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다 칼로와 함께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Art&Culture

프리다 칼로와 함께

오는 11월 4일까지 영국 빅토리아 앨버트 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시 'Frida Kahlo: Making Her Self Up'을 맞아, 영국의 소설가 제시 버튼(Jessie Burton)이 자신의 고통을 강렬한 작품으로 승화시킨 프리다 칼로의 수수께끼 같은 면모를 찾아 멕시코에 있는 프리다 칼로의 집으로 여행을 떠났다.

BAZAAR BY BAZAAR 2018.10.16

프리다 칼로가 입었던, 페인트가 묻은 환자복.

사진/ Harry Cory Wright Art Work Museo Dolores Olmedo Patino Mexico City/ Mexico/ C Leemage/ Bridgeman Images, C Banco De Mexico Diego Rivera Frida Kahlo Museums Trust, Mexico, DF/Dacs 2018 

‘부러진 척추(The Broken Column)’, 1944.

프리다 칼로는 18세 때 죽을 뻔했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생각했다. 멕시코시티에서 버스 충돌 사고를 겪은 그녀의 상황은 매우 심각했다. 사고 직후 구급차를 기다리는 동안 그녀가 누워 있던 당구대가 화장용 장작 더미로 사용되었을지도 몰랐다. 척추 세 군데가 산산조각 났고, 쇄골과 갈비뼈도 부러졌으며, 골반뼈와 어깨뼈 탈골, 오른쪽 다리에 열한 군데 골절을 입었다. 가장 심각한 부상은 쇠로 만든 난간 끝부분이 그녀의 복부를 관통해 생식기를 뚫고 나온 것이었다. 출혈이 너무 심해 온몸이 피로 물들었다. 그리고 같은 버스를 탔던 사람이 들고 있던 도자기 항아리가 깨지면서 그 안에 든 금가루가 칼로의 온몸을 뒤덮었다. 그것은 마치 사고 이후로 계속될 그녀의 심각한 고통을 예언하는 세례와도 같았다. 칼로가 나중에 말한 대로 사고 당시에는 조용했다고 한다. 하지만 의료진이 그녀의 복부에 박힌 쇠 난간을 뽑아낼 때, 그녀는 구급차를 타던 순간보다 더 크게 비명을 질렀다.

쇠 난간이 뚫고 들어간 복부, 피, 금가루, 당구공, 시끄러운 구급차 사이렌 소리는 모조리 프리다 칼로 그 자체였다. 심한 고통을 받고 있는 여성의 몸, 한눈에 들어오는 대조적인 광경, 블랙 유머, 불굴의 정신 등을 보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은 희생자로 남기만을 거부하고 더욱 강인한 이미지를 만든 멕시코인 창작의 여왕을 위해 테킬라 한 잔으로 축배를 들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그리는 그림은 실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외과 전문의들은 마치 콜라주 작품처럼 칼로의 몸을 다시 붙여야 했다. 그림에서 자신의 얼굴이나 몸통을 잘라내는 칼로를 보면서 예상할 수 있는 또 다른 진실은 현란한 기하학 무늬 직물 그리고 화려한 보석 장신구 등을 이용해 신체의 장애를 눈에 덜 띄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93년 전 병원에 있던 프리다 칼로는 퍼즐과 같은 존재였다. 아직도 나에게 그녀는 여전히 끼워 맞추기 힘든 퍼즐과 같은 존재로 남아 있다.

블루 하우스 외관.

블루 하우스 내 프리다 칼로의 작업실.

칼로가 2세 때 아버지 기예르모(Guillermo)가 찍어준 사진.

왜냐하면 또 다른 이야기도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혁명의 시대에 독수리가 뱀을 먹는 아즈텍 문명의 나라에서 멕시코 원주민 어머니와 독일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칼로는 코요아칸의 보라색 자카란다 나무 아래서 유명 사진작가이던 아버지를 지켜보며 그의 카메라 앞에서 자세를 취하고, 단 한 번의 시선 안에서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배우면서 짓궂으면서도 상상력이 풍부한 아이로 자랐다. 소아마비로 길이가 달라진 다리를 자신의 그림 속에서 나비로 뒤덮었다. 의사가 되고 싶었던 칼로는 18세 되던 해에 소아마비보다 더 심한 저주, 버스 사고를 겪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살아남았다. 온몸이 으스러졌지만 살아남았고, 명성과 몸집이 모두 산과 같았던 남성과 결혼도 했다. 칼로는 디에고 리베라를 또 다른 사고라고 말했다. 그녀는 무척 간절하게 원했지만 엄마가 되지는 못했다. 위험한 유산과 중절 수술을 여러 차례 겪었다.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침대 위쪽에 매달아준 거울을 올려다보면서 회복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그림 작업은 칼로에게 곧 구원이었다. 칼로가 그린 자화상들은 개인적인 삶, 공산주의자로서의 철학, 그녀를 지탱해준 가톨릭 교리, 그리고 멕시코 토착문화에 대한 이해 등이 모두 통합된 것이었다. 칼로는 전 생애에 걸쳐 기다란 스커트와 짙은 콧수염 자국을 통해 양성애 성향을 표현했다. 침실에서는 매우 자유로웠지만 작업실에서는 절제력 있게 행동했으며 항상 붓을 꼼꼼하게 관리했다.

