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
MUST DE CARTIER TANK
김세준 스타일리스트
나는 앤디 워홀의 ‘광팬’이다. 롤렉스 빈티지에서 그칠 뻔했던 빈티지 시계 수집이 지금까지 이어지게 된 것도 앤디 워홀이 등장한 머스트 드 까르띠에 탱크 지면 광고 때문이다. 수트를 입은 채 강아지 한 마리를 안고 있는 그의 패션을 완성해준 건 블랙 수트도, 귀여운 강아지도 아닌 손목 위에 채워진 탱크였다. 시계의 기능적인 면을 넘어 멋을 부여한 탱크의 매력을 알게 된 계기다. 최근에는 도쿄의 ‘투모로 랜드’라는 편집숍에서 두 개의 탱크를 구입했다. 버건디와 네이비의 다이얼이 고혹적이다. 시계가 멈춰도 와인딩을 하지 않았다는 앤디 워홀은 탱크를 “입기 위한 시계”라고 표현했다. 예나 지금이나 ‘입는다’는 말이 어울릴 수 있는 시계는 1970년대의 머스트 드 까르띠에 탱크뿐이다.
1974
ROLEX OYSTERDATE PRECISION
최용빈 포토그래퍼
철없는 스물한 살, 아버지의 롤렉스가 예뻐 보인 나는 PC방에 그 시계를 차고 갔다. 그리고 두고 왔다. 단단히 혼날 각오를 했는데 아버지는 무덤덤하게 넘어가셨다. 오래도록 그 기억을 갖고 있던 나는 2년 전에서야 속죄를 했다. 그때 그 시계와 가장 비슷한 연도의 롤렉스를 여기저기 뒤지며 찾았고, 아버지의 생신선물로 드린 것이다. 새것이 아닌 중고 시계였다. 좋은 시계보다 그때 그 시계를 돌려드리고 싶었던 마음에서였다. 새 시계는 주인을 알 수 없지만, 내 팔에 닿은 흔적이 밴 빈티지 시계야말로 ‘진짜’ 내 시계다. 스크래치가 생기더라도 빈티지가 되어갈 때 시계는 나름의 멋을 갖춘다. 내가 태어나기 전, 그러니까 70년대부터 있었던 아버지의 그 시계를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지금쯤 얼마나 멋있을까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1970s
BULOVA LADIES 14K GOLD
이영 메이크업 아티스트
앨범을 넘기면서 신혼 시절 엄마의 사진을 보다가 엄마 손목에 채워져 있던 이 시계를 발견했다. 눈에 띄는 이 시계가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을까 궁금해서 물었더니, 아버지가 결혼 후 첫 선물로 주신 시계라고 했다. 비록 지금은 녹이 슬고 작동도 안 되지만, 이 시계의 예스러움이 좋아서 세척과 수리를 따로 하지 않았다. 메이크업 아티스트로서 일을 하다 보면 손보다는 팔에 걸치는 액세서리를 선호하게 되는데, 팔찌의 기능을 겸하는 이 빈티지 시계는 언제 어느 때고 매치할 수 있어 유용하다. 디자인은 한없이 고풍스럽지만 젊은 시절 엄마의 아름다움을 간직하는 듯한 기분을 오래도록 즐기고 싶다.
2001
JUNGHANS MAX BILL AUTOMATIC
박세훈 푸드 디자이너
16년 전 뉴욕에서 생활하던 시절, 융한스의 맥스빌 시계를 선물받았다. 처음에는 융한스만의 깔끔하고 심플한 디자인이 마음에 들었는데, 착용하면 할수록 몸에 맞는 편안함이 좋아서 일상적으로 착용하게 되었다. 내가 생각하는 빈티지 시계의 멋은 그런 편안함에 있다. 착용할수록 다른 사람이 아닌 내 몸에 익숙해지는 것, 그리고 조금씩 닳아가면서 튀지 않는 디자인이 되어가는 것. 빈티지의 힘은 그런 편안함에서 비롯된다.
1974
SEIKO KING SEIKO KS HI-BEAT 5625-7113
박태일 스타일리스트 & 매거진 <벨보이> 편집장
어떤 물건이든 빈티지는 나름의 매력을 갖고 있다. 지금은 볼 수 없는 면과 선을 가진 빈티지 시계 역시 마찬가지다. 어떤 이유로든 세상은 변하기 마련이지만, 지나고 나면 아름답지 않은 순간은 없었던 것처럼. 킹 세이코는 세이코의 하이엔드 라인에 속하는 시계다. 세이코가 기계식 시계를 만드는 기술력이 정점에 있던 시절의 시계. 큰 금전적 가치의 시계는 아니지만, 소수의 사람들만 찾는 남다른 ‘멋’을 지닌 시계라 애착이 갔다. 그러던 중, 내가 스타일링을 담당하는 배우 김주혁 씨가 정직한 언론인 역할로 드라마 <아르곤>에 출연하게 됐고, 난 녹화 때마다 이 시계를 채워주었다. 다른 브랜드의 PPL 요청도 꽤 들어왔지만, 화려한 시계는 이 역할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 고사했다. 일본식 시계 특유의 정직하고 검박한 맵시는, 팩트가 우선인 기자 출신 앵커 역할에 잘 맞았다. 물건의 온전한 기능과 가치, 그리고 패션을 대하는 나만의 관점을 다시 한 번 점검하고 돌아보게 해준 시계다.
