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미술계를 향한 세 개의 픽션
‘미술관과 갤러리가 소설의 배경이 된다.’ 세 명의 소설가들에게 단출한 한 문장을 건넸다. 그러자 돌아온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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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CTIONS FROM
미술관과 갤러리는 과장된 판타지 없이도 기어코 비일상을 경험하게 만드는 장소다. 그곳에서 세 명의 소설가가 포착한 현대미술계를 향한 세 개의 픽션.
그러니까 닥치고 티셔츠나 사라고
이희주
파운드리 서울에서 열린 윤미류 개인전 «Do Wetlands Scare You?» 전시 전경.
매시브 어택의 머천다이즈 티셔츠를 사러 뜨거운 천막으로 들어가, 미류는 솔드아웃 소식을 듣고 메시지를 보냈다.
[희주 미안 ㅠㅠ 다 팔렸고 재입고 없대.]
페스티벌 2일 차였고 희주는 대답했다.
[어쩔 수 없지. ㅠㅠ 잘 놀다 와!]
말은 그랬으나 좋아하는 사람에게 선물하려 했기에 아쉬웠는데…. 생각해보니 이상했다. 가지 못한 페스티벌의 티셔츠를 선물해준다는 게 의미 있나? 됐다. 쓸데없이 비싸기만 하고. 나는 자본주의에 반대하기 위해 육만오천원짜리 티셔츠를 사지 않은 거다. 여우가 담장 안의 신 포도를 보고 투덜대듯 희주는 아쉬움을 달래며 미련을 가진 티셔츠를 떠올렸다.
희주는 잠시 일본에 산 적이 있고 그해 부지런히 미술관에 다녔다. 나리타공항을 이용하는 관광객이면 한 번은 들렸을 법한 우에노의 국립서양미술관, 도쿄도미술관과 <너의 이름은>에 나온 도쿄신미술관은 제집 드나들 듯했다. 지금은 없어진 하라미술관도 무척 좋아했고, 십 년 입은 갭 후드의 소매에 난 작은 구멍을 만지작대며 긴장한 티를 숨긴 뒤 긴자의 에르메스 갤러리에도 들어갔고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소규모 갤러리도 많이 다녔다. 백육십 엔이 아까워 신주쿠에서 이케부쿠로의 집까지 걸어 다니던 때였으나 미술관에 가는 돈은 아끼지 않았다. 졸업을 유예하던 때라 대학생 요금으로 볼 수 있기도 했고. 이십 대 후반에 티켓 부스에서 학생증을 내미는 일이 민망하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뭐 어쩔 거야! 외국인인데.
테라다 아트 콤플렉스 안에 막 개관한 anomaly에도 그해 처음 갔다. 현대미술 그룹인 Chim↑Pom의 전시를 보고 아, 이런 식의 아티스트 그룹에 쿼터제하듯 여자 딱 하나만 넣어주는 거, 그것도 매력적이고 살짝 미친 느낌의? 말하자면 시이나 링고과의 여자를 집어넣는 거 좀 짜증나는 일이다, 생각하면서도 직관적이고 재기발랄한 작업에 마음이 갔다. 그룹은 2022년에 세계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있는 미술관으로도 알려진 모리미술관에서 개인전을 했고, 코로나 시기라 아쉽다, 하늘길이 나 있었으면 갔을 텐데,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몇 년 뒤 모리미술관의 선물가게에서 Chim↑Pom의 개인전 티셔츠를 만났다. 이게 남아 있다니! Chim↑Pom의 초기작이자 대표작 중 하나인, 시부야에 돌아다니는 쥐를 피카츄처럼 노랗게 색칠한 작품에서 따온 ‘we are super rat’이라고 적힌 티셔츠였는데 번쩍 집어 들어 가슴팍에 댔다가 근원적인 의문에 도달했다. 보지도 않은 전시의 티셔츠를 사는 일이 가능한가?
가능하지 않은 거 같다. 희주는 티셔츠를 내려놓았다. 이젠 직장인이고 신주쿠에서 이케부쿠로로 이동할 때 백육십 엔을 내고 야마노테선을 타기는 하나 보지 않은 전시의 티셔츠에 돈을 쓸 순 없었다. 게다가 사천구백오십 엔이나 하는 걸! 그렇게 생각하니 더 근원적인 의문이 들었다. 그러면 세금 떼면 이백만원도 못 받는 월급쟁이 생활을 하면서 해외의 미술관을 돌아다니는 건 말이 되나? 삼백만원을 벌면 괜찮을까? 사백만원은? 연봉이 일억원이 넘으면 미술관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나? 그런데 미술 작품을 제대로 보는 사람은 누가 있지? 소수의 엘리트 관람객?
