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상호가 영화 '얼굴'로 실험해보고 싶었던 것
그리고 극장 영화만이 해낼 수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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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사랑하는 마음
“영화는 예술과 삶의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 것이다.” 장 뤼크 고다르의 이 말처럼, 지금 우리가 마주할 세 편의 영화는 그 본질에 닿고자 하는 증거일지 모른다. 극장이 사멸해가는 시기, 그럼에도 우리를 끊임없이 영화의 세계로 끌어들이고 그 안에서 살아가게 만드는 세 감독의 목소리.
자켓은 C.P.Company. 팬츠는 Cos. 셔츠, 안경, 타이, 슈즈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극장에는 극장만의 형식미가 있어요. <얼굴>은 시각적 스펙터클이 크지 않지만, 감정적 스펙터클을 경험할 수 있는 영화예요. 토론토영화제에서 <얼굴>을 상영하면서 분명히 알게 되었어요. 배우들의 연기를 갇힌 공간에서 아주 큰 화면으로 볼 때 느껴지는 감흥이란 게 존재해요.
넘나드는 이야기꾼, 연상호
아름다움에 집착하는 시각장애인. 첫 장편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던 신인 감독 연상호는 어느 날 이 역설적인 인물을 떠올렸다. 내가 또 쓸 수 있을까? 화려한 외연과 달리 지독한 불안증을 앓고 있던 당시의 그를 가장 자유롭게 만드는 이야기였다. 평소 동경하던 창작 형태인 만화로 완성한 이 이야기는 그 후로 오랫동안 투자처를 찾지 못했다. 2025년 이 이야기가 극장에 걸린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애니메이션도 아닌 실사 영화, OTT도 아닌 영화관이라니. 의외였다. 감독 입장에선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그것이 알고 싶다>를 보고 다소 충동적인 결심을 한 탓이었다. 유튜브 영상이나 르포르타주 다큐멘터리, 시사 프로그램보다 더 재미있는 영화를 만들기로.
남한테 폐 끼치지 말고 직접 해보자고 마음먹었다는 연상호는 그렇게 20명의 소수 정예 제작진과 13회차의 짧은 촬영으로 영화 <얼굴>을 완성했다. 요즘 한국 영화의 평균 순 제작비는 10억원, 독립예술영화의 경우엔 4억원 정도. 배급사는 정확한 숫자를 밝히길 꺼려했지만, 일반적인 독립예술영화보다도 적은 제작비였다. 그럼에도 저예산 영화 특유의 시각적 느슨함이 없다는 말에 연상호가 웃었다. “다들 프로니까요.” 마치 KBS 총파업 당시 젊은 PD들을 대신해 현장을 떠난 지 오래던 부장 PD들이 카메라를 잡았던 전설의 ‘부장 뱅크’ 같은 이치다. 이를테면 <계시록>의 변봉선 촬영감독이 하루 품앗이로 B캠을 잡는 식. 대신 모든 배우와 제작진이 업계 일반 수준의 임금과 러닝 개런티 형식으로 인건비를 받았다. “녹음기사님도 혼자 현장에 오시고 소품 실장님은 오랜만에 직접 짐을 들고 오고 그랬죠. 옛날로 돌아간 느낌이라 다들 재밌어 했어요. 얼마 전에 미술감독님이 그러더군요. 이런 영화 한 번 더 해보고 싶다고요. 저도 그래요.”
<얼굴>은 시각장애를 가진 전각 장인 임영규(권해효)와 그의 아들 임동환(박정민)에게서 출발한다. 어느 날 동환은 40년 전 실종된 어머니 정영희(신현빈)의 백골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처음으로 어머니의 얼굴이 궁금해진 그는 다큐멘터리 PD인 김수진(한지현)과 함께 어머니의 죽음에 감춰진 진실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극 중 영규와 동환은 각각 고도성장 시대와 오늘날의 한국 사회를 의인화한 인물이기도 하지만, 상징과 은유는 차치하고 그저 장르적 호기심만 장착하고 이야기를 따라가도 충분하다. ‘누가 죽였을까’로 시작한 궁금증은 마침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 인간다움이란 존재론적 질문으로 귀결된다. 이어지는 인터뷰에서 연상호가 말했듯 규모의 스펙터클이 힘을 잃은 시대. 영화는 오직 감정의 스펙터클로 관객을 끝까지 밀어붙였다. 이 이야기는 극장이어야만 했다. 연상호의 영화 실험은 성공했다.
(아래의 대화엔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참고할 것.)
하퍼스 바자 인터뷰가 업인 사람으로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영화가 인터뷰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에요. 극중 다큐멘터리 PD가 여러 인물을 차례로 만나서 질문하며 서서히 진실에 가까워지죠. 왜 이런 형식을 차용했나요?
