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부산을 기반으로 작업하는 예술가, 김도플

설치와 조각에 이어 지금과 같은 8-90년대 애니메이션 기반의 회화 작업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

프로필 by 고영진 2026.05.24

부산에서 그리다


지척에 바다가 있다. 숨을 크게 들이쉬면 짭짤한 내음이 난다. 올해 아트부산에서 만나게 될 세 명의 부산 작가 방정아, 김도플, 김은주의 작업실은 그런 곳이다.


김도플

조각, 설치 등 다양한 형식을 시도해오다 2023년부터 본격적으로 회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부산에서 목도한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풍경, 그로부터 시작된 인간다움에 대한 고민은 작업의 바탕이 된다.


하퍼스 바자 작업실이 있는 사하구 다대포는 관광객이나 20~30대 젊은 층보다 노인의 비율이 현저히 높은, 옛 부산 풍경을 간직하고 있는 동네예요.

김도플 10여 년 전 런던, 프랑크프루트 같은 큰 도시에서 유학 생활을 했었어요. 5년 정도 나가 있다 부산에 돌아오니 그렇게 익숙했던 이곳이 생경하게 느껴지더라고요. 부산도 큰 도시이고 크고 작은 변화를 수용하며 많이 바뀌었지만, 여전히 예스러운 풍경을 쉽게 볼 수 있는 곳이니까요. 잘 알려진 비석문화마을, 감천문화마을만 봐도 그렇죠. 지금도 중앙동에는 옛 시청 일대의 오래된 건물들이 테트리스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고요, 거의 수직에 가까운 경사로 계단도 심심찮게 보여요. 특히 다대포는 요즘 지방 소도시에서 자주 거론되는 인구 소멸, 고령화, 도시 재개발 같은 문제가 일상이 되어버린 곳이죠. 한동안 올해 이 동네에 초등학교 신입생이 딱 한 명이라는 소문이 돌았을 정도로 젊은 세대보다는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훨씬 많으시거든요. 자연스레 작업할 때도 사라지는 것들과 남겨진 것을 나란히 두는 상상을 자주 해요. 제가 젊은 작가가 아니라서 그런지.(웃음) 딱 이 정도의 속도가 좋은 것 같아요.

하퍼스 바자 개인이 운영하는 상가를 작은 전시장으로 만든 ‘다대포 엑스 윅 아트 페스티벌’이나 키오스크 사용을 어려워하는 동네 어르신을 위해 키오스크를 예술 작품처럼 소비하도록 기획한 전시 «키오스크 트레이닝 센터»처럼 미술 작업 외에 지역 주민과 직접적으로 교류하는 예술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죠.

김도플 이제 막 40대가 된 저는 이 동네에 남아 예술 작업을 하는 작가로서 우리 아버지 세대의 삶이 이 지역 안에서 어떻게 변화되어 가고 있는지를 가장 가까이서 목격하며 살고 있어요. 가끔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이 있고, 부딪히기도 하지만 그 역시 이 도시의 풍경이라고 생각하며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고요. 단순히 어른을 공경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에요. 예술 작업의 키워드로 화합, 연대를 떠올리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우리 부모 세대와도 하나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거죠. 미술 작업이 아닌 프로젝트성 기획을 꾸준히 시도한 이유이기도 해요.

하퍼스 바자 하지만 1980~1990년대 애니메이션을 기반으로 한 최근의 회화 작업은 정반대의 분위기를 띱니다. 이번 아트부산에 출품한 <Untitled(Superimpose)>처럼 디지털 영상 송출 오류 화면 같기도 한 작품에서는 앞서 언급한 부산의 정겨운 정취보다는 디스토피아적 세계에 가까워 보여요.

김도플 사회 안의 개인은 필연적으로 단절되어 있고, 그로 인한 우울과 어둠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화면에도 그런 분위기가 묻어나는 것 같아요. 저는 주로 과거에는 사랑받았으나 이제는 관심 밖으로 밀려나 시야에서 사라져버린, 하지만 온라인 세상 어딘가에는 묵묵히 존재하는 이미지에 관심이 많아요. 단순히 유행 지난 과거 세대의 산업물이 아니라, 한 시절 많은 사람들이 꿈꿨던 미래의 모습이 집약되어 있는 결과물이라고 생각해요. 대표적으로 애니메이션이 그렇죠. 특히 1980~1990년대 OVA 애니메이션(Original Video Animation, TV 방영이나 극장 개봉을 거치지 않고 처음부터 비디오로 제작된 애니메이션)은 대부분 수작업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 시대의 물성이 강하게 느껴져요. 그런데 사실 영상은 멈춰 있는 수백, 수천 개의 정지된 프레임이잖아요. 누군가의 꿈이었던, 가능성의 흔적 같은 그 시절 애니메이션도 결국 그림에서와 같은 낱낱의 프레임이 모인 결과예요. 각 프레임은 결코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고, 다음 프레임이 왔을 때 비로소 자기 위치나 존재를 인식하고 증명할 수 있어요. 저는 이 방식이 인간에게도 적용된다고 생각했어요. 누구나 세상이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느끼겠지만, 우리는 그저 앞뒤 세대와의 연결선상에 놓인 존재일 뿐이죠. 그러니까 저는, 이 디스토피아적 세계 안에서 빨리 손을 잡고 싶은 거예요. 사람과 사람, 세대와 세대 사이 단절을 뛰어넘어 연결되고 싶은 거죠.

