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전까지도 촬영을 했다.(13화 방영이 끝난 참이었다.)
연기자들도 대본이 나와야 다음 전개를 알 수 있다. 혹시라도 줄거리가 새어나갈까 봐 모두 조심하고 있다. 스케줄 표와 대본도 각 배우마다 따로 메일로 받는다. 스포일러 됐을 때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보안이 철저하다.(웃음) 시청자 나름대로 결말을 예상한 글을 보면서 나조차도 ‘정말 이렇게 될 건가?’ 생각할 때가 많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조금씩 비껴가서 놀랍다. 딱 하나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건 지금까지보다 엄청난 사건사고가 연달아 터질 거라는 거다.
이렇게 드라마 촬영장을 벗어난 순간임에도 김주영이라는 인물의 스위치를 내리는 것이 쉽지 않아 보인다.
힘을 모아서 한꺼번에 터트리는 연기가 아니라 야금야금 줄기차게 단단한 연기를 보여줘야 하는 지점 때문에 정신적으로 힘들었다. 김서형을 버리긴 싫지만 김서형이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4개월을 달려왔다. 김주영이 어떤 사람인지, 김주영의 끝은 무엇인지 제대로 알 수 없어 답답하기도 했지만 이제 거의 끝이 보인다.
자신이 사라지는 느낌?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나?
아마 많은 배우들이 역할에 몰입하다 보면 느끼는 기분일 것이다. 나도 지금까지 많은 역할에 빠져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격하다. 시놉시스에 김주영을 설명하는 한 줄이 ‘감정 표현 없는 여자’다. 캐슬에 사는 네 주인공은 여기저기 부딪히며 감정을 표현하지만 김주영은 감정을 억누르는 일이 잦다. 색다른 느낌에 가깝다.
의 긴장감은 밀도가 높다. 연기하는 배우들 사이의 긴장, 조도와 음향이 만들어내는 긴장, 보는 이가 느낄 긴장까지.
감독님이 나를 캐스팅하기 전 내가 출연한 이전 작품을 많이 보셨다. 대사가 있든 없든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배우라고 본 거다. 나에게 그런 장점이 있다는 건 알고 있다.(웃음) 그런데도 감당하기 힘들었다. 김주영의 폭을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한계가 있지 않을까? 얼마 전에는 감독님 앞에서 눈물을 찔끔 보인 적도 있다. 그리고 당연히 감독님의 역량이 큰 몫을 한다. 현장에서는 배우들을 놀 만큼 놀게 하고 연출과 편집으로 그 어마어마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내가 연기를 했지만 어떻게 완성되어 나올지 늘 궁금하다. 어제도 집에서 방송을 보다가 내가 저렇게까지 무서웠나?라는 생각이 들어 감독님께 문자를 보냈다. 모든 배우와 스태프, 감독님의 삼박자가 잘 맞는다.
입체적인 여성 캐릭터가 여럿이 등장해 이끌어가는 드라마가 흔치는 않다.
여성 캐릭터가 이야기의 한 축이 되고 어떨 때는 여배우가 주목 받는 건 늘 있어왔던 일이다. 입시와 가정 이야기를 하다 보니 여배우의 역할이 도드라지면서 이목을 끄는 것 같다. 다만 40대 언저리의 여성들이 모여 중심이 되는 드라마가 과연 몇 편이나 있었을까 생각해보면 흔한 일은 아니다. 가정 안에서 아이를 키우는 비슷한 터울의 여성들이 사회 이슈에 밀접한 이야기를 끌어가는 것이 의미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내의 유혹> 신애리 이후로 <자이언트>라는 드라마를 했고, <기황후>의 황태후, <샐러리맨 초한지>의 모가비까지 스스로 찬 캐릭터를 해냈다는 대견함이 있다. 지난 경험이 없었다면 김주영도 없었을 것이다.