희주의 주변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다. 예술학교를 나오지 않은 희주였으나 겸업 작가가 되면서 예술학교 출신의 친구들이 많이 생겼다. 희주가 이전에 알고 지내던 사람들,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아이돌을 쫓아다니는 애들은 멀어지고 쟤 좀 똑똑하고 재밌네? 싶은 애들과 어울리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어떤 모임에서는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가 모두 서울대를 나왔다는 걸 깨닫고 기겁하기도 했다. 미술관에서 잘 차려입은 사람들 사이에 서 있다 보면 자신이 저 중 하나로 보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이상해지곤 했다. 누가 미술관에 들어갈 수 있고, 누가 들어갈 수 없는가?
돈만 내면 입장은 가능하기에 희주는 루브르도 갔다. 출장을 갔다가 일을 마치고 엄마와 함께 관광했다. 해풍에 맞아 젖은 옷자락을 휘날리는 니케도 보고, 손등이 통통한 카라바조의 집시와 청년도 보고, 비욘세의 뮤직비디오에 나온 메두사호의 뗏목도 보았다. 선물가게에서 유니클로와 마틴 파가 컬래버한 티셔츠를 엄마와 커플로 맞췄다. 본 전시의 기념품을 사는 건 응당한 일이니 24.99유로짜리 티셔츠 두 벌과 선물용 양말을 사고, 면세도 받고, 이른 더위가 찾아온 스위스와 이탈리아에서 아주 쏠쏠하게 입었다. 입으면서, 마틴 파는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어쨌거나 우습게 여기는 작업을 하는데 그 작업물을 엄마에게 입혔다는 사실에 죄책감이 들었다. 그러니까 내가 투어리즘의 일환으로 루브르를 네 시간 만에 돌고 나와 이 티셔츠를 사는 건 자조적인 농담이 섞인 행동이지만 들어간 미술관의 개수가 열 개가 안 될 (그리고 그걸 전부 나와 함께한) 엄마에게 입히는 건 나쁜 일 같다고 생각했다.
물론 희주도 사람들 엿멕이는 작품 좋아하고, 서울시립미술관에 요하나 헤드바의 작품이 전시되는 과정에서 공공미술관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민원을 받았을 때 발끈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미술관 안과 밖을 오갈 때면 기분이 나빴다. 미술관 안을 걷는 것이 조바심을 불러일으킨다면 그 바깥으로 나가는 편이 낫지 않나? 미술이 소수의 배만 불리면서 가는 것이라면 그건 누구의 손에 쥐어져 있는가? 미술관에서 무엇을 팔 수 있고 팔 수 없는가? 당연히 예술은 배워야 하고 한낮에 에르메스 백을 끼고 갤러리 투어를 하는 미술사학 석사 출신의 사모님들이 미디어아트에 찍힌 사람들보다 미술을 더 잘 알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화면 속의 빈곤 공동체와 아 가난, 뭐 그런 거네. 중얼거리고 지나가는 사람들 중에 누구와 더 가까워야 하는지 또한 자명하다고 희주는 믿었다. 아니? 자명하도록 빼앗고 싶다. 티셔츠에 새겨서라도. 65000원과 4950엔과 24.99유로 너머에서.
희주의 친구 윤미류는 회화 작가이고 그가 프로젝트 하나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각종 지원금을 찾아 전전긍긍해야 한다. 해외에 판권을 팔아 번 돈으로 미술에 좀 더 가까워진 희주는 윤미류를 미술 안으로 쑤셔 넣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건 미류가 서울대에서 애들을 가르치기도 한다는 것과 상관없는, 말하자면 지속가능성의 문제다. 한남동의 구찌 건물과 은평구의 5평짜리 예술인 주택에서. 열 명 중 여덟 명의 부모가 달에 천만원 이상 버는 고소득자인 학생들이 찬 강의실과 전주의 엄마 집 사이에서. 화이트 큐브의 안과 밖에서 정신분열을 일으키지 않았으면 한다는 뜻이다. 미류는 살아 있는 여자를 사진으로 찍어 거대하게, 아주 거대하게 그리는 작업을 하고 지금 미류가 그리고 있는 건 백육십육 센치인 미류와 백칠십일 센치인 희주보다도 한참 커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그려야 하는 희주 그림이다. 여신처럼 거대한 자기 상 앞에서 희주는 저 그림은 내가 사도 좋고 다른 사람이 사도 좋다고 생각했다. 뭐가 되었든 희주가 원하는 건 그 그림이 아주 비싼 값에 팔리는 일이다.
