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men in Philosophy ②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잡지를 만들면서 결국 전하고 싶은 얘기는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다양한 관점에서 나온 답이었다. 그런 무겁고 거대한 물음에 일말의 힌트를 주는 건 언제나 멋진 여자들이었다. 미적인 방면에서든,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문제에서든, 철학적인 차원에서든 잠시나마 빛살 같은 로망의 순간을 선사했던 여자는 누구인가. <바자>가 사랑하는 여자들이 들려준 내밀하고 뜻깊은 고백. | 악마는프라다를입는다,샤를로트페리앙,헬렌토마스

의 미란다와 앤디개봉한 지 꼭 10년이 된 이 영화는 비교적 적은 예산으로 만든 여성 영화로서는 이례적인 흥행 수입을 내며 앤 해서웨이에게는 톱 급으로 발돋움하는 계기를, 최고의 배우 메릴 스트립에게는 흥행을 보장하는 배우라는 타이틀을 안겨주었다. 이 영화가 그렇게 크나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건 할리우드 영화다운 스토리와 화려한 패션 스타일 덕분이기도 하지만 이 시대 일하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는 딜레마를 제법 진지하게 다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데이비드 프랭클 감독이 “코미디적인 잔혹함과 진실된 슬픔의 경계에서 스케이트를 타고 미끄러진다”고 표현한 (메릴 스트립이 연기한) 미란다 프레슬리를 보면서 많은 위로를 받았다. 왜 일하는 여자는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를 포기해야만 하는 걸까? 미란다는 물론 앤디 삭스(앤 해서웨이)도 일의 성공을 얻기 위해 우정과 사랑을 잃을 뻔했다. 그러나 동일한 딜레마가 남자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프로덕트 마케터였던 내가 우연한 계기에 엔터테인먼트 업계에 들어온 지 10년. 이 재능 많은 배우들이 꼭 1등이 되지는 못해도 좋으니 배우 일로 밥은 먹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일념 하에 회사를 이끌어 오면서 맞닥뜨렸던 말로 다 못할 편견들. 어떤 사안에 대해 얘기해보자고 하면 발전을 위한 논쟁이라고 생각하는 대신 그저 피곤하게만 여기고, 공정한 일 처리는 타협할 줄 모른다고 괜한 트집을 잡기 일쑤. 이성적 판단에 의한 결정을 가지고 성격적 특성이라고 넘겨짚는 일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조진웅은 나를 대변하고 이하늬는 분노의 공감을 해준다. 이제훈과 권율은 머리를 싸매고 해결책을 함께 고민한다. 하지만 일로써 나의 진심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앞으로도 녹록지만은 않을 거다. 이 영화로부터 몇 년 후 앤 해서웨이가 판타지에 가까운 멋진 CEO로 등장하는 영화 을 보면서 다짐했다. 쉽지 않은 길이지만 앞으로도 지금처럼 내 자신을 믿고 잘해보자고. 희망적인 건 요즘 일을 하면서 감독, 제작자 등 에서의 로버트 드니로 같은 동료들을 곧잘 만난다는 것. 그들의 응원과 도움 덕분에 일과 행복 둘 중 어느 하나도 포기하지 않고 추구할 수 있어 다행이다. 이소영(사람 엔터테인먼트 대표)의 스칼렛 오하라어릴 적 읽은 책들은 도덕관념과 인생관에 크나큰 영향력을 미치며 지금까지도 인생의 책으로 남아 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엄마가 즐겨 읽으시던 의 별책부록으로 세계문학 시리즈가 나오던 시기가 있었다. 등 (이 시리즈의 의도였겠지만) 격정적 운명 앞에 홀로 선 여자 주인공의 삶을 그린 고전문학을 그때 다 읽었다.(의 영향으로 배우인 여자 주인공이 즐겨 마시던 칼바도스를 지금도 좋아한다.)특히 상하 권으로 나뉜 는 스칼렛 오하라라는 맹렬한 여성상을 내게 선물했고 그 후로 인생의 마디마다 그녀라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해보곤 한다. 남북전쟁이 끝난 후 다시 고향의 대농장으로 돌아갔을 때 스칼렛은 감자 한 알 나지 않는 가문 땅에서 흙먼지를 맞으며 다짐한다. 다시는 절대로 굶지 않겠다고. 너무나 원초적인 결의임에도 그 장면이 참으로 숭고해 보여 가슴이 쿵쾅거렸다. 스칼렛 오하라는 어떤 상황에서든 살아남는다. 그것에 집중한다.