강렬한 캐릭터를 구축하기 위해 많은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피부의 미세한 떨림과 손가락 끝의 매무새에서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전형과 거리가 있는 악인이 탄생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대학을 보내는 입시 코디네이터라는 단출한 단서에서 시작했다. 대본을 받을수록 악역에 가까웠다. 사실 <아내의 유혹> 신애리 역할을 하고 난 후 악역을 맡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김주영이 감정 표현을 안 하다가 조금만 냉소를 보일 때 혹시라도 시청자는 신애리를 보는 게 아닐까 조심스럽고 또 조심스러웠다. 내가 연기한 모습을 답습하고 싶지 않았고 혹시나 그런 평가가 나온다면 이 작품에 폐가 된다고 생각했다. 감정을 절제하다 보니 외적으로 뿜어져 나왔을 것이다. 얼굴 근육을 쓰거나 손을 쓸 때 그 부분만 따로 담는 게 아니다. 감독님과 촬영팀의 관찰력 덕분이기도 하다. 카메라가 끈질기게 나를 쫓았다. 요즘에는 악역에 대한 부담감을 스스로 덜어내고 내가 카메라를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즐기고 있다.
김주영의 외적인 모습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만나보진 못했지만 실제로 큰 금액을 받고 펜트 하우스에서 화려하게 사는 입시 코디네이터가 많다고 했다. 처음에는 김주영도 캐슬에 사는 네 명 못지않게 화려한 모습으로 꾸밀 생각이었다. 긴 웨이브 머리에 치장한 모습을 제안했다가 캐슬의 네 명과 대비되는 모습도 어떨까 싶었다. 대신 김주영은 블랙을 입어도 화려해야 한다는 생각은 변함 없었다. 원단 하나부터 신경 썼다. 신과 어울리는지 수많은 옷을 입고 사진을 찍은 다음 펼쳐 놓고 최종적으로 골라 촬영했다. 잠을 쪼개가며 네 시간씩 피팅했다.
본인의 얼굴을 많이 드러내면서 역할에 녹여내야 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내 얼굴이 보편적으로 예쁜 편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연기할 때 외모는 중요하지 않다. 역할에 맞게 사실적인 모습을 보이는 게 우선이다. 지금까지 맡은 역할 대부분이 딱히 주인공이 아니다. 갑자기 등장해 에너지를 뿜어주는 임팩트 있는 역할이 많았다. 그럴 때 내가 챙기고 가져가야 할 것에 대해 골몰한다. 김주영도 따져보면 분량은 그렇게 많지 않다. 김주영이 등장할 때마다 어떤 여파를 줄 것인가에 집중했다.
말투 또한 화제다.
“전적으로 믿으시겠습니까?” “받아들이시겠습니까?”라는 대사를 보통 사람들이 쓰진 않는다. 상대방을 누르고 유도해야 하는 역할이다 보니 위엄을 담으려 했다. 처음에는 혼자 사극 하는 기분이 들었다. 신애리 때도 그렇게 패러디를 하더니 이번에도 그렇다. 왜 내가 하면 사람들이 패러디를 하지?(웃음)
쟁쟁한 배우들과 함께하는 현장의 분위기가 궁금하다.
대본과 촬영, 지휘가 완벽한 현장이다. 그래서 나를 포함한 다른 배우들 모두 각자가 맡은 연기를 잘 하자는 분위기다. 공부하는 학생으로 돌아간 것처럼 숙제를 잘해서 잘 보여줘야지 하는 느낌? 워낙 연륜 있는 배우들이라 차분하고 편안하게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 다들 엄마로 나오다 보니 역할에 동화돼 서로의 자식이나 집안 걱정을 하기도 한다.
안에서 다른 역할을 맡을 수 있다면?
이태란 씨가 맡은 이수임 역할. 누구나 조금씩 갖고 있겠지만 내 안의 정의로움을 꺼내보고 싶다. 아마 지금 김주영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일 거다.
회를 거듭할수록 명장면을 쏟아내고 있다. 한서진의 과거가 밝혀졌을 때 광기 어리게 웃는 장면이 자주 회자된다.
실사와 함께 실루엣을 찍었다. 찍을 때는 의아했는데 나중에 방송으로 보고 감탄했다. 너무 웃으면 자칫 기시감을 줄 수 있을 것 같아 불안했는데 실루엣으로 처리했더라. 나는 오히려 나중에 염정아 씨가 소리도 안 내고 괴로워하는 장면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무음 울음이라니. 앞으로도 명장면이 많아 하나 꼽으라면 어려워서 못 꼽는다.
