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신, 삶이 예술이 된 아티스트
구순을 넘은 작가의 첫 번째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다. 이 계절은 김윤신의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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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 삶이 되자, 삶은 다시 예술이 되었다
구순을 넘긴 조각가가 생애 최초의 대규모 회고전을 열었다. 이 계절은 김윤신의 봄이다.
벚꽃이 흐드러진 호암미술관 정원에서, 김윤신.
카메라 앞에 선 김윤신이 지팡이를 짚고 전시장을 천천히 걸었다. 구순이 넘은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자세가 꼿꼿했다. 미술관 관계자는 영화감독 임선애가 선생님을 기록하는 다큐멘터리를 촬영 중이라고 귀띔했다. 이 작품의 예고편격인 특별 영상이 호암미술관에서 열리는 김윤신 회고전에서 선보이고 있다. 17분 남짓한 영상은 주로 작가의 파주 스튜디오에서 촬영되었는데, 여전히 작업을 지속하는 작가의 여느 날과 한국과 지구 반대편의 머나먼 이국 그리고 다시 한국으로 이어지는 삶의 궤적이 교차 편집되어 보여진다. 영상에서 김윤신은 평면회화 작업을 하던 중 갑자기 작업을 멈추고 의자를 뒤로 쭉 빼서 그림에서 몇 발짝 멀어진 채 작업을 응시한다. “조각은 그 자체가 공간을 흡수하고 있어서 멀리서 보지 않으면 몰라요. (회화 작업을 할 때도) 그 습관이 남아 있는 거예요.”
김윤신은 별도의 스케치나 구상을 거치지 않고 작업한다. 합이합일, 분이분일. “서로 다른 둘이 만나 하나가 되고, 그 합이 둘로 나뉘어 각각 또 다른 하나가 된다”는 작업 이념대로 며칠이고 재료를 바라보다가 마침내 그것과 자신이 하나가 되었다고 느끼는 순간, 나무를 잘라 공간을 낸다. 관객에겐 두 가지 질문이 남는다. 작가가 바라보고 있던 저기 저곳은 어디인가. 우리는 어디를 바라볼 것인가. “뚫린 형태부터 공간이 먹어 들어간 자리까지 가장 적절하게 잘 보이는 거리가 있어요. 그걸 모르면 아무렇게 볼 수밖에 없어요. 밑에서 올려보는 것이 좋을 수도,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이 좋을 수도 있죠. 사방팔방을 얼마만큼이나 느끼게 만드는지가 중요해요”
이를테면 1970년대 중후반의 작품 <기원 쌓기> 연작은 하늘을 향한다. “어릴 적 매일 새벽이 되면 어머니가 저를 데리고 산에 가셨어요. 작은 돌을 하나 찾으면, 어머니가 그 위에 촛불을 켜고 기도를 하셨어요. 촛불이 다 꺼지면 저는 또 다른 돌을 가져와 그 위에 얹고, 어머니는 다시 불을 붙이셨죠.” 1969년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파리 유학에서 돌아온 김윤신은 하늘을 향해 기도하던 엄마의 모습에서 추상을 건져 올렸고 하나하나 쌓아 올린 돌탑의 형태는 이후 <합이합일 분이분일> 연작으로 이어지며 김윤신의 예술 세계를 관통했다. 나는 아주 낮은 조각들에 매료되었다. 밑둥만 남은 나무가 5개의 면으로 잘려서 땅 밑으로 흘러내리는 듯한 1992년작이나 모양과 크기가 서로 다른 10개의 퍼즐 조각이 마치 인력처럼 서로를 끌어당기는 1988년 작품이 특히 그랬다. 관람객의 무릎 아래 놓인 이 조각들은 그 자체로 사람을 성찰하게 만든다. “내 작품은 모두 기도”라는 김윤신의 말처럼, 공간을 따라 자연스럽게 아래로 미끄러진 내 시선은 이내 간구하는 자의 것이 된다.
