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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V&A 박물관에서 열린 스키아파렐리 전시.

프로필 by 김경후 2026.07.20

SHOCK TACTICS


쿠튀르 하우스를 설립한 지 거의 한 세기가 흐른 지금에도 엘사 스키아파렐리(Elsa Schiaparelli)는 여전히 패션계의 전설로 존재하고 있다. 그녀는 시그너처 컬러인 ‘쇼킹 핑크’만큼 대담하고 도발적인 인물이었다. 런던 V&A 박물관이 그녀의 유산을 기리는 기념비적인 전시를 진행 중인 가운데 <하퍼스 바자> 영국판 편집장을 지낸 저널리스트, 저스틴 피카르디(Justine Picardie)가 스키아파렐리의 파란만장한 삶을 되짚었다.


디자이너 엘사 스키아파렐리.

디자이너 엘사 스키아파렐리.

현대건축, 현대사상, 그리고 현대적 움직임의 정수.” 1932년 4월, <하퍼스 바자>가 커리어의 정점에 있던 선구적인 쿠튀리에, 엘사 스키아파렐리를 묘사한 문장이다. 올봄 V&A에서 막을 올린 전시 «스키아파렐리: 패션이 예술이 되다(Schiaparelli: Fashion Becomes Art)»는 전간기 유럽 아방가르드 스타일을 이끈 인물인 그녀의 유산을 조명한다. 1927년 설립한 패션 하우스 스키아파렐리는 기발한 트롱프뢰유 니트웨어와 옷을 통해 구현한 초현실주의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리고 현재 파리 중심부에서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이번 전시는 스키아파렐리를 혁신의 거장으로 기리는 동시에, 그동안 비교적 덜 알려졌던 영국 시절의 삶과 커리어, 그리고 그것이 <하퍼스 바자>와 어떤 방식으로 맞물려 있었는지를 함께 조명한다.

엘사 스키아파렐리는 1890년 로마에서 태어났다. 뛰어난 학자의 딸이자 저명한 천문학자의 조카였던 어린 스키아파렐리는 학자와 귀족으로 이루어진 가문에서 자랐지만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꼈다. 자신의 이야기를 새롭게 구성하듯 종종 스스로를 3인칭으로 서술한 자서전 <쇼킹 라이프(Shocking Life)>에서 그녀는 어머니가 종종 자신의 외모를 깎아내렸다고 밝혔다. ‘”언니는 아름답고 너는 못생겼다”는 어머니의 말에 그녀는 스스로를 아름답게 만들 방법을 고안했다. 바로 한련화, 데이지, 나팔꽃 씨앗을 모아 목과 귀, 입에 ‘심은’ 것. 그녀를 미인으로 만들어줄 꽃은 끝내 피지 않았지만, ‘변형’이라는 키워드는 스키아파렐리 커리어 전반을 관통하게 된 계기가 됐다.

그녀는 기회가 닿자 로마를 떠나 런던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훗날 남편이 된 빌헬름 벤트 드 케를로르(Wilhelm Wendt de Kerlor)를 만났다. 회고록에서 그녀는 그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브르타뉴계와 폴란드계의 피가 섞였고 어머니는 스위스인이었다고만 적었다. 두 사람은 그가 신지학(영혼과 우주의 비밀을 탐구하는 신비주의 사상)에 대해 강연하는 자리에서 처음 만났다. 그는 영혼이 육체를 지배하는 힘과 마법, 영원한 젊음에 대해 이야기했다. 스키아파렐리는 그가 묘한 얼굴이지만 꽤 잘생겼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1914년 7월 결혼했다. 그러나 신혼집으로 돌아온 그들을 맞이한 것은 산산조각 난 일곱 개의 거울이었다. 그녀의 표현대로, 불길한 시작이었다. 상황은 점점 나빠졌다. 빌헬름은 오컬트를 직업으로 삼은 인물이었고 초자연적 능력을 지녔다고 주장했지만, 안정적인 수입을 얻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전쟁이 발발한 뒤 스키아파렐리는 “남편이 떠도는 구름처럼 행동했기 때문에 내가 어디에 속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가족이 살았던 니스로 가기로 했다”고 회상했다. 사실 빌헬름은 1915년 봄, 런던에서 점술과 손금 보기(이는 부랑자법에 따라 불법이었다)로 체포되었다. 그는 법정에서 ‘점괘를 봐주는 척한 부랑자이자 사기꾼’이라는 죄목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고, 벌금을 문 뒤 프랑스로 추방되는 조건으로 감옥행을 면했다. 스키아파렐리는 그를 따라 프랑스로, 다시 대서양을 건너 뉴욕으로 향했다. 뉴욕에서 빌헬름은 심령가이자 점성가로서의 커리어를 이어가려 했고 스키아파렐리는 그의 조수로 일했다. 1920년 6월, 딸이 태어난 지 며칠 후 빌헬름은 그녀와 아이를 남겨둔 채 떠났다. 스키아파렐리는 당시를 두고 “그 시절에 대한 기억이 희미한 것이 이상하다. 모든 것이 칙칙하고 절망적으로 보였다”고 적었다.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어린 딸 마리아 루이사(애칭 ‘고고(Gogo)’)가 소아마비 진단을 받은 것이다. 훗날 고고는 <하퍼스 바자>와의 인터뷰에서 어린 시절을 냉정하게 회상했다. “엄마는 문밖으로 나가며 늘 ‘자, 이제 가야겠다’고 말했어요. 그러면 나는 올려다보며 ‘Go, go, going, go, go’라고 했죠. 그래서 고고라는 이름이 붙었고, 그대로 애칭이 되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별명은 엄마의 양육 방식을 완벽하게 설명하죠.” 고고가 스위스의 한 클리닉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 스키아파렐리는 일을 찾기 위해 파리로 돌아갔다. 그녀가 패션계에 발을 들일 수 있었던 것은 쿠튀리에 폴 푸아레(Paul Poiret)와의 우정 덕분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옷과 자신감을 주었고, 그의 지지 속에서 스키아파렐리는 첫 점퍼를 만들었다. 이후 그녀는 항공계와 스포츠계 여성을 위한 대담한 옷을 선보이며 자신만의 영역을 넓혀갔다. 그녀의 상승세는 1932년 <뉴요커>에 실린 재닛 플래너(Janet Flanner)의 기사에서도 드러난다. 플래너는 스키아파렐리를 ‘혜성(comet)’이라 언급하며 “그녀의 드레스는 현대 회화 한 점에 견줄 만하다”고 설명했다.