칼로의 그림들은 크기는 작지만 그녀 자신의 자전적 주제를 다루는 측면으로 볼 때 그 가치가 매우 높다. 때때로 그녀는 물감 대신 매니큐어를 사용해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현실 세계와 상상 속 세계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의미로 그녀의 삶 자체가 곧 예술이었다. 그림 속에서 그녀는 틀에서 벗어나 꽃들이 온몸을 에워싸게 표현함으로써 자신의 신체적인 결함과 망가진 생식력을 숨겼다. 화려한 컬러의 옷도 보호막이 되었다. 그녀는 오른쪽 신발의 굽을 더 길게 그렸다. 문자 그대로 균형을 잃은 채 살아가는 느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몇 번이고 그녀는 ‘La Pelona’, 즉 그녀가 말하던 대담한 여인이 되기 위해 죽음과 맞서 싸웠다. 평생 서른 번이 넘는 중대한 수술을 견뎌냈지만 결국 죽음이 이기고 말았다. 칼로는 50세가 채 되지 않은 나이로 블루 하우스에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 누워 있다. 손가락에 끼워진 옥과 산호로 만든 반지들이 희미한 어둠 속에서 반짝인다.

나는 코요아칸의 블루 하우스로 향하는 이 여행을 해야만 했다. 프리다 칼로는 모든 작가의 꿈이며 몇 년 동안 나의 꿈이었기 때문이다. 칼로가 표현하는 그녀의 모습은 변화무쌍하고 자기중심적인 동시에 시간이 흐르면서 겉모습에서 보이는 이미지가 더욱더 굳어지고 있다. 그런데 칼로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영감을 주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숫자로 나타내기는 매우 힘들다. 누구든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하지만 여성이라면 누구나 놀랄 수밖에 없다. 칼로의 이야기는 때로는 너무 자세하고 충격적이어서 현실감이 떨어지기도 한다. 칼로의 편재성과 영구성은 무언가를 걸러낸 확실한 이야기보다 그녀의 진실한 인간적 특성을 확산하는 계기가 되었다. 세상을 향해 내보인 그녀의 얼굴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뒤에 놓인 여성의 모습에 더 관심을 가지게 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칼로에게 관심을 가지는 이유가 그것뿐일까? 사람들은 여전히 그녀의 강렬한 시선을 신뢰한다. 왜냐하면 칼로의 시선은 현실을 깊이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프리다 칼로는 환상이 아니다. 그녀는 스스로 자신을 새롭게 만들어냈다. 누군가 여성성이 정점에 이르렀을 당시 칼로처럼 온몸이 산산조각 났다면 어떤 행동을 할 수 있을까? 만약 여러분이 멕시코에서 가장 유명한 남성과 결혼했다면 어떻게 대처했을까? 나는 칼로에게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믿는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죽음이 늘 가까이에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했으며, 만성통증과 상실감을 실제로 겪었고, 놀림받고 멸시당하고 부정당하는 동시에 매우 큰 존경을 받았기 때문이다. 칼로는 스스로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될지 선택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타인이 정해주는 대로 살아야 했을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파란만장한 그녀의 인생사 또한 매우 흥미롭다. 그녀는 멕시코혁명이 시작되기 3년 전에 태어났다. 그녀는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 속 인물인 올랜도처럼 평생을 침대에서 멀리 나갈 수 없었지만 누구보다 대담하고, 연약하지만 강인한 유대인, 멕시코 토착민, 독일인, 양성애자, 아내, 스스로를 지지하는 사람, 거울 위에서 춤을 추는 정부 사이를 오가는 삶을 살았다. 다양한 모습이 모두 모여 온전한 자신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이해한 삶이었다. 나이를 먹는 일은 그녀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무슨 일이든 흥미를 느낄 때만 했다. 많은 사람이 칼로에게 사로잡히는 이유는 칼로가 이토록 다양한 모습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가지 더 중요한 매력은 그녀가 스스로에게 한 행동에 있다. 진심이든 그렇지 않든 칼로는 이렇게 말했다. “나를 보세요. 여러분은 원하는 무엇이든지 될 수 있어요.”