<합이합일 분이분일(合二合一分二分一) 1979>, 1979, 소나무, 130x30x25cm, 개인 소장. © Kim Yun Shin 사진: 전명은, 호암미술관 제공
한국의 원산, 안변, 서울, 부산, 프랑스 파리,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멕시코 테칼리 데 에레라, 브라질 솔레다데, 그리고 다시 한국의 양구와 파주에 걸친 여정에 대해 김윤신은 이렇게 답했다. “이렇게 해야겠다, 저렇게 해야겠다의 문제가 아니었어요. 그저 살아남기 위한 것이었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해방이 되자, 아들이 남쪽에 있다는 소식을 들은 김윤신의 모친은 딸의 손을 붙들고 38선을 넘었다. 겨우 서울로 왔건만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독립군으로 활동하던 오빠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열 몇 살의 어린 윤신은 군인들의 시체 더미를 뒤졌다. 생사를 위협받던 한국전쟁이 끝나고 나니 그다음부턴 여성 예술가로서의 존재를 증명하는 분투의 나날이었다. 마흔아홉 살 어엿한 대학 교수 자리를 때려치우고 아르헨티나로 떠난 것도 그런 이유였다. 그곳에서 고락을 함께한 오랜 제자이자 조력자 김란 김윤신미술관 관장이 거들었다. “1970~80년대엔 여자 교수가 흔치 않았을뿐더러 아예 되기조차 어려웠어요. 그런데 그 시대에 해외 유학까지 하고 온 여성이었죠. 게다가 선생님은 그 시절에 무릎 위까지 올라오는 미니스커트에 부츠를 신고 가죽 재킷을 입고 다니셨어요. 담배까지 피우셨고요. 기득권 남성들이 보기엔 얼마나 싫었겠어요. 교수 역할도 그렇고요. 본인은 조각가인데 조각할 시간은 없고. 선생님도 지치셨던 것 같아요.”
<합이합일 분이분일(合二合一 分二分一) 1989-211>, 1989, 오닉스, 45x87x55cm, 김윤신조형예술연구소 및 리만 머핀 제공. © Kim Yun Shin 사진: Studio Kukla 작가, 국제갤러리, 리만 머핀 제공
1983년 12월 겨울방학, 상명여대 조각과 교수로 재직 중이던 김윤신은 나무가 아주 좋다는 조카의 말에 아르헨티나를 방문했다가 이국의 풍요로운 자연과 아름드리 나무에 매료되어 그곳에 정착했다. 남미의 나무는 크고 단단했고 그래서 전기톱을 들었다. 덕분에 조각도 한층 더 역동적으로 발전했다. 하루 종일 굉음을 내며 나무를 잘라도 마을 사람 누구 하나 뭐라고 하는 이가 없었다. 1989년부터는 멕시코와 브라질 오지의 채석장에 체류하며 돌 조각에 매진했다. 나무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의 고행이었지만 기계로 자르고 정과 망치로 두드려가며 마침내 90여점의 돌 조각을 완성했다. 본래의 껍질을 그대로 남기고 틈을 내어 생명력을 전달하는 나무 조각이 그렇듯 돌 조각 또한 돌 자체의 거친 표면을 살리고 내부를 드러내어 공간을 만들었다. 처음엔 넘실대는 활력에 압도되다가 이내 이 물질이 아주 오래전부터 나와 함께 태어난 사이일 수도 있겠다는 우주적 몽상에까지 당도한다.
<노래하는 나무 2013-16V1>, 2025, 알루미늄에 아크릴 물감, 135x202x56cm, 김윤신조형예술연구소 소장. © Kim Yun Shin 사진: 전명은, 호암미술관 제공
말하자면 돌 조각이 낸 틈은 상상력의 공간이다. 김윤신은 거기에 이름을 새겨 넣었다. 단순한 서명 이상의 조형적 의미가 깃든 김윤신의 인장은 마치 동아시아 고전 회화의 낙관 같은 모양이다. “1960년대 회화 작품에도 그런 서명이 들어가 있어요. 처음에는 고무로 만들어서 찍다가 조각을 하면서 또깍, 또깍 직접 파게 되었죠. 한국 사람이니까요. 옛날 사람들은 도장을 찍었잖아요. 어딜 가나 나는 동양 사람이고 한국 사람이니 그 형식을 따르는 거죠. 그게 나를 말하는 거니까요.” 네모 안에 새겨진 두 글자는 진실 윤, 믿을 신이다. “한국전쟁 당시 부산으로 피란을 가던 중에 절에서 한 스님을 만났어요. ‘학생, 이름이 뭐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그러더니 제 이름의 ‘정’ 자를 ‘진실 윤’ 자로 고치라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죠. ‘꼬마야, 너는 우리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네 마음이 어디 있는지, 무슨 색깔인지, 뭘 하든 평생 그걸 찾거라.’”
