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파 한 알이 주는 풍성함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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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파 한 알이 주는 풍성함

어떤 채소가 좋아지는 이유, 그것을 오랫동안 관찰해온 시선, 천천히 다듬고 잘라서 요리해 먹는 일. 한 가지 채소를 편애한다는 건 자신만의 소우주를 발견하는 일이다.

BAZAAR BY BAZAAR 2018.04.25

완벽한 양파 한 알을 도마에 올려두면 삶의 의욕이 솟는다. 어쩜 이렇게 생겼을까 싶은 동그란 외양은 살짝 납작해 더욱 매력적이다. 갓 꺼낸 테니스공이나 찰리 브라운의 얼굴, 이슬람 사원의 지붕, 혹은 너무 열심히 자전해버린 지구의 모양.

이제 그 완벽한 형태를 알뜰하게 분할할 차례이다. 뛰어난 수학자라면 이 겹겹의 구를 끝까지 같은 크기의 조각들로 나누는 법을 알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평범하게 반으로 자른 뒤 둥근 돔 모양을 정확히 세로로 네 등분 한다. 그러나 가로로 썰기 시작하자 몇 조각이 미끄러져나가고 슬슬 한 부분이 조잡해지기 시작한다. 유튜브에서 본 셰프는 양파 전체의 매듭에 해당하는 뿌리 부분을 끝까지 남겨두고 썰어보라고 제안한다. 그렇게 하면 눈도 맵지 않고 최대한 버리는 부분 없이 썰 수 있단다. 단, 가로로 썰기 전에 세로로 칼집을 낸 양파를 야구공처럼 감싸 쥐라는데, 야구공을 별로 쥐어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생각보다 꽤 기술이 필요했다.

이제 양파는 기왓장처럼 흩어진 우묵한 네모 조각들이 되었다. 카레나 중국집의 온갖 메뉴, 된장찌개나 북엇국을 상상하게 하는 모양. 자취하던 시절에는 한정된 메뉴만 무수히 해 먹다 감자와 양파 썰기가 많은 요리의 기본이라는 것을 깨닫기도 했다. 무작정 감자와 양파부터 썰기 시작하면 메뉴가 도중에 카레에서 북엇국으로 바뀌어도 큰 무리가 없다는 것을.

이 흰 반투명 채소가 신기한 것은 단순히 달고, 맵고, 고소하다고 요약할 수 없는 묵직한 풍미를 낸다는 점이다. 세상에 고기가 사라져 채소만으로 그 든든함을 채워야 한다면 양파가 유일한 위안 아닐까. 가끔 양파는 육류와 채소의 중간 존재처럼 보인다. 어릴 적 디즈니 동화책으로 보았던 이야기 <단추로 끓인 수프>에서 구두쇠 스크루지는 단추 하나로 끓인 수프 맛이 궁금한 나머지 조카 데이지가 주문한 온갖 추가 재료들을 공수하기 시작한다. 마지막 페이지의 너무나 맛있어 보이던 그 노란 수프와 방 안을 채우던 냄새, 그것이 아마 양파의 향 아니었을까.

한번은 많은 서구인들이 소울 푸드로 꼽는다는 양파 수프가 궁금해 40분 이상 양파를 볶아본 적이 있다. 가늘게 채 썬 양파가 갈색의 국수 가락처럼 변하며 눌어붙을 즈음에는 정말 단추 하나만 넣어도 충분할 것 같은 온갖 풍성한 향이 난다. 많은 요리책들이 양파 볶는 것 하나쯤 잘 연습해두면 큰 도움이 된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양파란 조리하는 시간에 따라 무수한 스펙트럼을 지닌 채소인 것 같다. 얇게 썰어 식초물에 담그면 상큼하고, 투명하게 삶으면 달짝지근하며, 오래 볶으면 스테이크 소스에 가까운 진한 맛을 낸다.

게다가 썬 모양에 따라 얼마나 많은 음식들을 상상하게 하는지…. 링 모양의 양파는 불판 위의 삼겹살부터 베트남 쌀국수, 양파튀김을 생각나게 하고, 잘게 다진 양파는 볶음밥과 샌드위치, 코울슬로를 상상하게 한다.

이제 저녁을 위해 양파 조각들을 든든하게 통에 담아둔다. 도마 위에는 얇은 속껍질 하나만이 남아 있다. 초등학교 때, 이것으로 상피세포라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해 열심히 유리판 위에 고정했었다. 현미경으로 결국 어떤 모양을 보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물티슈처럼 구겨진 채 좀처럼 펴지지 않던 이 속껍질이 기억난다. 슬라이드 글라스 위의 양파 껍질. 이런 게 비틀스의 ‘Glass Onion’인 걸까. ‘또 다른 절반의 삶을 볼 수 있지. 유리 양파를 통해서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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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김 아름,사진|Jang Wooch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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