프리다 칼로의 일기장.

‘The Two Fridas’, 1939

블루 하우스 외부 전경.

사진/ Alamy, Frida Kahlo/ Museo De Arte Moderno, Mexico City, Mexico/De Agostini Picture Library/G Daglioti/ Brideman Images. C Banco De Mexico Diego Rivera Frida Kahlo Museums Trust. Mexico, DF/Dacs 2018 

칼로는 부르주아 계층, 보수주의자들, 유럽을 맹신하는 멕시코 사회가 시골 출신의 중산층 소녀에게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 자신이 그 속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무엇보다도 그녀가 쓴 밝고 강한 메시지를 담은 편지를 읽으면서, 또 보석처럼 빛나는 그림을 깊이 들여다보면서, 그리고 그녀의 굳은 신념을 연구하고 사진 속 그녀의 모습에서 반항적인 시선을 보면서 그녀가 자신의 의지를 단 한 번도 굽히지 않았다는 점에 감동받았다. 사고가 나기 전에도 칼로는 누구든 다른 사람이 시키는 일을 순순히 한 적이 거의 없었다. 사고 이후에도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만을 규칙으로 삼았다. 칼로는 헤어지면서 자신에게 큰 상처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디에고를 사랑했던 것 같다. 하지만 결국 디에고를 버린 쪽은 칼로였다.

칼로는 자신이 매우 약하다고 느낄 때조차 그림을 그렸다. 사실 그녀의 약점 때문이었다. 칼로는 항상 자신의 능력을 확신하지 못했다. “나는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다.”라고 하면서 그저 그림을 계속 그릴 뿐이었다. 핏자국뿐만 아니라 물감 자국이 선명한 그녀의 환자복이 아직도 남아 있다. 이렇게 확실한 시각적 비유를 담은 그녀의 환자복은 나를 사로잡았다. 자신의 고유한 능력을 믿고 타인들의 의견에서 벗어난 한 예술가의 모습은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답다. 칼로는 소아마비로 길이가 달라진 다리로 날쌔게 걸어 자신을 에워싼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라는 굴레를 넘어섰다. 그리고 뒷짐을 지고 “그래서 어쩌라고?”라고 말하는 것처럼 여유롭게 자신만의 자유로운 공간을 만들어냈다. 우리는 아즈텍 여왕처럼 화려하게 꾸미고 머그컵과 손가방 위에 서 있는 칼로를 본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이렇게 만들어진 이미지 또한 내면에 잠재된 트라우마에 맞서기 위해서 필수적이었다. 칼로는 두려움이 곪아 터질 때까지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고통과 장애, 관습에서 벗어난 외모, 강렬한 남편을 모두 스스로 선택했다. 그리고 모두 자신의 이미지로 만들었다. 그녀는 사랑하고, 살고, 그림을 그리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거의 맹목적으로 계속 사랑하고, 살고, 그림을 그렸다. 그렇지 않으면 끔찍한 암흑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즐거움은 복합적이었다. 신랄하고 어렵고 파괴적이기도 했다. 하지만 무슨 일이 닥치든 그녀는 운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 1929년 결혼식 날 찍은 사진.

사람들은 프리다 칼로가 카메라 앞에서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자세를 잡는 일이 자연스러웠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녀 역시 수줍음이 많아서 아버지의 카메라 앞에 선뜻 나서지 못했다. 병든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칼로는 사진 속에 담긴 자신의 강인한 모습에 무척 놀랐고,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시선을 처리하는 법을 배웠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을 보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때때로 불편했다. 어쩌면 칼로는 타인들의 시선에 힘을 잃고 주저앉았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내 떨치고 일어나 사람들에게 자신만의 메시지를 전달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내 작업실에서 글을 쓰면서 그녀가 지녔던 확고한 신념에 대해 파고들었다. 그것은 제4의 물결을 맞은 시대에 페미니즘적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현대 여성들조차 생각해내기 힘든 것이었다. 수십 년 동안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 위해 많이 노력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말을 하기는 쉽지만 실천하기란 무척 어렵다. 친절하고 호감 가는 여성, 너무 시끄럽지 않으면서 너무 조용하지도 않은 여성, 너무 노골적이지 않으면서 너무 비밀스럽지도 않은 여성, 심하게 무심하지 않으면서 지나치게 섹시하지도 않은 여성, 너무 멍청하지 않으면서 너무 똑똑하지도 않은 여성을 기대하는 요구에 자기도 모르게 부응하는 일 말이다.