“예술에는 결론이 없다”는 작가의 지론처럼, 어떤 작업들은 한 번에 끝나지 않고 수년에 걸쳐 다듬고 고쳐진다. 심지어 수십 년 동안 안 풀리는 작업도 있다. 김윤신은 지금도 가끔 수장고에서 미완성작을 꺼내어 놓고, 이제는 얼굴도 기억 나지 않는 그 스님의 말을 되새기곤 한다. “내가 요새는 ‘작품이 나 자신이라는 의미’를 찾아가고 있거든요. 어떤 작업이든지 그 속에 내가 있어야 하는 거예요. 진실하게 나를 표현해야 해요. 윤신. 진실 윤. 믿을 신. 그 스님이 지어준 이름으로 지금까지 왔어요.”
<내 영혼의 노래 2013-50>, 2013, 캔버스에 유채, 150x460cm, 개인 소장. © Kim Yun Shin 사진: 김윤신조형예술연구소, 작가 제공
그렇게 70여 년 축적된 예술적 결실을 생애 최초의 대규모 회고전으로 선보이게 된 작가는 그저 모든 게 하늘의 은혜라고 말했다. “내 평생 회고전을 할 수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했어요. 아르헨티나에서 한국까지, 비행기를 타고 왔다갔다하기도 먼 길이라 한국은 이제 마지막이겠거니 싶었던 게 몇 해 전이에요. 아르헨티나에 묫자리도 봐두었었는데, 이번에 돌려줬어요. 평생 나이하고 관계없이 살아온 사람인데 이제는 병원에 들락날락하느라 힘에 좀 부쳐요. 딴 건 욕심 가는 게 없는데, 더 건강해진 다음에 어서 좋은 작품을 남기고 싶어요. 그게 은혜 갚는 길 같아요. 이번 전시가 끝나면 본격적으로 작업을 다시 시작해야죠.”
김윤신은 지금도 매일 스튜디오로 출근한다. 교수 시절에도 이른 아침 수업에 지각할 만큼 아침잠이 많았다는 작가는 지금도 느지막이 10시쯤 기상한다. 11시 반쯤 연구실에 도착해서 작업을 시작하고, 저녁 6시쯤 퇴근한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집에서 다시 그림을 그린다. 새벽 1시, 어떤 날은 새벽 3시까지 작업이 계속된다. 김란 관장이 웃으며 덧붙였다. “‘그만 주무세요!’라고 하지 않으면 아마 밤새실 거예요.”
2023년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더하고 나누며, 하나»는 한국 미술계가 김윤신을 발견하게 된 결정적 계기였다. 이 전시 이후 한국행을 결정한 작가는 양구에 위치한 박수근미술관 레지던시를 거쳐 2년 전 파주 스튜디오에 정착했다. 그런데 스튜디오는 전기톱을 사용할 수 없다는 단 하나의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최근 들어 작가가 손에서 전기톱을 내려놓은 것이 건강상의 이유일 거란 나의 오해는 기분 좋게 깨부숴졌다. “열린 공간이 아니라 공기 순환이 안 되고, 출판 단지 안에 있다 보니까 업무 시간엔 시끄러운 소리도 낼 수 없고요.” 김란 관장이 덧붙였다. “이번 전시가 끝나는 대로 전기톱 작업을 재개할 수 있도록 다른 장소를 알아봐 두었어요. 선생님이 계속하고 싶어 하세요.”
호암미술관 2층 전시실, 김윤신이 지팡이를 짚고 작품 사이를 천천히 걸어가는 모습.