윤미류는 2027년 3월에 금호미술관에서 개인전을 할 예정이다. 전시의 메인은 희주를 그린 그림이다. 미류에게 희주는 물었다.
굿즈 팔 거야?
미류는 대답했다. 당연하지. 굿즈가 없으면 미술관에 왜 가. 닥치고 티셔츠나 사라고 해.
이희주는 <성소년> <나의 천사> <크리미(널)러브> 등의 소설을 썼다. 부끄러워 비밀로 하고 있으나 실은 은밀한 미술 애호가다. 금호미술관의 문을 윤미류와 함께 닫게 되어 기쁘다고 생각한다.
하룻밤
함윤이
신라시대 금관과 허리띠를 전시 중인 국립중앙박물관 전경.
그녀에게는 남들이 기묘하다고 부를 법한 취미 혹은 특기가 있는데 그것은 미술관이나 박물관 즉 뮤지엄museum으로 번역되는 장소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일이다.
그녀의 이런 취미 또는 특기가 만들어진 데에는 구체적인 원인이 있다. 그것은 그녀가 어릴 적 읽은 미국의 어린이책으로, 가출한 어린 남매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숨어들며 벌어지는 모험담을 담고 있다. 어린 남매는 미술관을 터전 삼아 지내며 전시관에서 발견한 천사 조각상의 비밀을 풀어나간다.** 이 책을 처음으로 읽은 날 어린 그녀는 세상 어딘가에 아름다움을 모아 만든(심지어 거대한) 장소가 있으며 그 장소에 제 몸을 (말 그대로) 맡길 수 있음을 깨달았고 이 사실에 넋이 나간 채 며칠을 지냈다.
어느 정도 몸과 처세술이 자라났을 무렵부터 그녀는 이 취미 그리고 특기를 적극적으로 개발했다. 뮤지엄에서 하룻밤을 지새우는 일은 요령만 익히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때로는 임시직으로 야간 경비직에 취직했고 때로는 뒷거래로 직원 복장을 구해 잠입했다. 물론 가장 자주 쓰는 방법은 어린 시절 읽은 책에 등장하듯 야간 점검이 끝나기 직전까지 어느 틈새에 숨어 있는 것이었다. 화장실이나 수유실, 기념품숍 창고 등 그녀가 이용한 공간은 매우 다양하지만, 그녀의 원활한 취미 지속을 위해 여기선 자세한 사실을 숨겨두겠다.
인생의 한 시기, 그녀는 많고 많은 관館에서 밤을 보냈다. 실상 쌈짓돈을 모아 유럽을 돌아다니던 시절의 그녀는 대부분의 일출을 이러한 뮤지엄들에서 맞이했다. 오르세 뮤지엄의 야간 개장 시간에 들어가 버티다 시계탑 유리면으로 스미는 새벽빛에 어렴풋이 드러난, <활을 쏘는 헤라클레스>와 <북극곰>을 지켜보다 잠든 날이 시작이었다. 이후 그녀는 루브르 박물관과 내셔널 갤러리 또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과 베를린 박물관 섬에 놓인 다섯 개 박물관을 순회하며 여러 밤을 지새웠다. 그녀가 특히 잠들기 좋아하는 자리는 조각상들 사이였는데 훗날 딸에게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조각들 사이에서 잠이 깨면 머릿속이 부스스하고 눈도 흐릿해서 잠시 내가 어디 있나 헷갈리거든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면 나무처럼 거대한 무언가가 잔뜩 서 있는 거야 나무는 나무인데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양들이고 자세히 보면 표정도 있고 몸짓도 있어 눈을 두 번 깜빡이고 나면 아 나 여기 조각들과 함께 있지 하는 마음이 들고….
