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린 디옹은 계속된다
커리어를 송두리째 흔들었던 심각한 건강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무대에 설 채비를 마친 셀린 디옹. 전설적인 팝 아이콘은 자신의 심장이 여전히 뜨겁게 뛰고 있음을 세상에 증명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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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ÉLINE DION GOES ON
커리어를 송두리째 흔들었던 심각한 건강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무대에 설 채비를 마친 셀린 디옹. 전설적인 팝 아이콘은 자신의 심장이 여전히 뜨겁게 뛰고 있음을 세상에 증명하려 한다.
드레스, 케이프, 부츠는 모두 Givenchy by Sarah Burton. 하이 주얼리 이어링은 Bvlgari.
라스베이거스 스트립에서 조금 떨어진 팜스 카지노 리조트(Palms Casino Resort) 지하에는 수많은 명반이 탄생한 전설적인 녹음실이 자리해 있다. 마이클 잭슨은 이곳에서 기념비적인 앨범 <Thriller>의 재발매 수록곡을 녹음했고, 레이디 가가는 영화 <조커: 폴리 아 되>에서 영감을 받아 다채로운 음악으로 풀어낸 컴패니언 앨범 <Harlequin>을 완성했다. 그리고 6월의 어느 저녁, 이곳에서 또 하나의 놀라운 순간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셀린 디옹이 필라테스에 몰두하고 있었던 것. 레이스 장식의 누드 톤 하이넥 레오타드를 입은 그녀는 한쪽 다리를 발레 바에 올린 채 꼿꼿이 서 있다. 단정하게 틀어 올린 머리와 마스카라를 촘촘히 바른 속눈썹, 그리고 놀랍도록 유연한 몸. 힘들이는 기색 하나 없이 다리를 발레 바에 미끄러뜨리더니 이내 완벽한 스플릿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이토록 자연스러운 움직임은 결코 쉽게 얻은 것이 아니다. 2022년 셀린은 근육이 마비에 이를 정도로 굳어지는 희귀 자가면역성 신경질환, 강직인간증후군(Stiff-Person Syndrome, SPS)을 진단받았다. 극심한 통증으로 걷기조차 힘든 날이 있었고, 평범한 일상을 이어가기 위해 고용량의 발륨(Valium, 신경안정제 일종)에 의존해야 할 때도 있었다. “진행성 질환이에요. 하지만 저는 ‘질병’이라는 표현은 좋아하지 않아요. 그 말을 들으면 괜히 이렇게 얼굴부터 찌푸리게 되잖아요.” 코를 찡그려 보인 그녀는 영화 <나 홀로 집에> 속 대사까지 능청스럽게 따라 한다. “케빈, 넌 정말 골칫거리야.” 농담을 던지는 순간에도 테트리스 조각을 맞추듯 끊임없이 자세를 바꾼다. 강직인간증후군은 근육을 한순간에 굳게 만들 수 있기에, 셀린은 계속해서 몸을 움직인다. 어쩌면 강직인간증후군은 셀린에게 닥친 잔인한 운명의 장난이었다.
재킷은 Saint Laurent by Anthony Vaccarello. ‘투보가스’ 하이 주얼리 네크리스는 Bvlgari.
셀린은 몬트리올 외곽의 작은 마을에서 1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녀의 가족은 너무나도 가난해서 목욕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 할 수 있었다. 그런 그녀가 역대 가장 많은 음반을 판매한 가수 중 한 명이 된 것은 백만분의 일에 가까운 기적이었다. 성소수자와 캐나다인, 특히 퀘벡 사람들부터 이별 노래를 사랑하는 이들, 서인도 제도 출신 팬과 영화 OST 애호가에 이르기까지 셀린은 모두의 아이콘이 되었다. 공교롭게도 강직인간증후군 역시 1백만 명 중 한두 명에게만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진 희귀 질환이다. 셀린의 삶에 1백만분의 1의 기적과 불운이 함께 찾아온 셈이다. 방 안에는 발레 바와 웨이트 기구, 러닝머신, 리포머가 놓여 있었다. 나는 피아노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트레이너 나오미가 전보다 몸이 훨씬 유연해졌다고 말하자, 셀린은 순간 당황한 듯 되물었다. “너무 유연해진 건 아니죠?” 다행히도 나오미가 말한 의미는 그게 아니었다. 지난 6년간 셀린이 무대에 오른 것은 2024 파리 올림픽 개막식 단 한 번뿐이다. 이제 그녀는 다시 무대에 설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가운 드레스는 Balenciaga. ‘세르펜티’ 하이 주얼리 네크리스는 Bvlgari. 펌프스는 Jimmy Choo.