스키아파렐리의 친구이자 열렬한 지지자 중에는 <하퍼스 바자> 영국판 독자들에게 ‘제임스 로드니 부인’으로 알려진 미국인 패션 에디터, 프랜시스 로드니(Frances Rodney)가 있었다. 프랜시스는 1934년부터 <바자>에 기고하기 시작했고,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영국판 편집장을 역임했다. 스키아파렐리가 <바자>의 메이페어 사무실에서 멀지 않은 어퍼 그로브너 스트리트에 첫 런던 쿠튀르 살롱을 연 후 두 사람은 가까워졌다. 프랜시스와 스키아파렐리 모두 대담하고 진취적인 여성이었고, 감정적 상처와 상실을 겪은 이들이었다.(프랜시스의 남편 제임스는 1933년 햄프셔의 한 주택에서 화재로 사망했다.) 또 두 사람 모두 자신이 태어난 곳을 떠나 새로운 삶을 찾아 나선 인물이기도 했다. 둘의 관계는 이번 V&A 회고전에서도 특별하게 다뤄진다. 전시에는 프랜시스가 소장했던 스키아파렐리의 모자 세 점, 이브닝드레스 한 벌, 코트 한 벌, 수트 한 벌이 소개되었는데 모두 검은색이다. 이는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슬픔의 표시이자 일하는 여성으로서의 전문성을 드러내는 상징이기도 하다. 전시 큐레이터 소넷 스탠필(Sonnet Stanfill)은 이 데이웨어의 테일러링을 “매우 시크하고 깔끔하며 단정하다”고 평가했다. 동시에 스키아파렐리 특유의 위트도 분명히 읽힌다. “수트 재킷 주머니가 앞이 아닌 뒤에 달려 있어 세상을 뒤집어놓은 듯하죠. 그 안에는 기발함과 유희의 감각이 숨어 있어요.” 소넷이 말했다.