이 외에도 그녀는 렘브란트의 <야경>이 걸린 홀(거기서 잠든 밤 그녀는 램프를 든 민병 대원들이 자신을 감시하는 꿈을 꾸었다)에서의 한잠이나 세인즈버리관의 성화聖畫를 마주한 쪽잠(눈을 뜨자마자 금빛에 둘러싸인 조반니의 성모와 베르메호의 성 미카엘이 서 있어 그녀는 매우 오래된 세계에 떨어진 듯한 감각에 휩싸였다)도 인상적인 기억으로 꼽았다.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올 즈음 그녀는 그간의 행각이 지나치게 편협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 편협함이 아름다움의 세계를 동경하던 이들이 흔히 품는 태도라는 사실도 받아들였다. 유년기부터 그녀의 마음속에 아득한 고향인 양 자리 잡은 아름다움은 날개 달린 흰 대리석이나 유화로 그린 정원 같은, 서구의 형상들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인류의 전성기 같던 시절 세계의 중심에서 만들어진 작품들 사이에서 잠들고 깨는 것은 축제에서 살아가는 듯한 황홀경을 주었다. 그러나 축제 바깥에도 수많은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녀는 차차 알아가는 중이었고 따라서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앉아 다음 밤들의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그녀가 새 목표로 삼은 한국의 박물관은 수요일 밤마다 9시까지 열렸다. 그녀는 미리 사둔 청소용 유니폼을 챙겨 입고 창고에 쭈그려 앉은 채 박물관 지도를 외웠다. 그녀가 묵을 곳은 지상 1층부터 3층에 이르는 상설 전시관으로 선사, 고대, 중·근세관처럼 시기별로 분류된 장소와 중국관 일본관 등 지역별로 나눈 장소들이 있었다. 그녀는 2000년 전의 금관과 토우 사이에서 잠든 자신을 그리며 침낭이 든 가방을 챙겼다. 슬금슬금 문밖으로 나섰을 때 박물관은 나직한 어둠과 고요 속에 잠겨 있었다.
그날 그녀는 순찰하는 척 그러나 실은 산책에 가까운 태도로 터벅터벅 걸어 고대의 토기와 무기들을 구경하였고 대륙 곳곳에서 모아온 신의 얼굴과 여자들의 몸을 응시했다. 지난 세기 베를린올림픽에서 우승한 마라토너가 노고 끝에 되찾은 청동 투구 앞에 웅크려 앉아 있기도 했다. 그 순간 그녀가 앞둔 아름다움들은 이제껏 그녀와 함께 밤을 보낸 아름다움처럼 축제의 낯빛을 띠지는 않았다. 눈앞의 아름다움은 조금 더 투박했고 어쩌면 무뚝뚝했으며 그녀가 상상할 수 없는 어느 밤에서 출발하여 이곳에 다다른 느낌을 주었다. 그 감각이 매우 낯설어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날 그녀는 유물과 작품들 속에서 잠드는 대신 진실한 야간 경비원처럼 밤새 박물관을 돌았다. 괴이한 돌들만 모아 그린 서화나 눈을 내리깔고 한 발을 무릎 위에 걸친 불상 앞에 서서 자신 이전에 만들어진 아름다움과 자신 이후에 찾아올 아름다움을 생각했다. 그중 어떤 것은 뮤지엄이나 축제에서 시작할 수도 있겠지만 분명 더 많은 아름다움은 그 바깥에서, 누구도 예측할 수 없이 뒤엉킨 불가사의에서 탄생했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박물관을 반 바퀴 돈 그녀는 누가 언제 만들었는지 모르나 분명히 무수한 탄생과 죽음 이전부터 존재했을, 무릎 꿇고 앉은 토우들을 마주했다. 유리 진열장에 희미하게 비친 낯을 보며 그녀는 오랜만에 그 책을, 집을 버리고 나와 미술관에서 잠들고 깨던 어린 남매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왜 그토록 그 이야기가 나를 찔렀을까 묻다가 잊고 있던 이야기의 결말부를 기억해 냈다. 주인공 소녀는 천사 조각상의 비밀을 알아낸 다음 만족스러운 표정을 띤 채 미술관을 나와 집으로 돌아간다. 다만 돌아온 소녀는 떠나기 전의 소녀와 같지 않다. 이제 그 애는 미술관에 숨어들고 갖은 규칙을 어겼던 사람이자 그림과 조각 사이에서 잠들고 옷을 세탁하며 밥을 챙겨 먹은 시간을 통과한 사람으로 살아간다. 결말 이후의 소녀는 미술관 바깥의 일상으로 돌아가지만 언제든 미술관에 그리고 아름다움과 독대하는 밤에 뛰어들 수도 있다.
