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주의 심리적 풍경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기억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흔히 “떠오른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잠재되어 있던 무언가가 솟구쳐 오른다는 이 단어는 기억이 가진 유동적, 선별적 성격을 드러낸다. 과거를 곱씹을 때, 머릿속을 유영하던 기억 조각들은 불완전한 상태로 들어 올려진다. 이진주는 무수히 부유하는 이 기억들을 붙잡아 화면에 옮겨낸다. 그의 그림 속, 현실세계와 같은 무대에서 불가해한 코드들을 마주하자면 우리는 어느덧 의미 해석에 골몰하게 된다. 그러나 작가는 자신의 작품 속 이미지를 이해하고 오해할 가능성을 모두 열어두었다. 선명하면서도 불분명한 채로 남겨진 우리 기억처럼. | 전시회,이진주

2014년 뉴욕에서의 개인전 이후 3년 만의 개인전이다. 이번 아라리오갤러리 전시를 준비하는 사이 새롭게 겪은 감정이나 떠올린 기억, 혹은 변화된 개인사가 있었나? 전반적 작업이 ‘기억’에 관한 것이다 보니, 개인적 경험과 삶의 변화가 작업에 많이 반영될 것 같다. 2014년 세월호 참사가 있었고, 이듬해 아버지께서 돌아가셨고, 세계 곳곳에서 테러 소식이 전해졌다. 파주에서 살면서 로드킬 당한 동물들을 이따금 마주쳤다. 개인적인 일이기도 하지만 누구나 겪은, 혹은 겪을 일들이기도 하다. 늘 그래왔지만 이 세계는 마주할수록 더욱 비극적으로 인식된다. 내가 이 부조리하고 불편한 세계를 이해하는 방법은 외면하지 않고 마주하는 것이다. 불가해하고 아름다운 삶을 관찰한 기록이 드로잉이 되고, 작업으로 펼쳐진다.전작에서 자주 등장하던 스타킹 신은 반라의 여인이 최근 전면에 잘 등장하지 않거나 숨어 있는 것 같다. 내러티브를 이끌던 강렬한 인물 형상이 사라지자 상황의 모호함이 더 강조되어 보인다. 이런 작업 경향의 변화가 나타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스타킹을 신은 반라의 여인은 나의 심리적 자화상이기도 하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도 그 자신이 될 수 있기를 바랐다. 유약하면서도 단단히 죄어지는 스타킹을 신고 현실의 뉘앙스가 강한 머리카락과 옷이 배제된 인물은 화면의 사건을 이끌고 있었다. 그런데 강렬한 인물의 인상 때문인지 나의 의도보다 훨씬 고정된 의미로 관객이 해석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았다. 물론 나는 작가의 의도를 이해하는 것도 오해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일반적인 사람들, 아이, 동물, 흔적만 가득한 징후, 신체의 파편 등 어떤 작품에서는 더 많은 오독을, 열린 해석을 원한다.‘짙은’(2014), ‘지난 여름’(2015)이나 ‘내가 본 것’(2017)의 경우 배경이 생략되어 매우 파편적이다. 따라서 보는 이가 맥락을 이해하기 더 어려울 수도 있을 것 같다.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보는 이가 꼭 맥락을 이해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저 나는 날 선 촉수같이 예민하게 관찰될 때 대상의 국면이 드러난다고 느낀다. 아주 세밀하지만 전체의 구조와 어긋난 부분을 일그러뜨리는 것에서 나오는 현실에 대해 인지하고 있다. 억지로 이어 붙여 전체를 떠올릴 수 없기 때문에 내버려두거나, 스스로 잘라버려 파편화하는 부분들의 기록이 작업이 된다.나는 ‘땅’을 당신의 작업에 중요한 요소로 보았다. 하늘이 종종 여백으로 생략되는 것과 달리 땅은 주로 속까지 단단하게 고정된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나. 땅이 구체적으로 표현되지 않은 경우에도 그림의 소재들은 바닥 투시에 맞춰 중력을 착실하게 지키고 있다. 덕분에 모호한 상황이 벌어지는 이 꿈같은 공간이 아주 비현실은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을 준다. 당신의 땅에 대한 해석이 흥미롭다. 나도 정확한 이유는 잘 모르겠다. 내가 그려내는 인물이나 사물, 풍경들은 나에게 직관적인 이미지로 먼저 다가온다. 나는 그것을 드로잉으로 기록하고 오랫동안 나의 시선을 끄는 것들을 모아 화면 안에서 전체를 이룬다. 다만 당신이 말한 것처럼 ‘이 꿈같은 공간이 아주 비현실은 아닌 것 같다’는 분위기를 나 역시 견지하려고 한다. 초현실주의 작업처럼 대상들이 일반적인 자신의 자리와 크기를 벗어날 때 더는 익숙해지지 않으며, 생경하고 특별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다. 