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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판소리 공연 '눈,눈,눈'으로 돌아온 소리꾼 이자람

아마도이자람밴드의 보컬이자 배우, 동시대 창작 판소리를 이어가는 소리꾼.

프로필 by 안서경 2025.06.29

소리가 삶이 되면


고전과 전통, 동시대 판소리를 매만지며 소리꾼이자 전방위 예술가 이자람은 삶의 면면을 이야기한다.


셔츠, 재킷은 Dries Van Noten. 귀고리는 Self-Portrait.


하퍼스 바자 지난 4월 초연을 올린 창작 판소리 <눈, 눈, 눈>의 반응이 대단했죠. 2019년 <노인과 바다>를 선보인 이후 톨스토이의 소설 <주인과 하인>을 재창작한 6년 만의 신작입니다. 첫 공연을 마치고 어떤 감정이 들었어요?

이자람 다신 못하겠다고 했어요.(웃음) 만드는 기간 동안 의심과 믿음을 반복하면서 힘을 엄청 쓰다가 무대에서 확인받으니 긴장이 탁 풀리면서 온몸이 아프더라고요. 그런데 그 어떤 공연보다 성취감은 컸어요. 관객들의 반응이 즉각적이기도 해서 놀랐고요. ‘늘 하던 걸 했는데 왜 더 좋아하시지?’ 하고.

하퍼스 바자 매 작품마다 원서를 읽으며 작창한다고요. 처음 소설을 읽고 어떤 장면이 남던가요?

이자람 러시아어는 모르지만 영미문화권 사람이 한 번역서라도 보려고 번역기를 돌리며 읽었어요. 작품을 정할 때 ‘이 순간을 어떻게 구현하겠다’는 의지가 생기면 하게 되는데, 보통 그게 안 떠오를 때가 많거든요. 처음 작품을 읽고 남은 건 ‘눈보라’였어요. 아무도 없고, 앞도 뒤도 옆도 헤아릴 수 없는 칠흑 같은 눈보라. 그 속에서 사건이 벌어지는데 관객을 데려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 소리로, 연기로 표현하고 싶었고요.

하퍼스 바자 이야기는 19세기 러시아 농가, 돈을 좇는 주인 바실리와 하인 니키타가 숲을 매입하기 위해 여러 고비를 넘기며 눈밭을 헤매는 여정을 다루죠. 말과 개의 울음소리, 눈보라 소리 같은 의성어부터 해설자와 두 주인공, 바실리 부인, 농부들까지 10여 개 역할을 홀로 연기했고요. 톨스토이의 여느 작품처럼 삶과 관계, 우리가 삶에서 놓치는 건 무엇일지 묻는 묵직한 주제를 다루며 유의한 점은 무엇이었나요?

이자람 톨스토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분명히 알 순 없지만, 저보다 오래 산 어른이고 심오한 주제 탓에 처음에는 짓눌렸어요. 작창할 때 원작을 크게 바꾸는 편은 아니에요. 처음 나온 대본과 작창을 듣더니 고수 이준형 씨가 “어려워요. 모르겠어요.” 딱 말하는 거예요. 아차, 싶었죠. 원작의 무게에서 빠져나와 자유로워져야겠다. 내가 제일 잘하는 게 판소리니까, 하고 되새기며 판소리라는 틀 안에 이야기를 가져오는 게 이번 공연을 만들면서 중요한 모먼트였어요. 기술적인 것이나 음악으로 구현해야 하는 작은 아이디어들은 이미 제 안에 있었는데, 구술 전체를 아우르는 건 무대를 대하는 태도, 작품을 대하는 제 기세라는 걸 깨달았죠.

하퍼스 바자 이전에 창작 판소리를 만들 때와는 어떤 차이가 있었나요?

이자람 <노인과 바다>를 만들 때도 비슷한 순간이 있었어요. 연습실에서 “나는 노인이 (청새치를 상어에게 빼앗긴) 다음 날 바다로 또 나갔을 것 같아. 나에게는 별일이 아니어야 해.”라고 툭 한마디 던졌어요. 그때 프로덕션 관계자 모두가 “기존의 <노인과 바다>와 이자람의 <노인과 바다>가 다른 점이 그 부분일 것 같다”고 말했죠. 이자람이 표현하는 산티아고는 청새치를 잡고 놓치는 일이 인생에 단 한 번이 아니라 앞으로도 두세 번 올 수 있는, 대수롭지 않은 일일 거라고. 결국 판소리다운 것, 내가 나답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지 매 공연마다 묻고 깨닫는 걸 반복하는 것 같아요.

