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노에서 외국인이 제일 먼저 배우는 말은 “빌어먹을 밀라노”다. 그 말은 많은 걸 함축한다. 한겨울의 스모그와 도저히 이탈리아라고 믿어지지 않는 추위, 거기에 비가 오다 말다 하는 짧은 봄이 지나면 여름이다. 숨막히는 더위가 시작되는 것이다. 밀라노는 마치 샐러드볼처럼 바람 한 점 들어오지 않는 분지가 된다. 장담컨대, 이탈리아에서 인구당 얼음 소비량이 제일 높은 곳은 시칠리아가 아니라 밀라노다. 시칠리아는 한여름에도 에어컨 없이 지낼 수 있는 방이 흔하지만, 밀라노라면? 노 노! 당신이 여름 밀라노에서 방을 얻고자 하면 제일 먼저 상냥한 웃음을 지으며 호텔 직원에게 “제 방을 봐도 될까요?”라고 묻는 게 좋다. 에어컨이 정상적으로 작동되는지 확인해야 하니까.
이탈리아 전역을 다니면서 얼음을 얻어먹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농담이 아니다. 에이~ 설마 하겠지만, 어느 도시의 역 바에서 콜라를 집어들고 “얼음 좀 주시겠어요?” 해보시라. 못 알아들은 척하거나, 아니면 마뜩잖은 표정으로 금세 녹아버릴 것 같은 작은 얼음 두어 쪽을 석회석 가루가 묻은 잔에 넣어줄 것이다. 그러나 밀라노는 다르다. 진짜 얼음왕국은 북국이 아니라 밀라노다. 얼음을 드리겠습니다, 신사숙녀 여러분. 안 그래도 저희들도 얼음 없이 못 사니까 말입니다.
이탈리아에서 미치게 더우면 우선 바에 간다. 그렇다고 절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키지는 마시라. 리바이스와 타미 힐피거를 입은 직원조차도 인상을 구긴다. 그리고는 혼잣말로 스투피또, 아이스 아메리카노오오, 이런다. 그렇지만 아페롤을 시킨다면 다르다. 아페롤 스프리츠에 얼음을 넉넉히 넣어 웃으며 당신에게 내밀 것이다. 오렌지빛, 알코올 도수 11도, ‘아페롤 정도라면 여자도 술을 마셔도 된다’는 광고 캠페인으로 여성들의 음주 해방권(?)을 획득하게 해준 게 바로 아페롤이다. 보라. 저 색깔이 어디 신사의 음료에 어울리는가. 남자라면 베르무트나 마르티니(마티니)를 마셔야지. 시대가 흘러, 지금은 수염을 멋지게 기른 남자들도 아페롤을 마신다.
아페롤은 겨울 빼고 언제든 마실 수 있다. 한겨울에 어느 정신 나간 인간이 아페롤을 시키겠는가.(보온이 잘 된 파티에서야 물론 아페롤은 최고의 아페리티보다.) 한때 국영항공 알리탈리아는 이코노미석에서도 식사를 주기 전에 아페롤과 캄파리를 실은 ‘은마차’를 끌고 객석을 휘저으며 아페리티보를 권했다. 아페리티보를 모르는 건 야만인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진짜다. 당신이 별 둘이나 셋, 뭐 밀라노의 명가 사들러나 달 페스카토레, 미쉐린 별이 없더라도 고급 레스토랑에서 프란치아코르타나 샴페인, 아니면 아페롤과 캄파리 같은 아페리티보를 주문하지 않는 건 대단한 실례다. 네 명이서 2천 유로짜리 저녁을 먹더라도 아페리티보를 건너뛰면 뭔가 이빨 빠진 체나
(디너)가 되어버린다. 천천히 위를 자극하며, 기분을 고양시키고, 새로운 자리에 적응할 준비를 하는 게 아페리티보의 숨은 의미다.
그렇지만 밀라노 거리의 아페리티보 바에서 그런 격식은 필요 없다. 아페롤이 대박을 친 건 ‘해피아워’(그냥 영어로 그렇게 불렀다)였다. 거리의 칵테일 전도사인 아페리티보 바들에선 10시 이전에 아페롤이나 칵테일을 주문하면 뷔페로 차린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아페롤은 어린 여자아이들이나 소극적인 청년들까지 쉽게 마실 수 있는 술이었고(이 오렌지 음료가 알코올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어?), 그것이 해피아워의 대박, 나아가 아페롤의 ‘초초’ 히트로 이어졌다.
이탈리아에서 미치게 더우면 우선 바에 간다. 그렇다고 절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키지는 마시라. 리바이스와 타미 힐피거를 입은 직원조차도 인상을 구긴다.
그런 아페리티보 바는 북이탈리아의 공통된 유행이기도 하다. 토리노나 파르마, 모데나와 파도바(실은 이 도시가 아페롤의 탄생지다. 하지만 아무도 모른다. 아페롤=밀라노니까)에서도 일종의 싸구려 뷔페가 유행한다. 마요네즈에 버무린 샐러드, 차가운 쌀과 파스타 샐러드, 싸구려 햄이 전부지만 배불리 먹고 칵테일 한 잔 하는 데 12유로면 거저 아닌가. 한국인에게 유명한 리나센테 백화점 옥상의 바에 앉아서 아페롤 스프리츠 한 잔을 시켜보라. 올리브와 칩 두어 쪽을 주면서 15유로는 청구할 것이다. 20유로라고? 그럴지도 모르겠다.
이탈리아는 칵테일을 사랑한다. 그들의 발음으로 ‘콕테일르’다. 소믈리에 시험에는 칵테일이 꼭 출제되며, 카베르네 소비뇽과 메를로 향을 구분 못해서 당한 감점보다 칵테일의 구술시험 감점이 더 클 수도 있다. 칵테일은 와인이 나오는 멋진 식사의 전초로, 어쩌면 최상급 요리에 방점을 찍는다. 와인이야 와이너리에서 만든 걸 개봉할 뿐이지만, 칵테일은 바텐더의 능력으로 얼마든지 ‘트위스트’를 할 수 있는 까닭 때문인 걸까.(그래도 와사비를 넣은 칵테일은 너무 이상하다.)
여름에 더워서 발광할 것 같은 밀라네제들은 몇몇 바에서 더위를 식힌다. 에어컨이 제법 잘 나오고, 열대과일로 만든 칵테일이 제공되며 멋진 남녀도 있다. 파인애플을 속까지 파서 보드카를 넣어 마구 흔들어 미치게 시원하고 자극적인 맛을 만들어내는가 하면, 아바나에서나 먹을 줄 알았던 모히토도 제공된다. 밀라노는 국제도시이고, 모두가 맛있는 칵테일을 사랑한다. 밤새 퍼마셔도 걱정 없다. ‘노투노’라는 이름의 부엉이 야간버스가 다니며, 여차하면 아침 첫 메트로를 타면 되니까. 파티가 두렵다면, 그냥 거리의 바에서 여름 칵테일을 주문해도 좋다. 해가 진 10시쯤, 야외 바에 앉아 아페롤이나 캄파리 소다를 한 잔 시켜라. 조끼를 입은 웨이터가 갓 슬라이스 한 프로슈토와 맛있는 올리브와 크래커와 함께 칵테일을 날라준다. 어지간한 이들은 한 끼를 때울 수 있는 양의 음식이다.밀라노에선 그렇다.한국이 아니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