프랜시스가 스키아파렐리에게 품었던 존경심은 <하퍼스 바자> 미국판의 다이애나 브릴랜드(Diana Vreeland)와 캐멀 스노(Carmel Snow)에게도 공유되었다. 스노는 스키아파렐리의 모더니즘을 설명하기 위해 ‘하드 시크(hard chic)’라는 표현을 만들었고, 그것이 1930년대를 정의한다고 말했다. 특히 사교계 명사인 월리스 심슨(Wallis Simpson)과 데이지 펠로즈(Daisy Fellowes) 같은 스타일 아이콘에게 각광을 받았다. 심슨은 1937년 결혼을 앞두고 스키아파렐리에게 18벌의 트루소(혼수)를 주문했는데, 그중에는 윈저 공작과 결혼하기 불과 몇 주 전, 세실 비튼(Cecil Beaton)이 촬영해 널리 회자된 ‘랍스터’ 드레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í)가 그린 선홍빛 랍스터가 크게 자리한 흰 오간자 드레스는 제작 과정에서 달리가 원단 위에 마요네즈를 바르려 했지만 만류당했고, 대신 그는 파슬리 몇 줄기를 더했다. 그러나 그것이 갑각류가 지닌 성적 암시를 누그러뜨리지는 못했다. 특히 랍스터가 심슨의 허벅지 사이에 놓인 탓에 더욱 그랬다. 펠로즈 역시 못지않게 대담했다. 부자들의 마약으로 불린 코카인을 향유하고 까르띠에 하이주얼리와 오트 쿠튀르를 즐겨 입는 값비싼 취향을 지닌 펠로즈는 종종 상류층에서 가장 악명 높은 여자로 묘사되었다. 1933년 <바자>의 파리 에디터로 임명되었지만, 잡지의 특성인 마감 날짜를 지키기엔 너무나 부유하고 퇴폐적이었기에 <바자>에 머문 기간은 1년 남짓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펠로즈는 스노의 표현처럼 스키아파렐리의 혁명적인 옷을 입고 나타날 때마다 센세이셔널한 반향을 일으켰다. 양고기 커틀릿 모양, 혹은 뒤집힌 하이힐 모양의 장난스럽고 초현실적인 모자를 쓰고도 여전히 우아해 보일 수 있는 몇 안 되는 여성 중 하나였다.


하이힐을 형상화한 모자가 돋보이는 스키아파렐리의 룩.

하이힐을 형상화한 모자가 돋보이는 스키아파렐리의 룩.

스키아파렐리의 유명한 고객 리스트에는 조앤 크로퍼드, 마를린 디트리히, 그레타 가르보, 캐서린 헵번과 같은 할리우드 스타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프랜시스만큼 가까운 친구는 아니었다. 프랜시스는 1938년 고고가 사교계에 처음 등장할 때 보호자로 동행했다. 말할 것도 없이 두 사람은 수많은 무도회와 파티에서 스키아파렐리의 옷을 근사하게 소화했다. 이듬해 5월, 두 번째 남편 찰스 고든(Charles Gordon)과 결혼한 프랜시스는 딸 메리벨(Marybelle)을 낳았다. 그해 가을 전쟁이 발발했고, 1940년 여름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하고 영국 침공을 위협하자 고고와 메리벨은 모두 대서양을 건너 뉴욕의 안전한 곳으로 보내졌다. 허나 전쟁도 이 강한 두 어머니를 패션으로부터 물러서게 하지는 못했다. 프랜시스는 런던에 폭탄이 쏟아지는 동안에도 <바자>의 편집을 이어갔고, 동시에 전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영국 섬유의 해외 수출을 독려했다. 스키아파렐리는 전쟁 중 주로 미국에 머물면서도 파리의 쿠튀르 하우스를 유지하려 했고, 이 때문에 한때 FBI의 감시를 받기도 했다. 그녀는 공개적으로 나치즘에 반대했지만, 독일 당국과의 은밀한 거래를 둘러싼 소문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프랑스 패션계의 많은 남성 동료들이 제3제국과 훨씬 더 밀접하게 연루되어 있었음에도 말이다. 스키아파렐리는 자신의 사업이 흔들린 이유에 대해 “전쟁 이전 우리가 알던 우아함은 이제 죽었다”고 썼다. 그녀는 1947년 젊은 위베르 드 지방시(Hubert de Givenchy)를 고용할 만큼 선견지명이 있었다. 지방시가 1951년, 스물네 살의 나이로 자신의 하우스를 세우기 위해 그녀 곁을 떠나자 “당신은 나를 파산시키고 말 거야”라고 했으니. 실제로 3년 뒤 스키아파렐리는 파산 신청을 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동료와 후대 디자이너들로부터 존경받았다.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는 그녀를 ‘쿠튀르계의 유일하고도 진정한 예술가’라고 칭했고, 이브 생 로랑 역시 스키아파렐리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그녀의 시그너처 컬러인 쇼킹 핑크에 대해 “빨강의 신경질적인 기운을 지닌, 공격적이고 싸움을 거는 전사 같은 핑크”라고 묘사했다. 생 로랑은 스키아파렐리라는 인물에 대해서도 더없이 직설적이었다. “그녀만의 매력? 잔혹함, 오만함, 자기 확신, 경멸, 폭풍 같은 분노, 기묘한 변덕, 그리고 고르곤(그리스 신화 속에 나오는 뱀 머리카락을 가진 세 자매 괴물)의 가면을 지녔다”고 말했다.