하지만 과도한 상상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정말 일어날 법한 그런 위치에서 기시감을 주길 원한다. 이 땅에서 벌어지는 현실적이면서도 심리적인 풍경을 생각한다. 의외로 어떤 기이한 풍경들은 실제 우리 주변에서 발견되지 않나. 공원에 버려진 운동화, 교회 장의자, 가지치기를 당한 채 가지 끝이 끈으로 묶여서 돌로 고정된 나무, 생각지도 못한 곳에 숨어 있는 아이들처럼. 늘 일상 속에서는 기묘한 일들이 일어났다 사라지곤 한다.화면의 시점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대다수 그림의 시점이 45도 위에서 내려다본 것 같은 각도로 그려져 있다. 덕분에 관객이 작품을 관찰할 때에도, 화면 안의 세계를 굽어보는 절대자가 된 느낌을 받는다. 당신의 작품은 ‘기억’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고 알고 있는데, 나는 한 개인이 가진 기억은 대부분 1인칭 주인공 시점, 즉 비교적 수평적인 시점일 것으로 생각한다. 개인적 ‘기억’을 구현하는 데 어떻게 이런 ‘절대자와 같은 시선’을 시점으로 사용하게 되었나? 나 역시 분명히 알 수는 없지만, 작품 속 시선은 아마도 기억을 바라보는 나의 태도에서 기인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개별적인 기억의 장면, 장면들은 1인칭 시점으로 떠오른다. 하지만 어떤 찰나의 장면이 아니라, 맥락을 같이하는 여러 장면과 상상·은유가 함께할 때, 전체를 내려다보고 조망하는 것 같은 태도를 보이게 되는 것 같다. 불가해함을 알아내고자 들여다보는 시선이 부감 시점으로 표현되는 것 같기도 하다.기억, 이야기, 알레고리, 의식과 무의식 같은 것들은 이미 많은 비평가가 이진주의 작품을 해석해온 키워드이다. 이 중 본인의 작업에 한계를 만드는 정의가 있다고 생각하나? 내 작업의 한계를 만드는 요인이 있다면 그것은 스스로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작가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세계의 질문이나 해석을 작품으로 표현하고 있다. 나 역시 내가 알고 싶고 이해하고 싶은 세계의 일부가 있는데, 그 과정을 이진주라는 프리즘을 거쳐서 드러내는 것이 내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 프리즘은 시대와 현실에 따라 자연스럽게 변하는 것이 마땅한데, 익숙하고 편한 기존의 방식만을 고집한다면 그것이 자신의 한계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최근 작품에서 더 추가되거나 변경된 이슈가 있는가? 혹은 후에 더 생각을 발전시켜보고 싶은 문제가 있다면? 삶에 대한, 그 삶의 전반을 이루고 실존의 바탕을 이루는 기억에 대한 질문과 의문이 여전히 가득하다. 여기에서 기억은 단편적인 의미가 아닌 앙리 베르그송의 에서 그랬듯 물질과 대치되며 정신활동의 근간이 되는 의미에서의 기억을 의미한다. 나는 그 질문을 어디에 서서 던지고 있는지 늘 견지하고자 한다. 삶의 근원이나 기억에 대한 질문을 현실의 이 땅이 아닌 기억 속의 세계에 서서 던지고 있다면 자기독백적 대답으로 가득차버릴 것이다. 작업을 하면서 나는 항상 그 한계와 확장의 경계에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 삶에 대한 애정만큼 죽음과 허망함에 관한 생각이 깊어졌다. 죽음이나 아이러니한 삶을 정지된 화면 속에서 시간성으로 담아내는 작업을 생각하고 있다. 여러 공간을 동시에 인지하는 주체의 감각을 회화적으로 깊이 있게 표현하고도 싶다.최근 많은 작가가 로봇은 물론 인터랙티브, VR에 이르는 매체를 미술에 도입하고 있지 않나. 이런 상황에서 회화 작업을 지속한다는 것, 즉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본인에게 어떤 의미인가? 미술과 과학, 새로운 기술을 이용한 미술은 나에게도 무척 흥미롭다. 하지만 작가로서 내가 다루기 가장 자유롭고 숙련된 일은 ‘그리기’일 것이다. 새로운 방식을 익혀 이야기를 펼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뒤집어 생각해본다. 나에게 영상이나 설치의 방식으로 이미지가 처음 떠올려지는 순간이 있는데, 그것을 회화적으로 구현하는 것은 불가능한지 말이다. 같은 재료를 가지고 표현해도 주체가 누구인지에 따라, 같은 주체라 할지라도 순간의 감각에 따라 크게 변하는 것이 회화라고 생각한다. 주체가 가진 감각의 고유성을 드러낼 수 있는 매체다. 그런 회화의 매력이 내겐 오히려 가치 있게 다가온다.*이진주의 개인전은 갤러리 아라리오 서울에서 3월 30일부터 5월 7일까지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