셀린에게 무대는 단순한 직업 그 이상이다. 열두 살 때부터 공연은 그녀의 삶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녀가 간절히 무대로 돌아가고 싶었던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뚜렷한 설명조차 하지 못한 채 공연을 취소해야 했고, 2023년에는 예정된 투어 일정을 중단했다. 그 과정에서 팬들을 실망시켰다는 사실은 셀린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무엇보다 괴로웠던 건 팬들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셀린은 2022년 강직인간증후군을 공식적으로 진단받기 전까지 무려 17년 동안 관련 증상을 겪었다. 그전까지 공연을 취소해야 할 때면 부비동염과 기침을 이유로 들곤 했다. 그러나 그녀가 맞서고 있던 건강 문제는 그런 설명으로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을 만큼 깊고 심각했다. 2024년 공개된 다큐멘터리 <I Am: Céline Dion>을 통해 관객들은 그녀가 오랜 시간 견뎌온 현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통증으로 인해 끊어지는 목소리, 매일 한 움큼씩 복용해야 했던 벤조디아제핀계 약물, 심지어 발작으로 온몸이 굳어가는 고통 속에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까지. 셀린이 무대 밖에서 감당해야 했던 고통이 그제야 세상에 드러났다. 셀린은 공연을 이 세상에서 자신이 완수해야 할 소명이자, 신이 내린 재능과 자신 사이에 맺어진 신성한 약속처럼 말한다. 다시 자신의 뜻대로 몸을 움직이고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 데 이어, 올해 초에는 9월 중순부터 5주간 펼쳐지는 파리 레지던시 공연(Concert Residency, 특정 공연장에 오랫동안 머물며 펼치는 장기 상설 공연)까지 발표했다. 그야말로 기적 같은 일이다. 필라테스를 마친 셀린은 얇은 모노그램 스웨터와 더스티 로즈 컬러의 트레이닝 팬츠 차림으로 나와 마주 앉았다. 그녀 곁에는 정확히 23°C로 맞춰진 가습기가 놓여 있었다. 공동 매니저 존이 스탠리컵 결승전 현장에서 찍은 아들들의 사진을 보여줬다. 그녀에게 하키를 좋아하냐고 묻자 셀린은 이렇게 답했다. “아니요. 저는 제 아이들을 사랑하는 거예요. 그건 전혀 다른 이야기죠.” 마침내 다시 무대에 설 수 있게 된 지금, 셀린은 마치 잃어버린 물건을 돌려받듯 자신의 삶을 되찾은 것만 같다. 지난 3월 그녀는 인스타그램을 통해 복귀 소식을 알리며 이를 자신에게 주는 58번째 생일 선물이라 표현했다. “올해 저는 인생 최고의 생일 선물을 받게 됐어요. 여러분을 다시 만나고, 여러분을 위해 공연할 기회를 얻었으니까요.” 몸 상태가 좋아졌고 설레면서도 조금은 긴장되지만, 무대로 돌아갈 준비를 마쳤다고도 밝혔다. 티켓은 빠르게 팔려나갔고, 2027년 5월부터 3주간 이어지는 추가 레지던시 공연의 예매까지 시작됐다. 셀린은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어요. 그동안 제가 팬들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보여줄 수 있는 무언가를 선물하고 싶어요”라고 말한다.
시퀸 드레스는 Gucci. ‘세르펜티’ 하이 주얼리 이어링은 Bvlgari.
셀린의 스타일리스트이자 공연 전반의 비주얼 콘셉트를 함께 구상하는 애니 호스(Annie Horth)는 이번 공연이 웅장한 스케일로 완성될 것이라 말한다. “셀린은 내밀하고 로맨틱한 감성부터 압도적인 가창력까지 자유롭게 오갑니다. 그 모든 면모를 하나의 무대 안에서 자연스럽게 펼칠 수 있도록 만들고 있어요.” 당시에는 원인을 알 수 없었던 셀린의 증상이 본격적으로 악화되기 시작한 것은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의 시작과 맞물린 시기였다. 이후 그녀는 3년 동안 세상과 거리를 둔 채 지냈다. 팬들이 그녀가 아무렇지 않게 행복한 일상을 누리면서 공연만 취소한다고 오해하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시간 동안 셀린은 자연을 사랑하게 됐다. “저는 나무를 정말 사랑해요. 나뭇잎 사이로 숨어 사라지는 제 모습을 상상하곤 했죠.” 하지만 때는 가을이었다. 잎이 떨어지자 바구니를 든 사람들 앞에 그녀의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리고 그녀는 사람들이 늘 기대하던 사과를 더 이상 맺을 수 없었다.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어요. ‘미안해요. 이제 여러분에게 드릴 사과가 없어요.’” 그때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우리는 사과를 받으러 온 게 아니에요. 나무를 만나러 온 거예요.” 셀린에게 이 말은 커다란 깨달음이었다. 하지만 돌아보면 그녀는 언제나 그런 사람이었다. 한없이 진솔하면서도 엉뚱한 모습으로 사람들 안에 감춰진 감정을 자연스럽게 끌어내는 사람.