칼로는 이런 여성에 대한 기대를 모조리 짓밟는다. 그리고 의심의 눈초리로 여러분을 바라본다. 그녀는 이런 이원론적인 기대치들을 먼지처럼 털어버렸다. 그런 기대치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을뿐더러 말도 안 되는 억지에 너무나 경박한 내용들이기 때문이다. 칼로는 여성에 대한 이러한 기대치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런 기대치들이 한 개인의 자아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 칼로가 그린 가장 유명한 (그리고 가장 큰) 그림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론이 무성하다. ‘두 명의 프리다’는 리베라와 결별한 후 3개월 만에 완성한 그림이다. 사람들은 그 그림이 칼로의 이중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그녀 안에 내재된 두 가지 면, 즉 유럽인인 동시에 멕시코 토착인이며, 무덤덤한 동시에 과격하고 상심한 동시에 분노를 터트리는 모습을 한꺼번에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이중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녀가 두 가지 측면이 모두 자신 안에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 같다. 사람들은 칼로의 카멜레온과 같은 면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늘 칼로를 분석하고 분해했다. 하지만 그녀는 다중성을 모두 포함한 모습 그 자체로 받아들여지기를 원했다.

프리다 칼로는 자신의 고통과 장애, 관습에서 벗어난 외모, 강렬한 남편, 이 모두를 스스로 선택했다. 그리고 모두 자신의 이미지로 만들었다. 그녀는 거의 맹목적으로 계속 사랑하고, 살고, 그림을 그렸다. 무슨 일이 닥치든 그녀는 운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칼로의 옷 디테일.

1954년, 자신의 침대에 누워 있는 칼로.

사진/ C Werner Bischof/ Magnum Photos, Private Collection/ Bridgeman Images. C Banco De Mexico Diego Rivera Frida Kahlo Museums Trust, Mexico, DF/Dacs 2018 

멕시코시티에서 사람들은 지하철 공사를 하느라 땅을 파낼 때마다 아즈텍 문명의 영광이 새롭게 밝혀진다고 말한다. 켜켜이 쌓인 흙 속에서 천년이 넘도록 숨어 있던 고대의 신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땅 위에 사는 우리들은 늙는다. 하지만 우리의 발 아래 묻힌 보물들에 대한 생각은 신기하게도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고대의 아름다움을 발굴해 형편없는 현실에 적용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길에 좀 더 살을 붙여 현재 알고 있는 내용을 한 차원 더 높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기를 원한다.

프리다 칼로가 일생을 보내고 생을 마감한 블루 하우스는 멕시코 코요아칸의 아름다운 거리에 있다. 당시 코요아칸은 다행히도 짧은 기간에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발굴 작업이 모두 끝이 난 상태였다. 1954년에 프리다 칼로가 사망하자 리베라는 그녀 대신 죽기를 바랄 정도로 몹시 상심했고, 그의 친구들은 의사에게 칼로의 피부에 문신을 남겨 리베라의 슬픔을 증명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디에고 리베라는 칼로의 경정맥을 열어 보여달라는 요구까지 할 정도였다. 칼로의 상처투성이 몸은 죽어서도 외과의사의 메스를 피할 수 없었고 한 남자의 욕망의 대상이 되었다. 칼로의 피부에 새긴 디에고의 슬픔은 곧 진실로 증명되었다. 칼로가 사망한 지 3년 후 리베라 역시 사망했다.

2004년에 블루 하우스의 방 하나가 대중에게 공개되면서 마야 신전에 맞먹는 수많은 작품이 빛을 보게 되었다. 방 안에는 칼로가 쓴 편지도 있었다. 그 속에는 그녀의 생애를 담은 6천여 장의 사진과 글 옆에 함께 그린 그림 그리고 립스틱 자국으로 글이 잘 보이지 않는 것도 있었다. 시와 기도, 그림 등이 가득한 칼로의 특별한 일기장도 있었다. 칼로의 호화로운 옷과 피부와도 같았던 의료용 코르셋, 향수 병과 함께 놓인 여러 가지 약, 의족과 아이섀도용 펜슬 그리고 상자 안에 깔끔하게 정리된 수많은 그림 또한 빼놓을 수 없다. 방 안의 독특한 화학적 상태 덕분에 칼로의 작품들은 다행스럽게도 완벽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었다. 칼로의 향수 덕분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프리다 리베라 부인 앞으로 온 편지.

