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살을 맞은 ‘바자’가 소설의 주인공이 될 때, 작가 함윤이
호갑투 같은 긴 손톱을 지닌 미스터리한 ‘바자’라는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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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WOMAN’S STORY
서른 살을 맞은 <바자>가 소설의 주인공이 되었다. 여성 소설가 5인이 쓴 ‘바자’라는 여자의 이야기.
그 여자
나는 그 여자를 세 번 만났다. 인생에서 세 번 만난 사람을 잘 안다고 말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고로 나는 그 여자가 누구인지 말하기보다 내가 그녀와 만났을 때 벌어진 일과 본 것만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처음 그녀와 만났을 때 나는 열넷 아니면 열다섯이었다. 어머니는 내가 이제 더는 어린애가 아니니 믿고 맡기겠다며, 종종 나를 홀로 전당포에 두고 도시락이나 커피를 사러 가곤 했다. 물론 내가 전당포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물건을 찾으러 혹은 맡기러 온 손님들에게 곧 어머니가 올 테니 잠시 기다려달라 말하는 것뿐이었다. 전당포는 그리 잘되지 않았으므로 실은 그런 말을 할 기회도 별로 없었다.
그 여자는 어머니가 유난히 길게 자리를 비운 날에 왔다. 나는 첫눈에 그녀가 범상치 않음을 알아보았다. 그녀의 손톱은 기묘하다고 말할 만큼 길었으며 금과 은 그리고 내가 이름을 모르는 작달막한 보석들로 만들어져 있었다.
여자가 제 손에서 그 손톱들을 하나하나 벗겨낼 때 내 눈은 거의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내 표정을 본 그녀가 소리 내어 웃었다. 웃음소리는 어린애 같았지만, 그녀는 사실 우리 어머니와 또래로 보였고 어떤 면에선 그보다 더 늙어 보였다.
열 손가락에서 모두 손톱을 벗겨낸 여자는 주머니에서 은 사슬을 꺼내어 손톱들 서로 엮었다. 그다음 내게 말했다.
“이건 호갑투야. 유서 깊은 물건이지. 아주 오래전에 살던 여자들은 자기 손톱을 지키기 위해, 또 자기가 누구인지 알리기 위해 이걸 썼단다.”
나는 쭈뼛쭈뼛 고개를 끄덕였고, 곧 어머니가 올 거라고 이야기했다. 그녀는 접수대 옆 나무 의자에 앉았다. 여자가 무릎을 꼬거나 허리를 세울 때마다 허벅지에 올려둔 호갑투가 서로 부딪치며 달그락달그락 소리를 냈다. 종종 호갑투를 보던 여자의 눈이 살짝 젖었던 것을 기억한다. 귀한 물건을 맡기러 온 손님들 몇몇은 꼭 그처럼 물기 어린 눈으로 나와 어머니를 대하곤 했다.
두 번째로 그녀를 만났을 때 나는 스물이 넘어 있었다. 상경한 지 몇 달이 안 되어 자주 도시를 산책하던 때였다.
그날 나는 오래된 서점에서 교재를 사기 위해 집을 나섰다. 사실 책을 사는 건 적당한 핑계일 뿐, 그보다는 막 봄에 접어드는 도시를 눈으로 더듬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하숙집을 나와 경사가 가파른 몇 개의 언덕을 오르내렸고, 오색찬란한 옷을 입은 동갑내기들과 관광객으로 가득한 시가지를 지나 신촌역 부근에 이르렀다.
그 여자는 서점 앞, 오래된 피아노 앞에 서 있었다. 그 악기가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으며 누가 두었고 또 관리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신촌 일대의 행인 중 피아노 연주에 자신이 있거나 괜히 한두 음을 쳐보고 싶은 이들은 꼭 그 앞에 멈춰 건반을 두드리곤 했다.
그 여자는 피아노를 잘 치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의 곡을 외웠음은 분명했다. 내가 잘 모르는 그 곡을 그녀는 누차 틀리고 또 고쳐가며 연주했다. 건반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듯 다그닥다그닥 소리가 거듭 들려 유심히 살펴보았더니, 매우 긴 여자의 손끝이 눈에 들어왔다.
몇 해 전 내 마음을 앗아갔던 호갑투는 아니었다. 길게 늘인 그 손톱은 금이나 은과는 사뭇 다른 소재로 만들어졌고, 표면에는 눈송이 또는 물방울 같은 흰 그림들이 가득 그려져 있었다. 그녀의 손톱은 끊임없이 음을 만들어가면서도 어디론가 달리는 말발굽처럼 다그닥다그닥 울림을 자아냈다.
연주가 끝났을 때 그녀 곁에 서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건반에서 손을 뗀 여자는 머리칼을 휙 넘기고 나와 눈을 맞췄다. 그 여자는 내 어머니보다 한결 어려 보였지만, 나에 비하면 월등히 어른처럼 느껴졌다. “연습 중이야.” 그녀가 말하고서 멋쩍게 웃었다.
지난주 나는 세 번째로 그 여자를 만났다. 지난 두 번처럼 우연한 만남이었다.
근래 내가 출퇴근길마다 지나치는 소공원이 하나 있다. 여느 초등학교 운동장의 반절만 한 크기로, 어린 초목과 이제 막 물드는 수국들을 가득 심은 덕에 그 안쪽의 공기만 파르스름한 빛을 띠는 양 보인다.
그 여자는 푸른빛이 모이는 공터 중앙에 있었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저보다 한결 어려 보이는, 동생이나 조카 또는 딸 같기도 한 여자애들과 둥글게 앉아 있었다. 여자를 본 나는 우뚝 멈춰 섰고, 조금 더 자세히 보고자 공원 안에 들어섰다.
그녀는 둘러앉은 여자들의 손에 각기 다른 색깔의 매니큐어를 발라주고 있었다. 몇몇 여자애들은 아예 봉숭아 물을 들였는지 약지와 소지 끝을 작은 비닐로 묶은 채였다. 그녀들은 자신들이 어떤 색 또는 무늬와 질감을 좋아하는지, 그리고 각자의 손톱이 어느 모양과 특성을 가졌는지 말하며 연신 웃었다. 알코올 냄새와 봉숭아꽃의 단 향이 웃음소리에 섞였다.
세 번째로 만난 여자는 이제 나와 거의 또래로 보였다. 나는 오래전 어머니가 말해준 한 일화를 떠올렸다. 어머니가 전당포를 닫기 하루 전날, 한 여자가 찾아와 오래전 맡긴 기묘한 손톱을 되찾아갔다고 했다. 금과 은 그리고 옥과 터키석 등 각종 보석으로 치장된 그 손톱은 그녀의 손에 절묘하게 어울렸으며, 그것을 낀 순간 그 여자의 얼굴에 번지던 기쁨의 빛을 어머니는 영영 잊지 못한다고.
나는 소녀들의 손톱에 꽃잎을 올리고 색을 입히는 여자를 보며 어머니가 본 빛을 손끝으로 만지듯 혹은 연주하듯 더듬었다. 그 여자가 마침내 고개를 들고 나와 눈을 맞췄을 때, 우리의 얼굴에는 공모자 같은 미소가 나란히 떠올랐다.
함윤이
2022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2025년 이효석문학상 우수작품상, 2026년 이상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소설집 <자개장의 용도>, 장편소설 <정전>을 펴냈다.
Credit
- 에디터/ 고영진
- 일러스트/ 진주희
- 디자인/ 이진미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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