하퍼스 바자 이번 공연을 두고 ‘이자람 판소리의 정점’이라는 후기도 여럿 보였어요. 관객들이 유독 열광한 이유가 뭘까요?

이자람 아마 <노인과 바다> 이후 제 안의 포지션들이 성장해서이지 않을까, 싶어요. 소리꾼으로, 작창가로. 성장이라는 건 티가 나게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어느새 쌓인 것들이 사람들에게 가닿는 것 같아요. 그 작품을 통해 고수와 제가 단둘이서만 무대를 채우는 경험을 많이 하면서, 전통 판소리 공연조차 달라졌다는 반응도 있었죠.

하퍼스 바자 관객의 반응을 주시하는 편인가요?

이자람 새로운 공연을 올리고 나선 좀 예민하게 살피는 편이에요. 거기에 흔들리진 않지만요. 창작 판소리가 많은 대중에게 익숙한 장르는 아닐 수 있다 보니 반응 하나하나가 작품을 같이 키워가는 것 같거든요. 이런 반응이 모여서 21세기 창작 판소리라는 역사에 지문처럼 남는 일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요.

하퍼스 바자 몇 해 전 <오늘도 자람>이라는 첫 에세이를 출간하기도 했죠. 국민 동요 ‘내 이름’ 예솔이로 얻은 관심이 버거워 10살에 명창 은희진 선생에게 판소리를 사사받은 소리꾼으로서의 시작, 전 세계 극장에서 무대를 올리는 경험, 연습 루틴까지 진솔한 면모가 담겨 있어요.

이자람 코로나 때문에 공연을 할 수 없던 시기에 낸 책이었어요. 가끔 블로그에 쓰던 글이 시작이었는데, 어딘가에서 소리를 하고 있는 한 명이라도 공감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죠.

하퍼스 바자 특히 무대에 오르기 전 ‘1초 간의 생각’을 고백하는 점이 인상적이었어요. 타고난 오라를 지닌 것처럼 보이는 당신 같은 천생 예술가도 “이 인물에 대해 애정이 없잖아? 으악, 뭐하는 거야! 아, 또 나도 모르게 교만했었나?” 하고 염려한다는 점에서 직업인으로서 공감하기도 했고요.

이자람 무대를 앞두고 자신이 없을 때, 제일 마지막에 비비는 언덕은 제 연습량이에요. 진짜 힘들 땐 판소리와 살아온 세월, 무대 위에서 평생 소리해온 이자람을 믿어요.


점프수트는 Self-Portrait. 벨트는 Cider. 슈즈는 Acne Studios. 이너 셔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하퍼스 바자 35년간 소리꾼으로 이어온 커리어에서 결정적인 순간은 일찍이 전통 판소리를 섭렵한 다음 작창을 시도한 시기가 아닐까, 짐작해요. 브레히트의 희곡 <사천의 선인>, <억척 어멈과 그 자식들>을 <사천가>와 <억척가>로 각색하며 새로운 판소리를 시작하게 된 건 “왜 사람들이 판소리는 안 멋지다는 생각을 갖고 있을까” 고민하며 대학 시절 몰두한 동아리 공연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요. 그 경험이 ‘아마도이자람밴드’의 단초가 되기도 했죠.

이자람 지금처럼 ‘전 판소리 이렇게 좋아해요. 조선시대에 링크됐고요’ 하고 깨달은 지는 얼마 안 됐어요. 대학교 막 들어갔을 때는 입시 지옥을 헤쳐왔으니, 연습도 적당히 하고 레슨도 덜 가고 싶고 그랬죠.(웃음) 새내기 때 제일 먼저 잡은 게 기타였어요. 너바나를 즐겨 들었고 록 밴드를 하고 싶어 들어간 곳이 노래패 동아리 ‘메아리’였고요. 3년 동안 수많은 철학과 사상을 채워갔고, 언더그라운드 문화를 스펀지처럼 흡수하며 지금 같은 시대에 어떤 공연이 의미 있을지 같이 고민하고 그랬죠.