한동안 한국의 정치 상황에 속앓이를 했던 김윤신은 요새 미국과 이란 전쟁으로 걱정이 크다고 했다. 작업 외의 것에 시간을 쏟는 일이 거의 없는 작가는 유튜브로 간간이 뉴스를 접하며 세상 일에 관심을 기울인다. 자연을 탐구하는 예술가는 은거자일 수 없다. 생명을 노래하는 작업은 본질적으로 동시대성에 가닿아 있다. 김윤신 또한 마찬가지다. 한국의 소나무든 아르헨티나의 알가로보든 멕시코의 오닉스든 발붙이고 사는 지역의 재료를 활용한 것은 물론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전 세계가 멈추었을 때에는 새로운 시도를 밀어붙였다. “밖에 나갈 수조차 없으니 조각용 원목 재료를 구할 길이 없었죠. 마침 동네에서 버려진 판자들을 모아 놓은 게 생각났어요. 그곳 나무가 워낙 튼튼하다 보니 송판도 괜찮다 싶어서 주워 놨는데 뜻밖의 쓸모가 생긴 거죠. 곱지 않고 거친 나무였지만 재미있었어요. 어린 시절이 떠올라 이리저리 돌려가며 색깔을 넣어봤죠.” “안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어요. 주변에 친구가 없으니 자연과 더불어 놀았죠. 산과 들과 벌판과 논밭 모든 게 다 내 친구였어요. 울타리에 수수 줄기가 올라오면 껍질을 벗겨서 그 하얀 수수깡으로 안경을 만들고 마차도 만들었어요. 내 생활의 전부였죠. 밤이 되면 웅크리고 누워서 하늘을 올려다봤어요. 손을 뻗으면 붙잡힐 것 같은 별들이 밤하늘에 꽉 차 있었죠. 제일 반짝이는 별, 덜 반짝이는 별…. 별들에 이름을 붙여주곤 했어요. 깜빡이는 빛을 보며 혼자 말을 걸었죠. ‘너희들은 지금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니?’”
2층 전시실에서 만날 수 있는 2020년대 이후 폐목재 조각들은 이렇게 탄생했다. 그동안 큰 나무를 잘라서 공간을 내왔다면 이번엔 작은 나무를 붙이면서 공간을 만드는 정반대의 방식이었다. 채색된 조각은 마치 2차원의 추상이 3차원으로 튀어나온 듯 보인다. 사실 팬데믹이라는 제약에서 촉발하긴 했지만 김윤신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 개념을 내재화하고 있었다. 1973년 제12회 상파울루 비엔날레 출품작 <평화를 사랑하는 자유인들의 영원한 수호신>이 그 증거다. 만약 어린아이가 “할머니, 회화-조각이 뭐예요?”라고 묻는다면 “입체 속에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란다”라고 대답하겠다는 작가의 말마따나, 십자가 형상으로 쌓아올린 나무 상자 표면을 한지에 찍은 판화가 감싸고 있다. 조각의 면면이 그림이 되고 그림의 면면이 조각이 된다. 김윤신이 추구하는 ‘회화-조각’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이번 회고전의 마침표라고 할 수 있는 2025년작 <노래하는 나무 2013-16V1>에서 작가는 안데스산맥의 웅장한 생명력을 담은 2013년 나무 조각을 알루미늄 캐스팅한 뒤 여기에 한국의 오방색 같기도 하고, 마푸체의 원색 같기도 한 강렬한 색채를 자유롭게 펼쳐 놓았다. 새로운 예술 형식을 향한 작가의 집념과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열 살짜리 아이의 마음이 모두 거기 담겨 있었다. 삶이라는 예술 속에.
※ «김윤신: 합이합일 분이분일»은 호암미술관에서 6월 28일까지 열린다.
손안나는 <바자 아트>의 편집장이다. 김윤신 선생님의 곱고 보드라운 손을 맞잡은 순간, 직감했다. 나는 이 온기를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이다.
Credit
- 사진/ 이우정(인물)
- 디자인/ 이예슬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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