멕시코 전통 장난감과 인형이 걸려 있는 칼로의 침대.

정원에서 찍은 나무 그림자.

칼로의 작업실에 즐비한 재료.

하루에도 2천500여 명의 사람들이 칼로의 집을 방문한다. 그녀가 남긴 소중한 물건들, 그녀가 그린 초기 작품들 그리고 그녀가 늘 바라보던 무성한 자카란다 나무를 감상하기 위해서다. 그중 60% 정도는 25~40세의 여성이다. 그들은 전 세계 이곳저곳을 여행하는 순례자들로 프리다 칼로와 같은 헤로인을 열망하는 글로벌 세대의 여성들이다. 4월의 어느 맑은 날 이른 저녁, 운 좋게도 나는 방문객 한 사람도 없이 홀로 이 집을 돌아볼 수 있었다. 쾌활한 여주인도 보이지 않았다. 흙벽돌로 두껍게 쌓아올린 벽 덕분에 집 안은 복잡한 도시에서 동떨어진 느낌이 들었고, 블루 하우스 안은 마치 꿈속에 등장한 장소 같았다. 나는 몇 시간 동안 칼로의 옷을 살펴보고, 그녀에 대한 일화를 한참 들은 다음 사람들과 함께 칼로에 대한 이야기를 온종일 정신없이 나누었다. 칼로가 생을 마감한 그리고 내가 서 있던 그 방에서 말이다.

칼로는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18세가 아니라 47세였다. 모르핀과 코냑 그리고 데메롤 없이 견디기 힘들어지면서 칼로는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우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사람들은 결코 죽은 사람들이 아니다.”라고 선언한 여성이었다. 나는 칼로의 정원을 등 뒤에 두고, 분홍색 부겔빌레아 무늬가 화려한 이불 한 장이 펼쳐진 그녀의 방 안에서 평화롭게 서 있었다. 그러다가 칼로가 옳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유골이 담긴 멕시코풍 유골함을 바라보다가 나는 목이 메었다. 그녀가 우상이었다는 생각은 사라졌다. 방문객들이 모두 사라지자 칼로의 방은 다시 이상한 시선에 맞서 싸우던 현실적인 삶의 무게로 가득 찼다. 내 눈에 보이지 않는 저 너머에 갈기갈기 찢어지고 논란의 중심에 있었던, 신성하면서도 모든 이의 비판을 한 몸에 받았던 한 사람이 이곳에 있었다. 바로 칼로가 이곳에 있었다. 그 순간, 고개를 돌리면 칼로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이런 호들갑스러운 광경을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쳐다보면서 벽에 기대 서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감히 그럴 수가 없었다. 기이하면서도 잊히지 않는 순간이었다.

1932년에 아버지가 찍은 칼로의 사진.

칼로의 작업실.

굽 높이가 서로 다른 칼로의 구두.

엘리자베스 페이튼, ‘프리다’, 2005.

‘Viva La Vida’, 1954.

‘인생이여 만세’, 그녀는 부드러운 수박 속살에 이렇게 썼다.

프리다 칼로는 다채로운 모양으로 잘라 놓은 수박을 그려 자신의 잔잔한 삶을 묘사하면서 가장 마지막으로 세 단어를 그림 속에 남겼다. 칼로는 부드러운 수박 속살에 이렇게 썼다. ‘Viva La Vida’, ‘인생이여 만세’란 의미이다. 그녀의 인생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그러나 완전히 다른 차원의 삶을 살았다. 깊이가 있는 삶이었다. 그녀는 삶에 무척 대담했고, 사랑에서도 대담했으며, 자신의 인생 자체도 고통스러우면서 즐거운 것으로 받아들이고 작품에 담을 수 있는 원동력으로 삼았다. 사람들은 왜 이토록 칼로에게 과하게 주목하는 것일까? 사람들도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칼로는 자신을 모방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할 것이다. 본인의 삶 속에서 최대한 자기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창조해야 한다. 직설적이고 혁명적으로, 프리다 칼로처럼. Viva Fri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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