연상호 <그것이 알고 싶다>를 자주 보는데, 그 프로그램은 구성을 정말 잘 짜요. 알고 보면 별것 아닌 내용인데도 정보를 전달하는 방식에 따라 빠져들 수밖에 없게 만들 때가 있어요. 문득 제가 써 둔 그래픽 노블이 떠올랐죠. 이 이야기를 저렇게 르포 형식으로 만들어보면 어떨까. 원래 미스터리는 하나의 궁금증을 던지고 그것을 해소하면서 끝나는데, 이 영화는 미스터리의 주체가 계속 바뀌어요. 그러면 이 과정은 매우 간결하게 설정되어야 하죠. 기존의 미스터리 구조로는 늘어질 수밖에 없거든요. 그래서 인터뷰 형식으로 급선회했죠.
하퍼스 바자 이 영화에 나오는 네 개의 인터뷰는 각각 네 개의 질문을 품고 있어요. 하나의 인터뷰는 결국 하나의 질문을 품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 영화가 딱 그랬죠.
연상호 ‘왜 죽었는가’로 시작해서 ‘누가 죽였는가’로 넘어가고, ‘어떻게 생겼길래’로 갔다가 다시 ‘왜 죽였는가’로 이어지죠. 인터뷰가 끝난 다음 이어지는 클로징 멘트에서 관점이 완전히 뒤바뀌는 느낌이 들고요.
하퍼스 바자 저도 <꼬꼬무(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를 즐겨 봐요. 정보를 떡밥처럼 조금씩 던지니까 어느새 호로록 빠져들게 되더군요.
연상호 맞아요. 그런 콘텐츠들이 제게 영향을 미쳤어요. 소위 영화의 법칙이라는 게 존재하죠. 다른 매체에서는 그 법칙이 점점 파괴되고 있어요. 요즘 유튜브 영상이나 르포르타주 다큐멘터리, 시사 프로그램이 꼭 영화적 형식을 따르진 않잖아요. 우리는 그런 콘텐츠를 그냥 즐기죠. 사실 그 법칙이란 것도 처음엔 그저 이야기를 재미있게 전달하기 위해 고안된 것뿐이지요. 유튜버들은 영상을 업로드하고 그에 대한 피드백을 실시간으로 주고받지만, 영화는 산업의 규모가 큰 만큼 아무래도 반응이 좀 느려요. 제 영화가 기존의 그런 법칙을 깨는 방식으로 만들어져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는데, <얼굴>을 통해 가능성을 시험해볼 수 있었어요.
하퍼스 바자 요즘 인기 있다는 웹소설을 보면서 형식 파괴가 무엇인지 실감하곤 해요. 이야기의 형식이 완전히 재편되고 있어요. 뉴미디어에 상당히 열려 있는 편이죠?
연상호 뉴미디어의 양상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위기감이 있어요. 뉴미디어가 하는 실험 그 이상의 것들을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지 않을까. 예를 들어, 제 딸이 유튜브를 많이 봅니다. 사실 영화나 옛날 어린이 방송 프로그램과 비교했을 때 퀄리티가 다소 낮은 편이지만, 요즘 아이들은 그런 점을 전혀 신경 쓰지 않더라고요. 사실 제가 봐도 재밌어요. 예전에는 극장에서 보는 스펙터클이 경외의 대상이었지만, 요즘 세대, 특히 제 딸처럼 어린아이들은 스펙터클에 대한 경외가 없더라고요.
하퍼스 바자 그런가요? 숭고에 대한 끌림은 인간의 본능이잖아요?
연상호 그게 구현되는 것이 너무 당연한 시대니까요. 우리 때는 <쥬라기 공원> 같은 영화가 나오면 “공룡을 어떻게 저렇게 만들었지?” 하는 놀라움이 있었거든요. 요즘 애들은 “뭐 어떻게 만들었겠지”라고 해요. 신기한 영상들이 이미 너무 많으니까요. 숭고한 것이 의외로 중요하지 않은 상태까지 와버린 것 같아요. 한국 영화도 마찬가지예요. 과거에는 할리우드가 하는 것을 우리도 따라 하려는 시도들이 있었잖아요. 그런데 어느 시점을 지나니까 그게 전혀 신선하지 않은 거죠. 스펙터클을 너무 쉽게 만들어내는 시대가 되다 보니 오히려 말하고자 하는 내용에 더 집중하게 되는 것 같아요.
하퍼스 바자 역설적이네요. 기술이 이만큼 발전한 뒤에 결국 가장 집중하는 건 이야기라는 점에서요. 당신이 생각하는 재미있는 영화란 어떤 건가요?