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치밀한 계획을 갖춘 채 도전하고 결과에 대해서는 느긋하고 담대하게 받아들일 줄 안다. 남의 남자를 빼앗거나 하는 손가락질 받을 일을 했어도 스칼렛은 지난 일에 대해서는 후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애초에 남들의 기준에 따라 자신의 선택을 결정하지 않는다. 스칼렛이 커튼으로 만든 드레스를 입었던 너무나 유명한 에피소드가 그녀가 살아가는 방식 그 자체를 의미한다. 돈이 없어 커튼으로 만든 드레스를 입었어도 그녀의 애티튜드는 한없이 당당하다. 어떤 옷이든 그 스타일 안에서 편안함과 자신감을 느낀다면 그만이다. 우아한 기품은 옷의 값어치가 아닌 애티튜드에서 나오는 거니까.대학에 가기 위한 관문, 유학을 가기로 한 결단, 원하는 곳에 입사하기 위해 노력, 코스메틱 분야에서 패션 필드로 이동하기로 한 선택, 그 밖의 숱한 갈림길에서 스칼렛 오하라는 100%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 내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오직 그것뿐이라고 속삭여주었고 그녀의 조언 덕분에 나는 낮에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일하고 밤에는 마음 편히 잠들 수 있었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테니까. 정화경(신세계 자주 MD 담당 상무) 샤를로트 페리앙르 코르뷔지에의 셰즈 롱 바스큘랑(Chaise Longue Basculante) 의자 위에 다리를 높이 들어올린 자세로 누워 있는 여자의 사진을 본다. 스틸 소재 롱 체어의 우아한 곡선 디자인은 물론이고 치마에 구두를 신은 채 이보다 더 편할 수 없는 듯한 옆얼굴의 표정만으로도 시크함을 물씬 풍기는 여자, 샤를로트 페리앙이 대변하는 자유롭고 에지 있는 라이프스타일이 이 한 장의 사진에 모두 담겨 있다.20세기를 대표하는 프랑스 여성 건축가이자 디자이너로 1927년부터 1937년까지 르 코르뷔지에, 피에르 잔느레(Pierre Jeanneret)와 협업하며 페리앙은 자신의 시그너처인 스틸 재료를 사용해 모던 가구와 인테리어 디자인을 완성했다. 1940년대 초 서구의 건축가로서는 최초로 일본에 초대 받은 페리앙은 디자인 계발을 위한 자문 역할로 유럽의 디자인과 문화를 일본에 소개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동양적인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어 이후 그녀의 작업에 새로운 영감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코르뷔지에의 대표작 빌라 라 로슈(Villa la Roche)를 위해 페리앙이 디자인한 암 체어, 데크 체어는 모던 디자인의 상징적인 마스터피스가 되었으며, 이후의 작업들로 생애 내내 눈부신 업적을 이뤘다.프랑스 유학을 떠나 몇 년 지나지 않았던 2005년, 퐁피두 센터에서 샤를로트 페리앙 회고전이 열렸는데 그때 본 인터뷰 영상 속 그녀의 모습이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온몸에서 풍겨 나오는 힘찬 에너지와 형형한 눈빛은 결코 한 세기를 살아온 90세 넘은 노인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끊임없이 샘솟는 비전, 삶에 대한 열정과 에너지는 오랜 세월 그녀를 이토록 근사하게 지탱했으리라. 페리앙은 1927년, 르 코르뷔지에와의 첫 만남을 떠올리며 얘기를 이어나갔다. “여긴 쿠션에 브로드리나 하는 곳이 아니라”며 박대를 당했지만 얼마 후 살롱 전시에서 자신의 작품을 본 코르뷔지에가 서둘러 사과하고 함께 작업하기를 권하면서 협업하게 됐다는 이야기 말이다.(프랑스에서는 1945년이 되어서야 최초로 여성들이 투표권을 갖게 됐다는 점을 감안해보면 1920년대에 젊은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어땠을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한 세기를 선두한 성공한 커리어우먼. 그녀가 상상하고 만드는 디자인 오브제는 장식하고 놓여지며 공간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삶과 사람이 주제가 되는 지극히 인간적인 것들이다. 그래서 그녀에게는 늘 ’삶’ 자체가 화두이며, 자신의 삶은 끊임없는 호기심, 비전, 열정으로 가득하다고 말했다. 나는 페리앙의 탁월한 업적에 찬사를 보내는 동시에 삶을 대하는 자세에 크나큰 영감을 받았음을 밝히고 싶다.또 한 장의 사진을 본다. 자연을 사랑하고 스포츠를 좋아해 주말이면 늘 산과 바다를 향해 떠났던 페리앙이 알프스와 같은 거대한 자연 앞에 토플리스로 서 있다. 