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시계의 시대는 끝난 걸까? 작은 케이스가 다시 주목받는 이유.
손목 위 풍경이 달라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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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MALL WATCH
큰 시계의 시대는 끝난 걸까. 손목 위 풍경이 달라지고 있다. 작은 케이스가 다시 주목받는 이유.
1953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칼리버 101’을 장착한 예거 르쿨트르의 초소형 워치를 착용하고 대관식에 참석했다.
어느 촬영장에서였다. 한 워치 브랜드의 20대 남성 앰배서더가 손목에 시계를 채우다 말고 고개를 갸웃했다. 시계 케이스가 셔츠 커프스 아래로 살짝 튀어나왔다. “이거, 너무 커 보이지 않아?” 몇 년 전만 해도 이런 고민은 거의 없었다. 패션 화보에서 시계는 존재감 있는 액세서리였다. 44mm 다이버 워치도 자연스럽게 데일리 스타일링에 들어갔다. 큰 케이스가 곧 힘이었다. 요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체인 브레이슬릿, 미니멀한 반지, 과장 없는 실루엣. 전반적인 취향이 가벼워지면서 손목 위 균형도 달라졌다. 소매 아래 자연스럽게 들어가는 시계, 손목 위에서 조용히 존재하는 작은 케이스가 더 세련돼 보이기 시작했다. 젠더 플루이드 트렌드 역시 이 변화에 한몫한다. 까르띠에 앰배서더인 뷔가 공항 등지에서 ‘팬더’ 스몰(30×23mm)을 착용한 모습이 종종 포착됐고, 티모시 샬라메는 미니멀한 화이트 탱크톱에 작은 화이트 골드 워치를 매치해 특유의 간결한 인상을 완성했다. 타일러 더 크리에이터는 러그만큼이나 좁은 케이스 워치에 그린 컬러 포인트를 더해 독특한 패션 위트를 드러냈다.
패셔니스타들의 손목이 30mm 초반에서 20mm 후반대 케이스를 향하는 사이, 시장 역시 이런 변화를 감지한 듯하다. 최근 몇 년 사이 메종들이 작은 케이스 라인업을 다시 확장하고 있다. 오메가는 지난해 ‘아쿠아 테라’ 컬렉션에 역대 가장 작은 30mm 모델을 추가했다. 오데마 피게는 2024년 ‘로열 오크’ 라인에 23mm 미니 사이즈를 선보였다. 또 지난 2월 에르메스는 시그너처 모델 ‘케이프 코드’를 27×20mm 미니 버전으로 변주했다는 소식을 따끈따끈하게 전했다. 케이스를 줄이며 곡선 미학을 한층 강조한 것. 큰 시계의 시대가 끝났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취향이 조금씩 작아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체인 브레이슬릿, 미니멀한 반지, 과장 없는 실루엣. 전반적인 취향이 가벼워지면서 손목 위 균형도 달라졌다. 소매 아래 자연스럽게 들어가는 시계, 손목 위에서 조용히 존재하는 작은 케이스가 더 세련돼 보이기 시작했다.
사실 시계 역사에서 작은 사이즈는 낯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오랫동안 표준에 가까웠다. 회중시계를 대신해 손목시계가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만 해도 대부분 시계는 지금보다 훨씬 작았다. 당시 사용자는 군인, 철도 노동자, 조종사처럼 손을 쓰지 않고도 시간을 즉시 확인해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손목시계는 패션 아이템이 아니라 실용적인 도구였다. 제1차세계대전 당시 군인들이 회중시계에 스트랩을 달아 손목에 착용한 ‘트렌치 워치’ 역시 대부분 28~34mm였다. 이후 1920~1940년대 손목시계가 일상화되면서 등장한 남성 드레스 워치는 30~34mm 범위에 머물렀다. 당시 기준으로는 35mm만 돼도 꽤 큰 시계였다. 시계 제작자들이 경쟁하던 방향도 지금과는 조금 달랐다. 특히 여성 시계가 단순한 시간 측정 도구를 넘어 주얼리로 인식되면서 케이스를 키우기보다는 더 작고 정교하게 만드는 것이 기술력의 상징이 됐다. 그 흐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1929년에 등장한다. 예거 르쿨트르가 개발한 ‘칼리버 101’이다. 길이 14×4.8mm, 두께 3.4mm, 무게 약 1g. 총 98개 부품으로 이루어진 이 기계식 무브먼트는 지금 기준으로도 놀라울 만큼 작다. 이 무브먼트는 이후 다양한 브레이슬릿 워치에 사용됐다. 1953년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프랑스 정부에게 선물받았던 대관식 시계에도 탑재됐다. 당시 워치메이커들이 얼마나 ‘작은 기술’을 향해 경쟁했는지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다.