삶을 따져 묻기보다 그냥 살아보면 안 될까요? 저는 지금 제 삶을 살고 있어요. 제대로 살아가고 있죠.
톱은 Chanel. ‘세르펜티’ 하이 주얼리 이어링은 Bvlgari.
셀린은 10대 시절부터 지나치게 감상적이고 격조 없는 음악을 만든다는 이유로 숱한 비난을 받아왔다. 특히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에 걸쳐 그녀의 이름은 진부함과 과잉의 대명사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셀린에게는 목소리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특별한 힘이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촌스럽게 보이는 감성이, 다른 이들에게는 시대의 유행이 아무리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는 진심으로 다가온다. 가난한 프랑스어권 퀘벡 가정에서 태어난 셀린은 자기 나라에서조차 이방인 같은 존재였다. 그럼에도 사랑을 향한 한결같은 마음으로, 수많은 사람을 하나로 이어왔다. 오랫동안 셀린의 음악은 사람들이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이었다. 남들이 어떻게 볼지 신경 쓰지 않은 채, 마음속에 쌓인 감정을 온전히 쏟아낼 수 있는 곳 말이다. 퀘벡에서 자란 셀린은 1976년 올림픽에서 나디아 코마네치(Nadia Comăneci)가 완벽한 10점 연기를 펼치는 모습을 본 뒤 체조선수를 꿈꿨다. “그녀는 제 또래 여자아이 모두의 우상이었어요.” 눈을 크게 뜨고 외치는 셀린의 모습에 그날의 감동이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 있다. “세상에, 점수판에는 10점을 표시할 자리조차 없었다니까요. 완벽한 10점이 나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해 어떻게 표시해야 할지도 몰랐던 거죠!” 하지만 곧 다른 재능이 드러났고, 체조선수를 하기에는 키도 너무 커졌다. 결국 셀린은 스스로 그 꿈을 접었다. 이후 자신을 위한 세 가지 목표를 세웠다. 그중 첫 번째를 설명하기 위해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똑바로 앉고 싶었는데 그게 안 됐어요. 늘 이렇게 앉았죠.” 셀린은 잠시 등을 둥글게 굽혀 보인 뒤 천천히 의자로 돌아와 다리를 꼬고 앉는다. 나머지 두 가지 목표는 몸을 굽혀 손으로 발끝을 짚는 것과 스플릿 자세를 취하는 것이었다. 이제 셀린은 세 가지 모두 해낼 수 있다. 셀린의 몸은 놀라울 만큼 유연하다. 특히 얼굴은 목소리만큼이나 자유자재로 다루는 또 하나의 표현 도구다. 감정에 따라 윗입술은 코 가까이까지 말려 올라가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닿기라도 할 듯 앞으로 쭉 내밀어지기도 한다. 눈썹 역시 단 한 순간도 가만히 두지 않는다. 셀린이 대화를 하다 말고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두고 ‘때때로 흥얼거린다’고 표현하는 것은, ‘라스베이거스는 때때로 따뜻하다’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지나치게 절제된 표현이다. 그녀에게 노래는 문장부호이자 감정을 강조하는 장치이며, 화제를 전환하는 방식이고, 기쁨을 표현하는 언어다. 두 시간 남짓 이어진 대화 동안 셀린은 팅 팅스(The Ting Tings)의 ‘That’s Not My Name’을 부르다가, 누군가 흰 꽃을 들고 들어오자 ‘Here Comes the Bride’를 흥얼거린다. 정직함에 관해 이야기하며 신디 로퍼(Cyndi Lauper)의 ‘True Colors’를 부르고, 어머니가 직접 써준 자신의 데뷔곡 ‘Ce n’était qu’un rêve’까지 자연스럽게 이어간다. 셀린이 동시대 최고의 보컬리스트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동시에 ‘밈의 여왕’으로도 사랑받는 이유다. 즉흥적으로 튀어나오는 그녀의 모습은 짧은 영상으로 편집돼 인터넷 곳곳으로 끝없이 퍼져 나간다. 나무 타기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이야기하던 셀린은 “전 원숭이예요”라고 말하더니 벽면 철제 구조물을 순식간에 1.2m가량 기어오른다. 그러고는 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 속 신이 아담에게 손을 뻗듯, 나를 향해 팔을 내민다. 다큐멘터리를 통해 자신의 가장 사적인 순간까지 세상에 드러내는 일은 결코 편하지 않았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셀린이 이토록 놀라운 삶을 살 수 있었던 건 팬들 덕분이었다. 셀린이 20년에 가까운 증상 끝에 정확한 진단을 받을 수 있었던 것 역시 팬들이 만들어준 명성과 지위 덕분이었다. “팬들은 제 공연 티켓과 음반을 사주었어요.” 셀린이 말한다. “제가 그런 특권을 누릴 수 있게 해준 것도 팬들이죠. 그러니 적어도 제가 살아 있다는 사실만큼은 알려드려야 해요.”