이 모습은 그 자체로 ‘운명에 맡긴’ 삶이 아닌 스스로 선택하고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인생의 눈부신 상징이다. 마윤정(건축가)헬렌 토마스지난 몇 년간 늘 그래왔듯 취재원에게서 답을 기다리던 참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보낸 것은 여느 질문과는 달랐다. 나 자신에 대한 물음이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내가 이미 저지른 일에 대한 이해를 구하는 부탁이기도 했다. 마침내 답을 얻게 됐을 때는 뛸 듯이 기뻤다. 지난 세월 내 삶을 괴롭혀온 수수께끼를 마침내 풀게 돼서였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내 인생을 지탱해줄 응원의 메시지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2009년 초의 일이었다.이 일이 있기 6개월 전쯤 나는 몸담고 있던 언론사에서 쫓겨났다. 그 일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지나칠 수도 있었던 일에서 비롯됐다. 이전 해 봄 서울의 광장은 온통 인파와 촛불 일색이었다. 온라인 부서로 입사해 문화부에 파견돼 있던 초짜 기자로, 당시 나는 마음을 열고 그 광경을 들여다볼 여력조차 없었다. 소속 언론사의 논조가 지나치게 일방적이라는 생각이 점차 들기 시작할 무렵 내 마음에는 적잖은 갈등이 일었다.그때 떠오른 것이 헬렌 토마스(Helen Thomas)였다. 50년간 백악관 출입기자로 활동한 미 언론계의 대모이자 민주주의의 상징인 인물이었다. 그녀가 당시로부터 2년 전쯤 미국진보센터 초청으로 저널리즘 전공 대학생들에게 한 강의 내용이었다. 그녀는 최근 미국 기자들의 병폐를 설명하며 이렇게 역설했다. “(기자가 되면) 길거리로 나가세요. 그저 브리핑 룸에만 앉아 있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그의 주장을 떠올리면서 밤새도록 시위대를 쫓아 거리를 쏘다녔다. 기사 때문이 아니었다. 소속 언론사의 묘사가 진실인지를 스스로 확인해보기 위해서였다. 불행하게도 아니었다. 그렇게 결론 내린 그날은 밤새도록 폭음했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서 깬 다음 날 새벽, 난 난생 처음 소속 조직에 항명의 글을 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당시에는 오로지 수십 년 뒤 잠에서 깨어나 자책하며 머리를 쥐어뜯고 싶지 않다는 충동 하나뿐이었다. 실직 후 거리의 언론인으로 떠돌다, 간신히 언론 산업 관련 지에 인터뷰 기사를 연재하게 됐다. 그때 맨 처음 떠올린 인터뷰 대상이 바로 헬렌 토마스였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구글을 이 잡듯 검색해 그녀의 에이전트 연락처를 확보했다. 몇 차례 인터뷰 요청 끝에 그녀의 일정과 건강 상태를 고려해 네 개의 질문만 허락 받았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그녀가 답을 해올지는 의문이었다. 제3세계 풋내기가 던진 거친 질문에 89세의 위대한 언론인이 답해야 할 의무가 대체 뭐가 있을까?놀랍게도 그녀는 성실하고 열정적으로 답해왔다. 그 가운데는 언론인의 길을 걷겠다는 나에 대한 응원 메시지도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평생 누구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권력을 지켜봤으면서도, 권력과 언제나 팽팽한 긴장 관계를 유지했던 그의 언론관이었다. “저는 1961년부터 미국의 역사를 다뤄온 것을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역사는 언제나 백악관에서 만들어졌죠. 저는 온 미국민을 대표해 거친(Tough) 질문을 던진다고 믿습니다. 모든 (백악관) 리더들은 그 미국민들에게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원칙에 걸맞게 그녀는 부시 대통령에게 테러와의 전쟁과 이라크 침공에 대해 불쾌할 정도로 직설적으로 이유를 캐물었다. 그 때문에 백악관 출입기자 만찬에 초청을 받지 못하기도 했다. 오바마 대통령을 지지했음을 밝히고도, 하루 만에 그 밀월 관계가 끝날 것이라고 말한 적도 있다.내 인생에 몇 안 되는 그 또렷한 순간 이후로 7년여가 흘렀다. 3년 전 외신을 통해 헬렌 토마스의 부음을 접했다. 나는 다시 언론계로 돌아가지 못했다. 운명에 이끌리듯 예기치 않게 외식업을 시작했다. 