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도 디자인이 되나요?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계단은 오르는 것이 아니라 끌어 내리려는 지구의 힘에 맞선 인간의 팽팽한 도전이다. 우리의 지친 눈과 마음을 정화하는 이 시대의 계단. | 디자인,계단,공공 디자인,건축

"저는 계단을 오릅니다.” 전 뉴욕 시장 마이클 블룸버그가 어퍼 이스트 사이드에 있는 자신의 5층짜리 타운하우스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는다며 당당하게 내뱉은 말이다. 2013년 당시 시장이던 블룸버그는 돌연 비만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대용량 탄산 음료 규제와 칼로리 표기 명시에 이어 그의 엉뚱한 손가락은 ‘계단’을 향하는데.... 뉴욕의 건물들은 운동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잘못’ 지어졌다며 건물 신축 및 개축 시 걷기에 좋은 계단 디자인을 반드시 포함할 것을 의무화하겠다고 나선 것. 물론 임기가 일 년도 안 남은 상황에서 급조된 구호가 가리키는 계단은 실용적 축조물로서의 단편적인 계단에 불과했다. 언제부터 계단이 ‘웰빙 바람’을 앞세워 부활을 엿보는 불편하기만 한 애물단지가 되었단 말인가.우리는 1875년 건축가 샤를 가르니에(Charles Garnier)의 파리 오페라 극장을 외관보다는 Y자의 우아한 계단 한 장면으로 기억하고, 꿈과 현실이 분간이 안 되는 그림 같은 계단이 없는 1930년대 버스비 버클리(Busby Berkeley)의 공연은 상상할 수 없는데 말이다. 계단은 당대를 풍미하던 철학과 예술, 기술의 척도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무엇보다 이를 지은 디자이너와 건축가들에게 상상력을 부여한다. 오늘날 범람하는 고층 건물과 표준화된 산업 시설 속에서도 디자이너의 서드 아이(Third Eye)와 미감, 문제 해결 능력이 어우러져 우리의 지친 눈과 마음을 정화하는 이 시대의 계단들이 있다.영국의 현존하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라고 불리는 통 큰 디자이너 토마스 헤더윅. 런던의 빨간 2층 버스 디자인으로 잘 알려진 그는 특히 공공 디자인에 관심이 많다. 그런 그가 2018년 완공을 앞둔 뉴욕 파 웨스트 사이드(Far West Side)의 새로운 핫 플레이스 건물의 핵심 모티프로 삼은 것은 바로 계단이다. 정글짐 혹은 벌집 같아 보이는 계단이 곧 건물인 이 건축물의 이름은 선박(Vessel). 바구니 모양의 청동 구조물 안에 1백54개의 독립적 계단을 서로 연결시킨 결과 총 16층 높이를 2천5백여 개 계단을 딛고 오르내려 도달할 수 있도록 디자인했다. “모든 건물이 눈길을 사로잡는 뉴욕이라는 대도시에서 새로운 랜드마크를 의뢰 받았을 때, 저는 단순히 바라보는 건물 그 이상이어야겠다고 생각했고, 모두가 사용하고 만지고 경험을 할 수 있는 무엇이기를 바랐어요. 층층이 수백 개 계단을 따라 내려가는 고대 인도의 우물에서 영감을 받아 무수한 계단을 건물의 핵심 요소로 삼게 된 이유죠.” 헤더윅은 말한다. 2차원의 평면 위에 3차원의 공간을 표현한 에셔의 그림, 혹은 영화 에도 나온 일명 ‘펜로즈의 계단’을 연상시키는 헤더윅의 ‘선박’은 80개의 널찍한 계단참을 전망 테라스로 활용해 도시를 조망할 수 있는 80개의 방식을 제안할 예정이라고.이처럼 공공 건축물로서 사용자의 인터랙션으로 완성되는 ‘계단이 곧 건물’인 작품은 방콕에서 동쪽으로 60마일 떨어진 뱅 센(Bang Saen) 해안에도 있다. 그래픽을 입체적으로 조각해놓은 듯한 빨간색 콘크리트 타워를 구성하는 것은 역시 다양한 형태의 계단이다. 모든 층마다 테라스와 계단이 다른 가지의 구조물과 연결되어 꼭대기로 향하는 다양한 통로를 만든다. 숨바꼭질을 하기에 제격이다. 건축물의 이름도 ‘미로(Labyrinth)’다. 