그녀는 누군가에 헌신하듯 무릎 꿇은 토우와 유리에 비친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우리는 더 많은 안팎을 드나들게 될 거야 우리는 앞으로 많은 낮과 밤에 아름다움과 맞닿을 거야 하고 그녀는 속삭였고 몇 해가 지난 후 딸에게 이 일화를 전했다. 그날 밤을 묘사한 이후 어머니가 내게 덧붙인 말이 여태껏 선명하다. 얘, 그러니까 우리의 첫만남은 아주 기묘한 밤에 시작된 거야….
** <클로디아의 비밀>, E.L 코닉스버그 지음.
함윤이는 소설집 <자개장의 용도>와 장편소설 <정전> 등을 썼다.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변주되며 곳곳으로 퍼져나가는 과정에 관심이 많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불상들이 모여 앉은 전시실이다.
이름 붙일 수 없는 색
민병훈
이토 자쿠추, <White Phoenix and Old Pine Tree>, 1766. Found in the collection of Museum of the Imperial Collections, Tokyo. (Photo by Fine Art Images/Heritage Images/Getty Images)
그는 니시주하초메역에 내려 계단을 오른다. 지상에 발을 내딛으며 잠시 눈을 감고 여름을 감각한다. 이글거리는 햇빛, 오호츠크해를 건너온 바람, 도로 위 아지렁이 같은 것들. 한국으로 돌아갈 항공권을 끊지 않고 여행을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났다.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오랜 시간 자신도 모를 무언가에 점점 지쳐가는 중이었다. 그것을 직접 확인하고 싶다고 그는 지난밤 갑작스레 결심했다. 그는 지금 미술관으로 향하는 중이다.
그는 종종 미술관에 전시된 작품 앞에서 생의 궤적을 바꾼 적이 있다. 빈 벨베데레 미술관에 있는 클림프의 <키스>를 보다가 오랜 연인과 헤어질 결심을 했다. 베를린 베르구르엔 미술관에서는 자코메티의 <고양이>를 보며 긴 세월 미워했던 친구를 용서하기로 마음먹었다. 우연이라는 현상이 자신의 삶에 관여하는 게 영 내키지 않았지만 그는 어쩌면 그런 계기를 만들기 위해 미술관을 찾는 걸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물었다. 너는 미술관에서 무엇을 이해하느냐고. 그는 답했다. 아무것도 이해하지 않아.
미술관 옆 공원에서 까마귀가 운다. 그는 삿포로에 도착한 날 호텔 옆 주차장에서 덩치가 큰 까마귀를 마주쳤다. 혹시 자신을 따라온 건 아닐까 걸음을 멈추고 자세히 바라본다.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까마귀와 가까워질수록 모종의 기대감을 갖는다. 까마귀는 달아나지 않는다. 까마귀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마치 그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처럼 깃털이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까지 그를 허락한다. 그는 표지에 까마귀가 그려진 노트를 샀던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린다. 학교를 마치면 두 눈이 노랗게 칠해진 까마귀를 보며 노트를 펼쳤다. 뭔가를 그리거나 글자를 적은 뒤 침대에 누우면 자꾸 꿈속에서 까만 깃털을 가지고 놀았다. 깃털 끝에 물감을 찍어 부모님의 얼굴을 그리거나 겨드랑이에 꽂고 허공을 날아다니는 시늉을 했다. 꿈에서 깰 때마다 꿈으로 미끄러진 감각이 생생해 한동안 검고 아득한 장면에 머물러 있었다.
까마귀는 이제 미술관 담벼락을 향해 날아간다. 그는 홋카이도립 근대미술관 현판이 새겨진 표지석을 보며 볼에 흐르는 땀을 닦는다. 녹음이 우거진 정원에 들어서기 전 미술관 주위를 살핀다. 노란 모자를 쓴 아이들이 줄을 맞춰 입구로 향한다. 카메라를 든 사람이 아이들을 담기 위해 셔터를 누른다. 야외에 전시된 조각상을 구경하던 노인이 누군가에게 손짓한다. 조경 장비를 챙기는 정원사의 어깨 너머로 햇빛에 반짝이는 미술관 창문이 보인다.