시계가 본격적으로 커지기 시작한 건 제2차세계대전 이후다. 1950~1960년대 다이버 워치와 파일럿 워치 같은 스포츠 모델이 등장하면서다. 이 시계들은 이전 드레스 워치보다 확실히 컸다. 이유는 기능 때문. 방수 성능을 강화하고 야광 인덱스와 회전 베젤을 넣어야 했다. 1970년대에는 오데마 피게 ‘로열 오크’, ‘점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 파텍 필립 ‘노틸러스 3700’과 같은 스포츠 럭셔리 시대가 열렸다. 시계는 단순한 도구를 넘어 스타일 오브제로 자리 잡았다. 손목 위 또렷한 존재감이 중요해졌고, 시계는 곧 권위와 취향을 드러내는 상징이 됐다. 이 흐름은 2000년대 정점을 찍는다. 파네라이와 위블로 같은 브랜드가 굵직한 디자인으로 인기를 얻으며 40mm가 넘는 케이스가 남성 시계의 기본처럼 자리 잡았다.
최근 몇 년 사이 다시 작은 시계가 언급되기 시작한 건 일종의 반작용에 가깝다. 빈티지 워치 시장이 커지고, 과장된 로고와 실루엣 대신 절제된 디자인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젠더리스 스타일이 확산되면서 남녀 간 사이즈 구분도 이전만큼 엄격하지 않다. 과거라면 여성용으로 분류됐을 케이스가 이제는 자연스럽게 남성 스타일링에도 등장한다. 특히 한 브랜드 관계자는 “최근 시계를 주얼리처럼 활용하는 스타일링이 대중화됐다”고 말했다. 세계 최대 시계 거래 플랫폼 크로노24(Chrono 24) 역시 비슷한 분석을 내놓았다. 최근 컬렉터들의 관심이 기능 중심의 툴 워치에서 보다 작고 세련된 디자인의 시계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 이 흐름은 신제품에서도 드러난다. 2023년 까르띠에 ‘베누아 뱅글’ 워치(24.2×31mm), 2025년 샤넬 ‘프리미에르 갈롱’(19.7×15.2mm)은 브레이슬릿처럼 착용하는 디자인으로 주목받았다. “최근에는 다이아몬드가 세팅된 (작은) 워치를 찾는 남성 고객도 늘었다”고 그가 덧붙였다. 시계를 주얼리의 연장선으로 바라보는 감각이 분명히 확장되고 있다는 신호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작은 케이스에 다이아몬드나 젬스톤을 세팅한 워치를 낮에도 레이어링하는 스타일이 늘면서 이브닝 액세서리로 여겨지던 칵테일 워치도 데이웨어로 확장되고 있다. 럭셔리 리세일 플랫폼 리얼리얼(The RealReal)에 따르면 2024~25년 ‘칵테일 워치’ 검색량은 29% 증가했다. 특히 불가리 ‘세르펜티’, 까르띠에 ‘팬더’, ‘베누아’ 모델의 검색량이 각각 34%, 30%, 25% 상승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칵테일 워치는 단순히 이브닝 장식이 아니라, 주얼리를 통해 시계 세계에 입문하는 새로운 컬렉터에게 가장 직관적인 출발점으로 분석되고 있다. 같은 기간 20mm 이하의 워치 수요도 늘었다. 샤넬 ‘프리미에르’와 에르메스 ‘켈리’ 워치가 대표적이다. 빈티지 시장 역시 비슷한 흐름을 보여준다. 리세일 플랫폼 베스티에르 콜렉티브(Vestiaire Collective)에서 까르띠에 ‘탱크’의 평균 거래 가격은 2020년 이후 약 1300달러에서 2600달러로 두 배 상승했다.
크로노24는 이어 올해 케이스가 작은 시계가 대거 등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렇다고 소형 워치가 과거처럼 시장의 중심으로 돌아왔다고 말하기는 아직 이르다. 지난 20여 년 동안 형성된 ‘빅 워치’ 문화가 워낙 강력했기 때문이다. 시계 산업은 다른 패션 카테고리보다 변화 속도가 느리다. 케이스 사이즈 하나가 바뀌는 데에도 긴 시간이 필요하다. 브랜드 입장에서도 가장 안정적인 판매를 보장하는 사이즈를 쉽게 포기하긴 어렵다. 그럼에도 취향의 변화 방향은 분명하다. 과장된 크기 대신 균형 잡힌 비율을 찾는 움직임, 시계를 주얼리처럼 레이어링하는 스타일링, 젠더 구분이 흐려진 손목 위 풍경까지. 다음 달 제네바에서 열리는 워치스앤원더스가 그 흐름을 확인할 수 있는 무대다. 손목 위 스케일이 정말 다시 줄어들기 시작했는지, 아직은 조용한 예고편에 불과한지. <바자> 역시 스위스 제네바 현장에서 그 답을 확인할 예정이다.
Credit
- 사진/ Getty Images, © Audemars Piguet, Chanel Watch, Jaeger LeCoultre, Van Cleef & Arpels
- 디자인/ 진문주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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