이는 태국 건설자재 회사 시암(Siam) 시멘트 그룹이 창립 1백 주년을 기념해 디자인 회사 슈퍼머신 스튜디오에게 의뢰해 고안해낸 것으로, 공공에게 24시간 열린 공간이기를 지향한다. “이 프로젝트는 오늘날 일반적인 놀이터에 질문을 던지며 시작되었어요. 어린이들은 신나고 적극적으로 즐기는 반면 어른들은 수동적으로 그저 바라만 보는 놀이터에 대해 말이죠. 적절한 은신처를 제공해주는 계단이라는 구조에서 부모님과 아이들이 숨박꼭질을 하며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를 바랐어요.” 슈퍼머신 스튜디오 대표 잭은 말한다.에 나오는 바로 그 벨기에 북부 플랜더스에는 이런 전망대, 아니 계단도 있다. 그림 같은 풍광이 펼쳐진 들판에 녹이 슨 매력적인 오렌지 컬러의 캔틸레버식 블루이베르그 타워(Vlooyberg Tower)가 중력에 진중하게 도전하듯 하늘을 향해 피어 있다. 과거 4m 높이의 나무로 된 일반적인 망루가 방화로 파손된 후 이 지역 특산물인 레드브라운 컬러의 철광석을 사용해 비, 바람, 공기 등에 막강히 견딜 수 있도록 고안했다. 디자인을 맡은 엔지니어링 스튜디오 클로즈 투 더 본(Close to the Bone)은 나선형의 일반적인 계단을 설계하는 대신 길이 11.5m, 무게 13톤의 강철 계단이 드라마틱하게 하늘로 뻗기 위한 힘의 분포도를 계산하는 데 공을 들였다. 그 결과 더 이상 간결할 수 없는 계단이자 금방이라도 하늘로 사뿐히 걸어 올라갈 듯한 전망대가 탄생했다. 너르고 푸른 목초지 위에 조각품처럼.조각품으로서 살포시 내려앉은 또 하나의 계단은 히로시마 해안에 근접한 로맨틱한 웨딩 채플에 구현됐다. 포르르 말아 위에서 떨군 리본끈이 땅 위에 나풀거리는 듯한 로맨틱한 외관은 촘촘한 나선형 계단이 있어 가능했다. 두 개의 계단은 서로를 지지하기 위해 몇 개의 지점에서 꼬여 있는데 이는 결혼의 의미를 상징한다. 도쿄의 건축사무소 히로시 나카무라 & NAP의 건축가 히로시 나카무라는 그 의미에 대해 덧붙인다. “부부의 연을 맺은 두 사람이 결국 하나가 되는 과정처럼 두 개의 나선형 계단은 꼬임을 반복하며 꼭대기까지 하나의 리본으로 자연스레 연결됩니다. 신랑과 신부는 각자의 계단으로 옥상을 향해 올라와 하나의 계단으로 다시 내려오죠.” 결혼의 상징성을 고스란히 체화한 계단이 아닐 수 없다.한편, 지난 2016년 5월 중순부터 한 달가량 네덜란드 로테르담 중앙역 앞에는 거대한 레드 카펫에 가까운 계단이 등장해 전 세계 디자인 애호가들의 이목을 끌었다. 로테르담은 2차 세계대전 폭격 이후 1백 년도 채 안 돼 현대적이고 특색 있는 건물로 생명력을 재건해가는 도시다. 도시 재건 75주년을 맞이한 문화 행사이자 캠페인 ‘로테르담, 도시를 찬양하다’를 기념한 이 설치물의 핵심은 2차 세계대전 후 처음으로 지어진 로테르담 제1의 건물 그루트 헨델스허바우(Groot Handelsgebouw)로 인도하는 1백80개로 이뤄진 거대한 비계(飛階) 구조를 그대로 노출시킨, 계단이었다. 59m의 긴 계단을 올라가면 29m의 건물 루프톱에 도달해 말 그대로 도시를 찬양할 만한 로테르담의 근사한 뷰를 볼 수 있게 했다. 역동적으로 꾸준히 재건 중이라는 현대성의 산물로 계단을 선택한 건축사무소 MVRDV의 비니 마스(Winy Maas)는 “네덜란드 재건 역사에 있어 최고의 건물로 꼽히는 그루트 헨델스허바우야말로 새로운 로테르담을 이야기하는 상징으로 적절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저는 이 계단을 통해 대중에게 말을 겁니다.”라고 강조한다.계단의 본질은 층간이동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때에 따라 위로 올라간다는 것은 더 나은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기도 했기에 계단 위와 아래가 삶과 죽음을 가르기도 했다. 달리 보면 결국 계단은 오르는 것이 아니라 끌어 내리려는 지구의 힘에 맞선 인간의 팽팽한 도전이었다. 보기 좋게 승승장구하듯 쭉 뻗은 계단은 인간과 자연이 합의한 최고의 균형점인지도, 디자이너와 건축가가 빠져든 영감의 원천이 바로 이 점에 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