인생 캐릭터를 만난 것 같나?
그렇다면 인생 캐릭터는 어떤 거라고 생각하나?
연기하면서 가장 행복감을 얻었던 역할이라고 말하고 싶다. 본 사람이 많이 없겠지만 영화 <봄>을 꼽겠다. 정숙이라는 역할에는 내 모습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고 불편한 마음 하나 없이 촬영했다. 그리고 작은 해외 영화제 외국어 부문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받았다.(웃음)
수많은 패러디 영상이 돌고 있다. 챙겨 보는 편인가?
주변 사람들이 보내준다. 안 그래도 새벽에 보고 빵터졌다.(웃으면서 보여준 인스타그램에는 개그맨 황신영의 패러디 영상이 리그램되어 있었다.) 내가 다시 따라하게 되더라. 연습해서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다. 패러디하는 분들의 창의력이 대단하다.
평소에는 어떤 시간을 보내는지 궁금하다.
여유 있을 때는 여행 가는 걸 분명하게 좋아한다. 평소에는 강아지 꼬맹이와 24시간을 붙어 지낸다. 암에 걸렸는데 최대한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싶다. 꾸준히 영어 공부를 하긴 했는데, 촬영 들어가면 흐름이 끊겨서 계속 제자리다. 촬영 끝나면 꼬맹이랑 여행 가고 영어 학원에 열심히 다닐 생각이다.
노는 시간은 없나?
<자이언트> <샐러리맨 초한지><기황후>를 같이한 작가와 <굿 와이프> 팀처럼 이제는 동료에서 친구에 더 가까워진 사람들과 함께 노래방 가서 춤추고 노래한다. 예전부터 춤추고 노래하는 걸 좋아했다.
노래방 18번은 무엇인가?
얼마 전 노래방에서 혁오의 ‘톰보이’를 제대로 불러봤는데 괜찮았다. 요즘 푹 빠져서 듣는 건 잔나비다. 되게 좋다.(휴대폰으로 잔나비의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을 들려주었다. 플레이리스트에는 아바와 산울림이 함께 있었다.)
오래도록 건강함과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다. 관리하는 특별한 방법이 있는가?
일할 때는 스트레스 받고 예민해지는 걸 즐긴다. 한순간 일에 빠져드는 것이 적당한 자극이 된다. 끝나면 모두 내려놓고 멍하게 지낸다. 특별히 시간을 들여서 하는 건 필라테스뿐이다. 꼬맹이 산책 겸 집 근처인 남산을 걷기도 한다. 꼬맹이 덕분일 수도 있겠다. 지난 14년 동안 한 생명이 곁에 있다는 책임감이 나를 움직였다. 혼자 있을 때 결정하지 못했던 것들이 있었는데 이 아이가 나를 올곧은 방향으로 가게 만든 것 같다.
동물에 대한 국민 청원에 적극적이다.
적극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소소하다. 내가 영향력이 있어서 무언가 크게 바뀔 거라고 기대하며 하는 것이 아니다. 내 작은 마음이 움직이고 할 수 있는 것을 지나칠 수가 없다. 배곯고 있는 고양이를 보면 사료를 사주고 다친 비둘기를 보면 동물병원에 데려간다. 남산에서 다친 비둘기를 봤는데 그대로 두면 죽을 거 같아서 병원에 데려갔더니 가망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안락사를 시켰다. 꼬맹이도 항암 치료를 받느냐 아니냐의 갈림길에서 내가 선택을 했다. 동물이 할 수 없는 선택을 인간이 하는 것조차 이기적일 수 있다는 고민도 한다. 그래서 이수임 역할을 해보고 싶다는 마음도 든 것 같다.
을 마치고 나면 배우 김서형의 폭이 훨씬 넓어질 거라는 확신이 든다.
안 해본 건 다 해보고 싶다. 가장 좋아하는 영화 <러브레터>같은 작품이나 드라마 <남자친구>의 송혜교 씨가 맡은 역할처럼 말랑한 사랑을 하는 연기 나도 잘할 수 있다. 특히 연하남을 휘어잡는 멋있는 여자!(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