을 통해 체감할 수 있는 판타지 중 하나일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