1980
OMEGA SEAMASTER AUTOMATIC CAL.1020
홍석우 패션 저널리스트
아버지 예물 시계였던 오메가 씨마스터 모델을 집에서 ‘발견’한 건 고등학생 때였다. 이후 기계식 손목시계에 관심이 생겼고 이 정교한 기계 장치에 의미라든지 애정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수백개에서 수천 개에 이르는 부품이 만들어내는 무브먼트가 정교할 때 기계식 시계의 매력은 살아난다. 그리고 오메가는 브랜드의 초창기부터 무브먼트의 혁신에 주력해왔으니, 씨마스터가 섬세한 움직임을 자랑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부모님이 가정을 꾸리고 내가 태어났을 때의 빈티지 오메가 씨마스터를 보면 종종 사들인다. 그렇게 세 개의 오메가 씨마스터를 가지게 되었다.
1970s
ROLEX DATEJUST 6517
박은성 매거진 B 편집장
솔직히 말하면, 시계라는 아이템, 혹은 빈티지에 대해 맹목적 애착이 있는 건 아니다. 시계를 자주 차지 않는 내게 시계를 찬다는 행위는 일종의 ‘성장(盛粧)’을 뜻한다. 요즘 시대의 성장은 수트를 차려입는다거나 진한 메이크업에 높은 하이힐을 신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청바지에 스니커즈를 신은 차림에 반듯한 시계 하나가 손목 위에 올라가 있는 것. 흰 셔츠 소매에 살짝 가려진 듯 보이는 시계의 파란색 크라운 같은 것들은 비격식과 간편함을 환호하는 세상에 대한 우아한 항변처럼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고른 시계가 1970년대에 생산된 롤렉스의 데이트저스트 가죽 밴드 모델이다. 매거진 B 롤렉스 이슈를 만들며 알게 된 세컨드핸드 숍 ‘타임스미스’를 둘러보던 중, 이상할 정도로 의연한 모습에 끌려 구매하게 됐다. 생각해보면, 빈티지의 멋이란 그런게 아닐까. 시간을 관통하며 생명을 이어온 자의 값진 침묵 같은 것. 이 시계를 차는 일보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일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
1981
OMEGA SEAMASTER QUART
정재옥 ‘제인마치’ 대표
엄마의 서랍에 있던 이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단정한 이 시계는 꼭 오랜 세월을 함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후 멋을 아는 나이가 되면서 가끔씩 이 시계를 착용하곤 했다. 그 모습을 본 엄마가 이 시계를 선물로 주셨다. 아끼고 싶은 이유는 하나다. 엄마의 시간과 추억을 고스란히 이어받았다는 느낌이 주는 소중함. 흠이 나서 한 번 가공을 했지만 웬만하면 시계 본래의 모습을 간직하고자 한다. 누군가의 시간과 추억을 고스란히 받은 듯한 그 느낌, 그것이 빈티지의 매력이 아닐까?
1997
MUST DE CARTIER TANK VERMEIL
안정희 스타일리스트
이모에게 두 개의 시계를 받았다. 오메가의 컨스틸레이션과 까르띠에의 머스트 드 까르띠에 버메일이다. 오메가 시계는 1999년 대학교 입학 기념으로, 까르띠에 시계는 이모가 오랜 시간 동안 착용하던 것을 이모부가 돌아가신 이후 주셨다. 이모는 1950년대에 브라질로 이민을 갔다. 타국에서 고생하는 이모를 위해 이모부가 1997년에 선물한 시계가 까르띠에 시계다. 오랜 시간이 지난 시계는 만신창이다. 브랜드의 정품 밴드는 온데간데없고 명동에 위치한 한 시계방에서 대치한 밴드마저 너덜너덜해진 상태. 하지만 당분간 밴드를 교체할 마음이 없다. 오랜 세월의 흔적을 쉽게 지우기가 아쉽기 때문이다.
1987
CHANEL PREMIERE
김원정 ‘졸리꼼부’ 디렉터
대학 졸업선물로 받은 샤넬 프리미에르는 20대부터 지금까지 나의 일상을 함께해온 시계다. 빈티지 시계를 수집하는 취미가 있는 나에게 프리미에르는 수집의 즐거움을 주는 아이템이다. 역사가 긴 브랜드인 만큼, 이 시계 또한 나름의 역사를 살펴보는 재미가 있다. 빈티지 임에도 세련된 디자인은 파리 방돔 광장의 8각형 형태에서 얻은 아이디어다. 루이 14세 때부터 지금까지 각종 럭셔리 브랜드와 최고급 호텔이 앞다투어 입점하는 방돔 광장이 시계의 영감이 되어준 것이다. 2007년에 세라믹 시곗줄의 두 번째 모델이 출시되었는데, 현대적인 느낌의 두 번째 모델보다는 프랑스의 역사를 간직한 첫 번째 모델을 선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