하퍼스 바자 그렇다면 왜 회화여야 했나요? 디지털 이미지를 그대로 가져와 이어 붙일 수도 있었을 텐데요.

김도플 인간의 감각은 기술이 진화하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잖아요. 그런데 저에게 있어 회화는 그 어떤 매체보다도 인간의 시간 개념을 가장 밀접하게 공유하고 있는 장르예요. 물리적으로 충분한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니까요. 빠르게 지나가 버리는 디지털 이미지와 그것을 접할 때 느껴지는 감각을 다시금 인간의 속도로 바라보게 만들어주는 것이 회화라고 생각해요. 속도를 늦추는 일종의 장치 같은 거죠.

하퍼스 바자 또 다른 출품작 <Method Pracitce> 시리즈는 캔버스 위에 서로 다른 시공간의 화면이 중첩된 듯한 장면을 연출합니다. 만화적 이미지 중에서도 매서운 눈매, 화면을 가로지르는 직선들, 강렬한 색채처럼 날카로운 요소를 주로 차용하고 있고요.

김도플 말씀해주신 요소들은 전혀 연결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게 뚝뚝 끊어진 화면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길 바랐어요. 그 힌트는 제목인 ‘Method Practice’에 있고요. 흔히들 말하는 ‘메소드 연기’로부터 나온 제목인데, 메소드 연기라는 게 결국 다른 사람이 되는 연기의 한 방법이잖아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이라 할지라도 연기를 하는 그 순간만큼은 기꺼이 그 사람을 받아들여 보는 거죠. 제가 작품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에요.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지만,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세요. 말하자면 제 그림은 누군가를 이해하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 그림들 앞에서만큼은 앞, 뒤, 처음과 끝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그냥 경험해 봤으면 좋겠어요. 이성적으로 모든 단서를 읽으려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에요.

하퍼스 바자 결국 당신에게 회화는 부모, 서로 다른 세대를 이해하고 연결되려는 시도인가요?

김도플 우리는 관계나 욕망, 지금 나를 둘러싼 세계가 계속될 거라고 믿으면서 사는 것 같아요. 하지만 인간은 끝이 있는 존재고, 그 유한함을 인식하는 순간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고 생각해요. 인간다움이라는 것은 어쩌면 그 끝을 알고도 소중하게 여기며 사랑하려는 태도이지 않을까요? 이런 생각들을 화면 위에다 표현하기 위해 고민하고 있어요. 이쯤에서 제 작가명을 말씀드리는 것이 도움될 것 같은데, 어렸을 때 누군가 저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했던 작은 사건이 있었어요. 그 경험 이후로 ‘또 다른 나’라는 개념에 끌려 도플갱어라는 개념까지 오게 됐고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허구에 대한 개념인데, 이상하게도 저는 거기에 예술을 설명하는 힘이 있다고 생각해요. 현실과 허구 사이에서 삶을 설명하는 것이 예술이 하는 일이잖아요. 도플은 독일어로 ‘Doppel’, 영어로 ‘Double’이라는 뜻이거든요. 실재와 허구, 작업하는 나와 일상을 사는 나, 나와 타인, 이 세대와 저 세대. 무엇이든 하나로 엮으려는 시도이기도 해요.

하퍼스 바자 요즘은 캔버스 위에서 어떤 시도를 하는 중인가요?

김도플 우리 아버지 세대가 사용했던 삶의 전술들을 흥미롭게 보고 있어요. 예를 들면 ‘육참골단’ 같은 일본식 표현들. “살을 내어주고 뼈를 취한다”는 뜻인데 제 삶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전술이라고 보거든요. 요즘은 나의 것을 내어주는 건 무조건적으로 손해라는 인식이 있잖아요. 하지만 저는 구시대적이며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그들의 판단이 우리가 미래에 목도하게 될 문제들을 해소하는 방법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요. 관람객이 나처럼 이러한 삶의 전술에 눈뜨게 만들게 하기 위해, 나는 어떤 예술적 화면으로 이 전술들을 구현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중이에요.

Credit

  • 사진/ 영배
  • 디자인/ 이예슬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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