스키아파렐리는 분명 모두가 선호할 수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러나 프랜시스에게만큼은 예외였다. 두 사람의 우정은 생의 끝까지 이어졌다. 전쟁이 끝난 뒤 프랜시스는 <바자>를 떠나 세 번째 남편 앨윈 파커슨 대위와 함께 스코틀랜드 애버딘셔의 브레이머로 향했다. 남편 가문의 고택에 자리 잡은 뒤에도, 그녀는 결코 평범한 귀부인으로 머물지 않았다. 보수적인 지역 사회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교회에 갈 때조차 스키아파렐리의 모자와 쿠튀르 피스를 입었다. 또한 스키아파렐리를 브레이머 성으로 초대했고, 그녀를 기리기 위해 욕실 하나를 스키아파렐리가 가장 좋아하던 핑크로 칠했다. 나는 2012년 처음 그곳을 방문했을 때 그 욕실을 직접 확인했다. 지금도 그 욕실은 여전히 강렬한 핑크빛을 간직하고 있다. 우정이 하나의 색으로 남는다면 아마도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그토록 부지런한 디자이너였음에도, 지금까지 남아 있는 스키아파렐리의 의상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스탠필은 그녀를 ‘열병에 가까운 창의성’을 지닌 인물로 설명했다. 그 이유는 다이애나 브릴랜드가 가장 아끼던 스키아파렐리 드레스에 대해 회상한 일화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황마색에 가까운 작은 드레스가 있었어요. 소재는 면 같기도 했지만, 정원에서 온 무언가 같기도 했죠.” 그러나 그 드레스를 세탁소에 맡긴 뒤 다시 돌아온 것은 드레스가 아니었다. 아주 작고 둥근 접착제 조각만이 남아 있었다. “그 원단은 완전히 검증된 것이 아니었죠.” 셀로판, 꼬아 만든 나일론, 식물 섬유, 유리 직물처럼 실험적인 재료로 만든 다른 작품들 역시 마찬가지로 섬세하고 취약했다. 다행히도 이번 V&A 전시회에는 비교적 온전하게 보존된 그녀의 대표작을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다. 시대의 관습을 뒤흔든 랍스터 드레스, 1938년 르 시르크(Le Cirque) 컬렉션에서 달리와 협업한 두 점의 초현실주의 작품도 포함된다. 찢어진 살점을 연상시키는 착시적 틈을 더한 ‘티어스(Tears)’ 드레스와, 표면에 입체적인 뼈 구조를 구현한 검은색 ‘스켈레톤(Skeleton)’ 드레스가 그것이다. 전시에는 장 콕토(Jean Cocteau), 맨 레이(Man Ray),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알베르토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 등 그녀의 친구이자 협업자들의 작품을 포함해 약 400점의 오브제가 소개된다. 여기에 2019년 스키아파렐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부임한 다니엘 로즈베리(Daniel Roseberry)의 오트 쿠튀르 의상 24벌도 더해졌다. 메종은 이탈리아 토즈 그룹의 오너, 디에고 델라 발레(Diego Della Valle)가 인수한 뒤 다시 부활했다.

V&A 전시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스코틀랜드에 있는 프랜시스 파커슨의 아카이브에는 40년에 걸친 우정을 보여주는 한 통의 편지가 남아 있다. 1971년, 파리의 자택에서 브레이머로 보낸 스키아파렐리의 편지다. 위대한 쿠튀리에는 마지막에 단순히 이렇게 적었다. “자기야, 다음엔 언제 올 거야?” 스키아파렐리는 그로부터 2년 뒤 세상을 떠났고, 그때 생 로랑은 “시크(Chic)가 눈을 감았다”고 말했다. 말할 것도 없이, 프랜시스 파커슨은 1991년 89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스키아파렐리를 계속 입었다. 스코틀랜드에서 열린 그녀의 장례식에서는 스키아파렐리의 대담한 모자 중 하나가 관 위를 장식했다. 스키아파렐리라면 분명 마음에 들어 했을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1935년 <하퍼스 바자>를 위해 프랑스 화가 크리스티앙 베라르 (Christian Bérard)가 스키아파렐리를 그린 일러스트레이션. 1941년 존 에버라드가 촬영한 <하퍼스 바자> 영국판 편집장 프랜시스 로드니. 사교계 명사 월리스 심슨이 윈저 공작과 결혼을 앞두고 선택한 스키아파렐리의 이브닝드레스. (왼쪽부터) <하퍼스 바자> 미국판 편집장 캐멀 스노와 디자이너 엘사 스키아파렐리. 엘사 스키아파렐리와 살바토르 달리가 협업하여 디자인한 ‘랍스터’ 드레스.

※ «스키아파렐리: 패션이 예술이 되다(Schiaparelli: Fashion Becomes Art)»는 V&A 사우스 켄징턴에서 2026년 11월 8일까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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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글/ Justine Picardie
  • 번역/ 채원식
  • 사진/ Getty Images, Bridgeman(랍스터 드레스)
  • 디자인/ 한상영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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