연상호 물론 저는 장르적 속성을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하지만 이제는 그 장르적 속성을 관객에게 어떤 방식으로 전달하느냐가 더 중요해졌다고 생각해요. 영화란 결국 어떻게 하면 인공적인 것을 진짜처럼 만들어서 환상을 전달할 수 있을까에 관한 문제인데, 그 방법에 대해 깊이 고민해 봐야겠죠. 극장에는 극장만의 형식미가 있어요. 박정민 씨가 그러더라고요. 책을 읽을 때는 자신이 선택한 속도로 정보를 얻을 수 있고, 거기에서 오는 재미가 따로 있다고요. 마찬가지로, 저는 극장 영화만의 재미도 분명 존재한다고 믿어요. 한동안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OTT에서도 스펙터클을 보여주고, 가정용 TV나 사운드바의 퀄리티가 점점 좋아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장에 가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고요. 그런데 이번에 영화를 통해 다른 가능성을 발견한 것 같아요. 이 영화는 시각적 스펙터클은 크지 않지만, 감정적 스펙터클을 경험할 수 있는 영화예요. 배우들의 연기를 갇힌 공간에서 아주 큰 화면으로 볼 때 느껴지는 감흥이란 게 존재해요. 그래서 많은 관객들이 굳이 극장을 찾아와 이번 영화를 봐주신 게 아닌가 싶어요. 저야 작업실에 있는 TV로 작업했기 때문에 ‘이걸 과연 사람들이 극장에서 볼까?’ 하는 의심이 있었던 게 사실이지만, 이번에 토론토 국제영화제에서 영화를 상영하면서 분명히 알게 되었어요.
하퍼스 바자 감독님은 극장에 영화가 걸리는 것을 목표로 작업하는 사람이죠. 요즘 같은 다품종 소량 생산 시대에 극장용 영화를 만드는 일이 어떤 의미를 담는다고 생각하나요?
연상호 성취주의와 연결되는 이야깁니다만, 한국에서 백만 관객, 천만 관객 같은 수치들도 이제 바뀔 필요가 있어요. 저는 <러브레터>라는 영화를 굉장히 좋아합니다. 새로 자막판이 출시하면 무조건 구매하죠. <러브레터>는 아주 오랫동안 회자될 작품이에요.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한국에서 천만 관객을 동원했느냐,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느냐 따지면 그렇지 않거든요. 영화의 운명은 관객 수와 크게 관련이 없는 것 같아요. 오히려 그 영화를 깊이 있게 감상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가 더 중요한 시대가 되어가고 있어요. 그것이 일종의 팬덤이고요. 요즘 재개봉한 <귀멸의 칼날> 같은 일본 애니메이션이 그런 경우죠.
하퍼스 바자 극중 임영규(권해효)의 직업은 전각 장인입니다. 영화 속엔 누군가의 이름이 새겨진 도장을 빨간 인주에 묻혀 선명하게 찍어내거나, 정영희(신현빈)가 이름 석 자를 정자로 또박또박 써 내려가는 장면이 등장해요. 이 영화에서 얼굴만큼 중요한 키워드가 이름이죠.
연상호 굳이 도장을 선택한 건 이 영화가 한 사람의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도장이라는 사물이 참 재미있어요. 작은 나무 조각일 뿐인데 거기에 이름을 새겨 넣으면 그것이 아이덴티티의 상징이 되죠. 어떤 관객이 묻더라고요. 극 중 정영희가 쓴 글씨에 대해서, 맞춤법은 틀렸는데 그에 비해 글씨체는 왜 이렇게 예쁘냐고요. 사실 글씨를 예쁘게 쓰는 것과 맞춤법을 틀리는 것은 전혀 상관관계가 없어요. 글씨체는 일종의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너무 악필이라 이렇게 말하면 안 되지만….(웃음)
하퍼스 바자 정영희의 글씨처럼 정영희라는 인물 자체도 가시적인 아름다움보단 비가시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죠. 메타적인 질문입니다만 창작자로서 당신은 어떤가요? 많은 영화감독들이 그렇듯 스타일보다 내용에 집중하는 일이 더 의미가 있다고 느끼나요?
연상호 일단 이번 영화는 아주 기본에 충실하게, 담백하게 찍고 싶었어요. 예시로 삼은 작품들도 그랬죠. 최양일 감독의 <피와 뼈>도 참고가 됐고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를 자주 봤어요. 왕가위가 그전에 찍었던 영화들이 아주 스타일리시하다면 <화양연화>에선 확 내려놓은 느낌이 있잖아요.
자켓은 Berluti. 셔츠, 안경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하퍼스 바자 이 영화가 한국의 비극적 현대사를 은유한 작품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여성주의적 관점에서도 생각할 수 있을까요? 세상에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고 주변인으로 치부된 여성의 ‘아무도 모르는 죽음’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저는 이 영화가 버지니아 울프의 실험적인 단편소설 <불가사의한 V양 사건>과 겹쳐 보이더군요. 마치 버지니아 울프 자신을 지칭하는 듯한 V양은 소설 속에서 이름 없는 사람으로 치부되죠. 영희가 얼굴 없는 사람처럼 취급되듯.