저는 솔직해요. 물론 그 솔직함이 늘 아름답지만은 않죠. 기쁜 일도 있고 슬픈 일도 있지만, 그게 바로 삶이잖아요.
하이넥 드레스는 Gucci. 하이 주얼리 이어링은 Bvlgari.
진단을 받은 뒤 셀린은 강도 높은 재활에 매달렸다. 새로운 약물 치료를 시작하고 물리 치료와 발성 치료, 면역 치료를 병행했다. 현재 강직인간증후군에는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승인한 치료법이 없다. 이에 셀린의 재단은 2024년 자가면역성 신경질환 연구를 위해 200만 달러를 기부했다. 파리 공연을 앞둔 지금도 재활은 계속된다. 일주일에 세 번, 90분씩 필라테스를 하고 또 다른 이틀에는 지역 발레단에서 발레 수업을 받는다. 셀린은 이 시간을 수없이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는 과정이라고 표현한다. “해낼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일을 끝내 이뤄낸 나 자신이 자랑스러워요. 무엇보다 더는 숨어 지내지 않고 다시 세상으로 나갈 수 있게 됐다는 사실에 기쁨을 느끼고 있죠.” 건강을 회복한 그녀는 성가시고 번거로운 일까지 다시 받아들이며 일터로 돌아왔다. 팬들에게 받은 사랑만큼 자신도 돌려줘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있잖아.”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말하지만, 실은 스스로에게 건네는 충고다. “사인도 해주기 싫고, 예쁘게 단장하기도 싫고, 파스타가 식을까 봐 방해받는 것조차 싫다면 그냥 집에 있으면 돼. 하지만 지금 네게 주어진 삶을 한번 봐.”
드레스는 Gucci. ‘세르펜티’ 이어링은 Bvlgari. 선글라스는 Emmanuelle Khanh X Tracee Ellis Ross. 펌프스는 Santoni.
디온 가족에게 노래는 생업 중 하나였다. 또 다른 생업은 몬트리올에서 차로 약 40분 떨어진 캐나다 샤를마뉴에서 아버지의 피아노 바를 운영하는 일이었다. 가게는 온 가족이 함께 꾸렸다. 오빠들은 피아노를 연주하고 언니들은 노래를 불렀으며, 어머니는 찬물이 담긴 양동이에서 감자 껍질을 벗겨 감자튀김을 만들었다. 어린 셀린도 가끔 한두 곡을 부를 수 있었다. 노래가 끝나면 어머니는 얼른 집으로 돌아가라며 그녀를 쫓아보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손님들이 전화를 걸어 “오늘 그 꼬마가 노래하나요?”라고 묻기 시작했다. “열 살짜리 아이가 바에 있었던 거예요. 체포될 수도 있었죠.” 셀린이 말을 잇는다. “하지만 아세요? 경찰관들도 와서 우리와 함께 노래했어요.” 미소를 지은 그녀가 덧붙인다. “그땐 범죄도 지금처럼 많지 않았으니까요.” 셀린의 삶은 음악 프로듀서 르네 앙젤릴(René Angélil)을 만나면서 180도 달라졌다. 르네는 셀린이 열두 살일 때부터 매니저를 맡았고, 셀린이 열아홉 살이던 때 두 사람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1994년, 당시 스물여섯 살이던 셀린과 쉰두 살의 르네는 몬트리올 노트르담 대성당(Notre-Dame Basilica of Montréal)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은 TV로 중계되며 큰 관심을 모았다. 두 사람의 스물여섯 살 나이 차이를 바라보는 세간의 시선은 곱지 않았지만, 이들은 르네가 2016년 인후암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행복한 결혼 생활을 이어갔다. 셀린은 열세 살에 첫 싱글을 발표하며 퀘벡의 스타로 떠올랐고, 캐나다 전국 무대에서 프랑스어권을 대표하는 가수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스무 살이던 1988년에는 스위스 대표로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Eurovision Song Contest)에 출전해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국적 제한이 없는 유로비전에서는 참가국이 외국인 가수를 자국 대표로 선발할 수 있다). 이후 셀린은 영어로 음악을 녹음하기 시작했다. 1990년 첫 영어 앨범 <Unison>을 발표하며 영어권 시장까지 사로잡았고, 세계적인 스타로 도약할 발판을 마련했다. 하지만 영어로 성공을 거둔 뒤에도 프랑스어를 향한 애정은 변하지 않았다. 세 아들과는 오직 프랑스어로만 대화하고, 영어와 스페인어는 학교에서 배우도록 했다.