그는 문을 열고 미술관 로비에 들어선다. 전시 일정을 미리 알아보지 않아 한동안 벽에 걸린 전시 현수막과 포스터를 바라본다. 낯선 타국의 언어를 눈으로 좇으며 행간과 여백을 채운다. 전시는 두 종류로 나뉘었는데 그가 알아볼 수 있는 건 일층 기획전시실의 «금각/은각 쇼코쿠지전»이 전부다.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 매표소로 향한다. 먼저 줄을 선 노인이 아직 일행이 오지 않았다며 자리를 양보한다. 노인의 티셔츠가 온통 땀으로 젖어 있다. 그는 손사래를 치며 적극적으로 거절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노인의 일행을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매표소 직원이 그를 부른다. 그는 할 수 없이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노인을 지나친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갈색으로 칠해진 대리석 바닥에서 시끄러운 마찰음이 들린다. 접지력이 좋은 등산화를 신은 탓이라고, 밑창이 가벼운 신발을 신을 걸 그랬다고 그는 후회한다. 직원이 카드와 영수증을 돌려주며 팸플릿에 적힌 주의사항을 알려주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아마도 교토에 있는 금각사와 은각사에 대한 전시겠지. 두 사찰이 갖는 역사적 배경과 건축 목적을 설명하는 걸까. 그는 팸플릿을 주머니에 넣으며 두 장소에 다녀왔던 기억을 떠올린다. 금각사는 지금은 소식을 알 수 없는 연인과 함께 갔다.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금각사>를 주제로 길게 대화하다가 사진을 남기지 않았다. 그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몇 년 뒤 혼자 간 은각사는 코가 시릴 정도로 날이 추웠다. 단체 관광객들이 경내를 점령하다시피 누벼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어디가 더 좋았는지 묻는 질문에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전시실 입구에서 QR 코드를 스캔한다. 곧바로 조명이 어두워지며 외부와 분리되는, 그 짧고 희미한 단절의 순간을 느끼기 위해 미술관에 온다고 그는 생각한다. 그는 미술관에서만 모든 걸 비약하고 함축한다. 마치 그런 허락을 받은 것처럼, 공간이 그것을 종용한 것처럼.
그는 몇 점의 작품을 스치듯 지나친다. 스님과 산, 강물과 구름이 열 장으로 나뉘어 그려져 있다. 그림에 담긴 이야기를 상상한다. 조금 더 걸어가 도자기에 묻은 얼룩의 무늬를 가까이 바라본다. 전시가 끝나갈 즈음, 그는 전시실 한가운데에 있는 의자에 앉는다. 미술관을 나가면 무엇을 할지, 내일은 어디에 갈지 계획한다. 그러다 그는 문득 누군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강한 시선을 느낀다. 느낌에 그치는 것이 아닌 실제로 어떤 기척이 있다. 그는 정면을 바라본다. 위아래로 기다란 그림이 있다. 다른 관람객들의 시선을 끌지 못한 그림이 유리 너머에 있다. 그는 의자에서 일어난다. 자신의 상체만 한 크기의 새가 그려진 수묵화, 이토 자쿠추의 <봉황도>라고 설명되어 있다. 그는 검은색에서 흰색으로, 흰색에서 검은색으로 이어지는, 영원과 찰나의 뒤척임을 경험한다. 붓으로 한 점 찍은 봉황의 눈에서 강렬한 색이 느껴진다.
그는 전시실을 나선다. 기념품을 파는 숍을 지나쳐 계단으로 향한다. 이층에 마련된 휴식 공간에 사람들이 앉아 있다. 모두들 소파에 앉아 통유리 너머 푸른 녹음을 바라보고 있다. 통유리를 통해 넘어온 햇살이 교사가 나눠준 사탕을 받아든 아이들을 비춘다. 그는 이제 비로소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한다.
민병훈은 소설집 <재구성> <겨울에 대한 감각>과 산문집 <지나간 계절 모두, 북해도> 등을 썼다. 여행을 가면 그 도시에 있는 미술관에 꼭 방문하는 편이다. 그때마다 기념품을 하나씩 사는데, 최근엔 효고현립미술관에서 초록 사과가 그려진 엽서를 구매했다.
Credit
- 글/ 이희주,함윤이,민병훈
- 사진/ 파운드리 서울,Getty Images
- 디자인/ 이예슬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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