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산책주의자의 사생활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거창한 이념과 몸짓을 넘어, 나는 감히 ‘산책주의자’라 불리고 싶다.” | 책,사랑,신간,도서,작가

어느 인터뷰에서 황주리 작가가 ‘사랑’을 말하며 선택한 단어와 문장을 받아 적어보았다. “사랑을 백프로의 완전한 소통을 열망하는 상태라고 규정을 한다면, 그런 소통은 어차피 불가능하잖아요. 그 불가능함에 대해 따뜻한 손을 내미는 상태가 사실은 진짜 사랑이 아닐까 생각해요. 이제 저는 사랑을 풍경으로 바라보는 나이가 됐어요. 제가 만약 지금 사랑을 한다고 하더라도 저는 그저 그 풍경 속의 작은 그림일 것 같아요. 삶은 유한하고 우리는 모두 태어나서 죽듯이, 모든 사랑도 언젠가는 끝이 나기 마련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가장 소중한 축제의 순간. 그런 게 사랑이 아닐까요.”을 관통하는 정서도 ‘사랑’이다. 어린 날 바닷가 백사장에서 똥을 밟고 우는 작가에게 어머니는 “괜찮아, 괜찮아.”라고 하셨다. 50년이 흐른 지금도 저자는 그 말의 온도와 느낌을 기억하고,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그 말을 떠올린다고 했다. 이런 사랑의 온기를 그녀는 책에 가뒀다. 막 이순의 문턱을 지나쳐온 황주리 작가의 본업은 화가다. 서울과 뉴욕에서 공부했다. 감각적인 원색과 윤곽이 도드라지는 그림체로 그녀만의 신구상주의적 화법을 발전시켜왔고, 석남미술상과 선미술상을 수상하며 창의적이고 뛰어난 미술 세계를 인정받았다. 그동안 그림뿐 아니라 도시 인간의 내면과 현실 상황을 아름답고 날카로운 언어로 묘사하며 산문과 소설 또한 다작했다. 10년 만에 출간하는 그의 다섯 번째 산문집 은 오늘의 자신을 이룬 많은 것들, 그 가운데 가족과 사람 그리고 여행에 대해서 깊은 속내를 털어놓은 그림 에세이로, 그녀가 사랑하는 네 가지 주제로 총 58편의 글이 실려 있다.사업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지만 딸에게는 무한한 사랑과 신뢰를 주었던 아버지, 아버지의 사업 뒷바라지를 하면서도 늘 중심을 잃지 않았던 어머니, 한창 일할 나이에 “내가 우려하던 모든 일이 일어났다”라는 글을 남기고 황망히 세상을 떠난 남동생, 사랑이란 느낌을 주었던 강아지 베티까지. 이 세상 어느 집에나 있을 법한 ‘가족사’라는 프리즘을 통해 저자를 바라보면 ‘어디에서나 당당한 화가’라는 수식어를 벗어든 한 명의 사람이 서 있다. 여행할 때 항상 밝은 날만 있진 않다. 밝은 날은 밝아서, 흐린 날은 흐려서 추억이 된다. 인생의 길도 걱정이 쌓여 내공이 되고, 상처가 쌓여 용기가 된다는 것을 이순의 고개에서 저자는 담담히 들려준다. 에서 그는 높고 낮은 인생의 요철들마저 당시에는 크고 어려웠지만 결국 가벼운 산책과 같았다며 감사를 말한다.“세상의 모든 걸음은 산책이다. 요즘 무슨무슨 ‘주의자’라는 말을 흔히 듣는다. 그만큼 인간의 생각과 이념의 종류가 다양해져서 존재하는 인간의 수만큼이나 많은, 각기 다른 ‘주의’가 존재할지 모른다. 평화주의자, 이타주의자, 개인주의자, 쾌락주의자, 낭만주의자, 미식주의자, 실용주의자, 자연주의자, 낙관주의자, 채식주의자, 합리주의자, 기회주의자, 민주주의자, 사회주의자 등. 거창한 이념과 몸짓을 넘어, 아직도 빈곤과 질병과 전쟁이 계속되는 세상에서 나는 감히 ‘산책주의자’라 불리고 싶다. 사람과의 만남도, 사랑하던 순간의 기억도 골목길을 산책하는 것과 닮았다. 누구나 내면에 자신만의 골목길을 지닌다. 내 삶의 산책은 언제나 내게 주는 선물이었다.”책을 덮을 즈음이면 저자와 함께 어떤 낯선 골목길이라도 좋으니 저녁 산책을 함께하고 싶어질 것이다. 오늘도 그녀는 어딘가에 펼쳐진 골목길을 기꺼이 배회하고 있을 터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