하퍼스 바자 저 역시 판소리 공연보다 홍대 공연장에서 ‘아마도이자람밴드’를 먼저 접한 기억이 나요. 2004년부터 작년까지 20여 년 동안 판소리와 떨어진, 또 다른 한 축으로 활동을 이어왔죠.

이자람 숨통을 틔우는 일이 밴드였어요. 전통 판소리는 선생님 댁에 들어설 때부터 공기가 다르거든요. “안녕하세요” 하면 “오너라” 하고 시작. 정말 그때부터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가짐새가 달라져요. 하나라도 선생님 눈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태도를 곱게 하죠. “선생님,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하고 문 닫고 나오는 순간, 자유가 되는 거예요. 판소리는 중압감과 혼자 짊어져야 되는 책임감이 크지만, 밴드는 뭐든지 다섯 명이 n분의 1 하면 되고요.(웃음) 무대 위에서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게 좋았어요.

하퍼스 바자 판소리가 낯선 이들에게 첫 문장으로 건네는 말이 있나요?

이자람 항상 “판소리는 가진 게 정말 많은 장르입니다”로 시작해요. 누군가는 전통 음악이라고 알고 있고, 누군가는 공연 장르라고 막연하게 알고 있고, 문학에서는 서사문학, 구비문학으로 분류되죠. 어떤 학자는 소리꾼이 무대에서 현존하는 방식에 대해서 엄청 연구하고. 굉장히 독특한 특징이 한데 모인 장르이니까요.

하퍼스 바자 말씀대로 판소리는 조선시대 서민의 목소리를 전하고자 파생한 매체죠. 자연스레 작창을 할 때도 다양한 이야기 중에서 과거를 현재로 끌고 오는 이야기나 작업에 관심이 있지 않을까, 짐작해요.

이자람 ‘태초에’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유독 좋아하긴 해요.(웃음) 조선시대에 평범한, 저 같은 사람으로부터 전해져온 장르니까 지금까지 그 사이에 어떤 끈이 있다고 느껴요. 다 이어져 있는 것 같아요. 시대도 사람도 사회도. 나비효과를 믿는달까, 어떤 일이 어딘가 흘러가서 또 다른 일을 발생시킬 거라는 믿음이 있고요. 그런 믿음이 있으니 판소리에 관해선 스스로 ‘격을 낮추면 안 되지’ ‘내가 여기 지켜야지’ 이런 게 있어요. 18세기부터 이어져온 가치를 지키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제자도 두질 못하겠어요.

하퍼스 바자 처음 창작 판소리를 시도했을 때도 그런 생각에서 비롯된 건가요?

이자람 매핑하듯 무언갈 의도해 시작한 건 아니에요. 지나보니 삶이 디자인한 대로 흘러가지 않듯, 한 작품의 생도 내가 의도해서 그릴 수 있는 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를테면 처음 <억척가>를 만들고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에 서게 되었을 때, <사천가>로 국제 연극제에서 상을 받았을 때, 제가 전혀 예측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거든요. 생각지 못한 땅으로 갈 때 무섭고 겸허한 마음이 동시에 들곤 해요.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건,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내 일을 잘하자, 뿐이죠.(웃음)

하퍼스 바자 전통 판소리를 보여주는 공연도 이어오고 있죠. 스무 살 무렵 8시간 동안 ‘춘향가’를 완창하고 기네스북에 오른 이후 꾸준히 전통을 연마하는 작업은 소리꾼 이자람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이자람 질문 듣는 순간 제 머릿속에 떠오른 건, 여전히 탐구할 수 있는 것이 있어서 좋다, 라는 거예요. 처음 ‘적벽가’를 완창하고 나서 “이제 무슨 판소리를 공부하지?” 이런 마음이 들 때가 있었어요. 제일 재미를 못 느낀 시기였던 것 같아요. 그런데 <바탕>이라는 공연 덕에, 계속해서 전통 판소리를 연습하면서 이전에 알지 못한 점을 발견하게 됐어요. 같은 새 소리도 다르게 표현해보고. 아마 피아니스트, 바이올리니스트 같은 연주자들이 느끼는 것과 비슷할 것 같아요.