종사하는 분야는 달라졌어도 나는 그녀를 잊지 않고 있다. 그녀는 당시의 인터뷰를 통해, 또는 93년간의 전 생애를 통해 내게 가르쳤다. 하는 일이 무엇이든 원칙을 갖고 임하라. 원칙에 부합하면 현실적 계산쯤은 잊어도 그만이다. 그것이 너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것이었다. 그 교훈 아래 내 삶도, 장사도 훨씬 단순명료해졌다.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나만의 좌우명을 가졌다. ‘규칙도, 두려움도 없이(No Rules, No Fear)’. 2007년 할리우드 영화 과 기반이 된 카렌 파울러의 동명 소설에 등장하는 인상적인 대사다. 혼자 세상에 맞서려는 여성에게 필요한 담대함을 간결하게 표현했다는 생각에서 소중히 간직해왔다. 헬렌 토마스와의 인터뷰 이후에는 이 좌우명에 한 가지가 덧붙었다. 너무 거창한 것 같아서 드러내지는 않으려고 애쓰지만. 바로 ‘원칙을 갖고(With Creed)’다. 그녀 덕에 원칙과 관련된 문제라면 싸움을 두려워하지 않고, 원칙과 무관하다면 타협을 꺼리지 않는 이가 되려 무진 애쓰고 있다. 이여영(주식회사 월향 대표)마담 르로아프랑스인이라면 목숨을 거는 바캉스 철에도 새하얀 옷에 알 굵은 진주 목걸이를 하고 포도밭을 지켜 마치 부르고뉴를 수호하는 하얀 새 같은 느낌을 자아내는 마담 르로아의 와인은 다른 어떤 와인과도 궤를 달리하는 섬세하고 미려한 풍미를 지닌다. 하지만 업계 소식에 조금이라도 밝은 사람이 느끼는 르로아 여사의 실상은 많이, 그것도 아주 많이 다르다. 눈, 코, 입, 귀 어디 하나 둥근 구석이 없는 얼굴로 엘프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그녀를 좋아하는 사람은 그녀의 고향 부르고뉴 전체에서 단 한 명밖에 없었다고 알려진다. 하지만 그 단 한 명이었던 남편 앙리 르로아(Henri Leroy)가 2004년 타계한 뒤 세상과 그녀 혼자만의 싸움이 시작되었다.태어난 지 15분 만에 입술에 와인을 대고, 세 살 때부터 와인을 마시기 시작했다는 일화와 함께 천재적 미각, 테이스팅 능력으로 추앙 받던 그녀가 혈혈단신 앙팡 테리블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로마네 콩티와의 결별부터다. 선친에게 받은 50% 지분을 가지고서도 이사회 발언권을 만장일치로 빼앗길 때 르로아의 딸 역시 찬성표를 던진 것은 호사가들의 안줏거리가 되고 있다. 아니 도대체 왜!사실 농약을 쓰지 않는 유기농법을 한층 뛰어넘는 ‘바이오 다이내믹 농법’을 부르고뉴 최초로 적용해 월력에 따라 농사를 짓는 등의 완벽주의자적 기행은 되려 명품 와인 업계에서는 환영을 받는 모습이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르로아가 ‘공공의 마녀’ 취급을 받게 된 건, 남성성이 장악한 와인 업계에서 여성이라면 응당 지녀야 할 치유와 모성애의 미덕을 포기해서는 아닐까? 농가와 장기계약을 맺는 것이 통상적인 ‘메종’ 와인의 경우에도 그녀는 매해 결실의 품질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패를 던지지 않는다. 그러나 꼭 소유하고 싶은 포도가 있을 때는 누구보다도 비싼 값을 불러 독차지를 하고, 천정부지로 솟는 와인 값에 대해 자신은 와인을 파는 것이 아니라 지키기 위해 가격을 정한다는 말로 공분을 산다. 융통성과 자비란 걸 찾을 수 없는 그녀, 이렇게 이웃 공동체에 무심한 그녀에게 도대체 무슨 철학이 있단 말인가? 질문에 답하자면 이른바 와인이 하나의 재화가치로 취급 받으며 치열한 장사의 논리로 장악되고 있는 와인 업계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소비자들이 와인을 마시며 상상하(고 싶어하)는 와인 메이커 특유의 장인정신은 이제 찾아보기 극히 드물고 수요에 답하기 위한 공급의 규모와 형태가 정해지는 경우가 다반사다. 하지만 르로아 여사는 오직 자신만이 납득할 수 있는 고도의 기준을 숨막히는 완벽주의에 대한 고집으로 묵묵히 지켜나가고 있는 것이다.원만하지도, 만만하지도 않은 여자 르로아. 완벽하지 못한 세상에서 완벽하고 싶어하는 상처 받은 새가 주는 와인이 과연 누군가를 치유할 수 있을까 질문을 던져본다. 아니 그런데 여자가 꼭 누군가를 치유해야 하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여자, 르로아가 만든 그 와인의 절대적인 완벽함이 또 하나의 세계를 잉태했으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 아닌가. 김은지(까브드뱅 마케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