케이프, 스커트, 펌프스는 모두 Valentino. 하이 주얼리 ‘세르펜티’ 네크리스는 Bvlgari.
그 이후는 모두가 아는 이야기다. 수많은 차트 1위 곡과 베스트셀러 앨범, 그래미상, 그리고 전 세계를 누빈 월드 투어. 셀린은 팝 음악계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올랐다. 아레사 프랭클린, 휘트니 휴스턴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디바로 인정받으며 폭발적인 가창력을 지닌 다음 세대 가수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호주의 싱어송라이터 시아는 10대 시절 셀린의 콘서트 영상을 보고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순간을 떠올린다. “어느 순간 셀린은 무대 위 모든 악기의 소리를 목소리로 표현하기 시작했어요. 베이스 솔로에 이어 플루트와 기타 솔로, 드럼 연주까지 차례로 흉내 냈죠.” 시아가 이어 말한다. “그 장면은 제가 가수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순간 중 하나였어요.” “제가 발라드를 사랑하게 된 건 분명 셀린 덕분이에요.” 아델이 말한다. “셀린은 정말 드라마틱하죠. 저도 감정을 극적으로 표현하는 걸 좋아하고요.” 라스베이거스 레지던시 공연을 하던 어느 날 밤, 아델은 객석에 앉아 있는 셀린을 발견하자 눈물을 터뜨렸다. 결국 무대 아래로 내려가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아델이 이처럼 대규모 레지던시 공연을 펼칠 수 있게 된 것 역시 셀린이 남긴 유산이다. 2003년부터 2007년까지 이어진 <A New Day...>는 라스베이거스 레지던시 공연의 개념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더 이상 전성기가 지난 스타들의 마지막 선택지가 아니라, 기록적인 흥행을 거둘 수 있는 초대형 쇼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케이프는 Givenchy by Sarah Burton. 하이 주얼리 이어링은 Bvlgari.
셀린의 삶에 눈부신 성공의 순간이 있었다면, 그만큼 깊은 상실도 뒤따랐다. 2016년에는 불과 이틀 사이에 남편과 오빠를 차례로 떠나보냈다. 2003년에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날 밤에도 무대에 올랐다. 셀린은 슬픔을 억누르는 대신 그 감정 속으로 뛰어들어 노래했다. 그럴 때마다 수십 년간 자신을 지탱해온 팬들이 그녀를 받아주었다. 셀린은 힘들 때마다 무대와 팬들 속에서 다시 일어설 힘을 얻었다고 거듭 이야기했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사람들은 왜 이토록 셀린을 사랑하는 걸까?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긴 뒤 말한다. “아마 제가 무엇이든 숨기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겠죠.” 셀린은 모든 것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살아야 하는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마음속 이야기를 혼자 품고만 있다면 자기다운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저는 솔직해요. 물론 그 솔직함이 늘 아름답지만은 않죠. 기쁜 일도 있고 슬픈 일도 있지만, 그게 바로 삶이잖아요.” 그 사실은 셀린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삶을 따져 묻기보다 그냥 살아보면 안 될까요? 그래서 저는 제 삶을 살고 있어요. 제대로 살아가고 있죠.”
Credit
- Photographer/ Robin Galiegue
- Stylist/ Malina Joseph Gilchrist 드레스
- 헤어/ Shay Ashual
- 메이크업/ Lauren Parsons
- 프로덕션/ Casa Projects
- 촬영 협조/ Caesars Palace Las Vegas
- 글/ Jazmine Hughes
- 번역/ 채원식
- 에디터/ 김경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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