하퍼스 바자 동일한 과정을 반복하는 이들의 숙명처럼 들려요.

이자람 판소리는 장단과 선율뿐 아니라 심지어 언어가 있잖아요. 언어 안에는 문화도 있죠. 더 입체적으로 탐구할 거리들이 많은 것 같아요. 이번에 <눈, 눈, 눈> 팸플릿에 이런 구절을 썼던 기억이 나요. 스스로 의심이 되거나 벽을 느낄 때 “18세기 소리꾼들은 어떻게 소리를 짓고 연희했는지, 19세기 소리꾼들은 어떻게 자기 더늠(소리꾼이 새로운 가사나 선율을 창작해 전승되어오는 판소리에 삽입한 것)을 만들어 자유롭게 공연했는지 옛 사료들을 찾아봅니다. 그리고 상상합니다.”라고. 당연한 지리멸렬함이 있겠거니 하고, 위로하게 되죠. 동시대 나와 같은 작업을 하는 이를 찾는 것보다 과거 누군가를 떠올리는 게 수월하니까요. 전화는 못하지만.(웃음) 제 뇌 안에는 ‘전통 판소리 다섯 바탕’(수궁가·적벽가·흥보가·심청가·춘향가)이라는 도서관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 도서관 옆 칸에는 록 음악도 있지만 지하에 가장 메인이 되는 건 그 전통 판소리 다섯 바탕인 거죠. 걔네가 계속 탄탄하게 연구되고 있어야 그 위에서 창작 판소리들도 나올 수 있고요.


하퍼스 바자 과거 인터뷰에서 “판소리는 엄청난 거리감을 느끼게 하는 고도의 예술이에요. 구도자처럼 끊임없이 정진해야만 얻는 기술이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대단한 기술로 말하는 이야기가 오히려 나와 가장 가까워요”라고 말한 적이 있죠. 그 말의 뜻이 구체적으로 궁금해요.

이자람 실제로 제가 느낀 건 심플한데요, 어떤 예술가는 특유의 오라나 무언가가 있을 것 같다고 하셨잖아요. 저에겐 판소리가 그런 느낌의 장르예요. 완성된 판소리를 보면 ‘인간이 어떻게 저렇게까지 하지’ 싶고, 몸에 상해를 입힐 정도의 볼륨과 음의 굴곡과 음압을 구현해야 하는 예술이니까요. 그런데 들여다볼수록 그런 존재가 허당인 거예요. 사람이라고 치면, 맨날 무슨 맛있는 음식을 먹었는지 관심이 많은 사람인 거죠. 성음이나 기량, 테크닉만 내내 얘기할 것 같은 사람이 갑자기 나에게 툭 다가와서 “오늘 분식집에서 김밥을 먹었는데 기본이 제일 맛있더라” 같은 얘기를 건네는. 그런 양극성이 느껴지는 매체라는 뜻이었어요. 높은 예술의 경지라는 이미지가 있지만, 정작 다루는 이야기는 사람 사는 얘기가 전부거든요.

하퍼스 바자 그 과정에서 나 자신을 계속 마주하게 될 테고요.

이자람 맞아요. 직관이 먼저 작동하는 성향 탓에 어떤 대사를 툭 던지고 나서도 저는 소리꾼으로서 던진 말을 늘 무슨 의미일까, 하고 생각해보게 되죠.

하퍼스 바자 앞으로의 계획을 들려준다면요?

이자람 <눈, 눈, 눈>이 또 예상치 못한 발걸음을 할 것 같아서 예의 주시 하고 있어요. 곧 부산 투어가 시작될 텐데, 초연이 올라가고 제 몸에 5일 동안 붙었으니 그렇게 힘들진 않을 것 같아요. 어떤 식으로 몸에 잘 안착될지 기대돼요.

하퍼스 바자 언젠가 소리를 연인처럼 느낀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그 생각은 여전한가요?

이자람 분명히 제 파트너이긴 해요. 소홀히 하면 금세 인생에 구멍이 나는 파트너죠. 언제나 잘해줘야 되는.

Credit

  • 사진/김형상
  • 헤어&메이크업/ 장하준
  • 스타일리스트/ 이명선
  • 어시스턴트/ 정지윤
  • 디자인/ 진문주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