연상호 영화에서는 만화에서 부족했던 여성주의적 관점을 보강하려는 시도가 있었어요. 예를 들어 정영희가 대자보를 붙여서 누군가의 범행을 폭로하는 장면요. 만화에선 대자보에 피해자의 이름까지 적혀 있는데 영화에선 그 장면을 뺐죠. 피해자 입장에선 명백한 2차 가해니까요. 만화에선 정영희가 끝까지 남편에게 미안해하는 뉘앙스가 있었다면 영화에서 정영희는 남편의 몸에 흉터를 남기죠. 일종의 저항처럼요.
하퍼스 바자 아버지 임영규와 아들 임동환 두 부자는 그 후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요? 두 사람의 현재 상태가 궁금한 이유는 그 두 사람이 한국 사회를 의인화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부자 관계를 우리 사회의 세대 문제와 겹쳐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연상호 겉으로는 잘 지내는 것처럼 보여도, 진정으로 친밀하게 지내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맹목적인 믿음이 깨졌으니까요.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부서진 신화를 다시 회복하기는 힘들 것 같네요. 그 상태로 데면데면한 관계가 유지될 거고요. 임동환이 실제 제 나이와 비슷한 세대라면, 임영규는 우리 아버지 세대일 텐데요. 흥미로운 점은 모든 세대를 통틀어 이 두 세대가 가장 교류가 적다는 거예요. 아버지 세대와 그 위 세대, 제 세대와 그 아래 세대는 비교적 가까운데, 이상하게도 그 중간만 교류가 딱 끊긴 느낌이에요. 고도성장 사회가 만들어낸 비극이죠. 예를 들어 1970년에서 1985년, 1985년에서 1990년 한국 사회의 변화는 거의 천지개벽 수준이었으니까요.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도 그렇고요. 인터넷이 생겼죠. 저도 당시 전역하고 나니 갑자기 메일 주소를 만들라 그래서 당황했던 기억이 나요.(웃음) 그런데 최근 15년은 그렇지 않죠. 저는 2010년과 2025년이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제 아래 세대와 교류가 잘 된다고 느끼는 건 여전히 비슷한 시대를 살고 있어서인지도 모르겠어요.
하퍼스 바자 새는 얘기지만, 지난 15년간 패러다임에 변화가 없는 게 우리 사회의 문제 같기도 해요. 우리 세대가 여전히 기득권을 점유하니까 이 다음 세대는 여기에 허탈감이나 분노를 느낀다고 하잖아요. ‘영포티’란 조롱 섞인 인터넷 밈이 괜히 나온 게 아니겠죠. 말하자면 동환에게 아들이 태어난다면, 그는 동환을 경멸할 것 같아요.
연상호 그럴 수도 있겠네요.
하퍼스 바자 영화 클라이맥스에서 임영규가 “아름다운 것은 추앙받고 추한 것은 멸시당해”라며 절규하죠. 저에겐 이 말이 “추앙받는 것은 아름답고 멸시당하는 것은 추해”로 들렸어요. 세상의 잣대에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기 쉬운 세상이죠. 심지어 당신은 대중의 평판이나 시장의 숫자가 생존과 직결되는 상업영화계에 몸담고 있어요. 창작자로서 어떻게 중심을 잡나요?
연상호 일단 대중을 타자화하지 않는 태도가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사실 누가 대중인지도 잘 모르겠어요. 저도 대중의 일원이고, 제가 원하는 게 곧 대중이 원하는 것일 수 있어요. 나의 느낌이 남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만 대중 예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한편으론 사람들이 저에게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걸 해보고 싶다는 꿈도 있어요. 이를테면 아주 가벼운 이야기도 만들어고 싶어요. ‘이 사람 왜 이러지’ 소리 들을까봐 겁도 나지만(웃음) 극복해야죠. 창작자가 작업이 두려우면, 결국 아무것도 아닌 거니까요.
하퍼스 바자 지금도 새로운 영화를 만들고 있죠?
연상호 내년에 개봉하는 <군체>라는 영화를 작업 중이에요. 올해는 후반 작업에 매진해야죠. 예산이 커요. 열심히 해야 해요.(웃음)
※ <얼굴>은 9월 11일부터 현재까지 극장에서 상영 중이다.
Credit
- 사진/ 김형상,메가박스(스틸)
- 헤어&메이크업/ 장혜연
- 스타일링/ 이명선
- 어시스턴트/ 정지윤
- 디자인/ 이진미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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