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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의 크리처들, 플란다스의 개부터 미키 17까지

봉준호 감독의 영화에서 '크리처'란?

프로필 by 최강선우 2025.03.06

감독의 영화들에서 괴물 혹은 크리처는 단순한 장르적 장치가 아니라, 인간을 탐구하는 중요한 거울 역할을 해왔다.



인간은 어떻게 괴물이 되는가

"누가 괴물인가." 봉준호 감독의 영화에서 크리처는 단순한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언제나 사회적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고, 누군가에게는 괴물로, 보호해야 할 존재로 자리한다. <플란다스의 개>의 개는 소음과 스트레스의 원천이자, 연대의 상징이 된다. <괴물>의 한강 괴수는 국가가 만들어낸 돌연변이이며, <옥자>의 슈퍼돼지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창조한 생명체다. 그리고 <미키 17>에서는 아예 인간 자체를 크리처로 설정하며, 우리가 어디까지 변형될 수 있는지를 묻는다. 이런 흐름에서 봉준호 영화에서 크리처는 언제나 ‘사회적 결과물’이다. 즉, 시스템이 만들어낸 존재이면서, 동시에 그에 맞서 싸우고 저항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감독의 크리처는 어떻게 변해왔을까?


<플란다스의 개>: 크리처의 시작, 인간이 만든 괴물

사진/우노필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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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의 첫 장편 영화 <플란다스의 개>(2000)는 그의 크리처 개념이 처음 등장한 작품이다. 영화 속 개들은 단순한 반려동물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과 스트레스를 투사하는 매개체다. 주인공 윤주(이성재)에게 개는 소음 공해이며, 없애야 할 존재다. 반면 현남(배두나)에게 개는 연민과 구원의 대상이다. 이처럼, 같은 존재를 두고 누군가는 괴물로, 누군가는 보호할 대상으로 여긴다. 크리처가 단순한 괴수물이 아닌, 사회적 시선을 반영하는 도구로 기능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욕망과 스트레스를 투사하는 매개체다. 그리고 한 번에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지고 사회적 관계 속에서 괴물이 되어가는 존재를 비춘다. 개를 바라보는 상반된 두 가지 시선을 통해. 인간 양심과 내면의 모순을 계속해서 깨닫게 하는 역할을 한다. ‘여기서 누가 괴물인가’라는 질문은 절대 단순하지 않다. 흥미로운 점은 영화의 원제가 Barking Dogs Never Bite, 즉 ‘짖는 개는 물지 않는다’라는 점이다. 이 제목은 영화 속 개를 바라보는 인간의 시선을 반영하는 동시에, 사회적 관계 속에서 크리처가 어떻게 탄생하는지를 암시한다. 이러한 질문들은 이후 작품들에서 점점 확장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괴물>: 국가가 만든 괴물, 공포를 조작하는 시스템

사진/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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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이다”라는 봉준호 감독의 신념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 그는 <괴물>(2006)에서 크리처를 본격적으로 전면에 등장시킨다. 배경부터 가장 한국적인 한강이고, 괴물의 외형 역시 독창적이다. 한강에 출몰한 괴물은 미국 군대가 유출한 독극물로 인해 탄생한 돌연변이다. 실제 한강에 서식하는 물방개를 모티브로, 어류와 양서류의 특징을 합쳐 디자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전까지 할리우드 영화에서 등장한 전형적인 크리처들과 달리, 한강 괴물은 새로운 생명체의 등장을 꾀했다고 평가받는다. 여기서 괴물은 단순한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공포를 조작하는 국가 시스템, 그리고 무능한 관료주의를 상징한다. 영화에 등장한 괴물의 외형 뿐만 아니라 서사에 녹여내는 방식 또한 남다르다. 괴물은 극 초반부, 서울이라는 특수한 도시의 한낮에 등장한다. 형체를 일부만 보여주며 긴장감을 고조시키지 않는다. (과거 인터뷰에서 봉준호 감독은 괴물을 너무 일찍 등장시킨 탓에 제작비가 많이 들었다는 농담도 했다.) 할리우드 크리처 무비들이 주로 괴물과의 물리적 싸움 그 자체에 집중한다면, <괴물>은 한국 사회의 부조리함과 구조적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유머와 풍자 가득한 블랙코미디에 가깝다. 결국 한강 괴물은 단순한 돌연변이도 공포의 대상도 아니다. 사회의 기형적인 구조가 만들어낸 부산물이자, 시민들이 겪는 억압과 무력감을 상징하는 존재다. 감독은 개봉 당시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괴물은 국가의 시스템과 무관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의 크리처 무비 중 가장 정치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우리는 누군가를 외계 생명체(크리처)로 만들고 있지 않은가?

<옥자>: 자본이 창조한 크리처, 소비되는 생명체

사진/넷플릭스

사진/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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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넷플릭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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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이 국가가 만들어낸 존재였다면, <옥자>(2017)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만든 크리처를 탐구한다. 거대 식품 기업 미란도가 개발한 초대형 슈퍼돼지 옥자는 시스템의 일부로 ‘길러진’ 존재다. 우리가 인간은 다른 종, 크리처를 착취해 왔다는 불편한 진실을 직시하게 한다. 감독은 영화의 과정을 기록한 책 『옥자: 디 아트 앤드 메이킹 오브 더 필름』 에서 이렇게 회상한다. “2010년이었어요. 서울에서 고가 도로 밑을 지나다 커다란 동물 한 마리를 봤어요. 물론 제 환상이었죠. 엄청 큰 동물이었는데 표정이 너무나 슬퍼 보였어요. 호기심이 생겨났어요. 저 생명체는 왜 저런 감정을 갖게 되었는지, 몸집도 큰 동물이 왜 저렇게 수줍어하는지 궁금해졌죠. 그래서 생각해 봤어요. 동물의 크기 때문인지. 모든 질문은 결국 그것의 태생으로 귀결되었죠. 슈퍼 토마토나 슈퍼 연어도 전부 식품업계에서 크기를 키운 상품들이잖아요. 상품에 있어서 크기는 생산성을 의미하니까, 자연스럽게 그것의 생산 과정을 생각해 보게 되었어요.” 영화는 그렇게 시작되었다.옥자의 외형을 두고 개봉 당시 ‘돼지냐 하마냐’를 두고 설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봉준호 감독의 전작 <괴물>에서 괴물을 만든 장희철 디자이너가 옥자의 축소 모형을 만들고 이를 3D 로 구현했다. 영화의 주인공 미자(안서현)에게 옥자는 우정과 사랑을 나누는 가족이지만, 미란도에게는 그저 먹기 좋은 상품일 뿐이다. 크리처를 둘러싼 다양한 이해관계를 정면으로 드러낸다. 기업은 동물을 ‘기술적 혁신의 결과물’로 바라보고, 동물보호단체(ALF)는 자본주의에 맞선 상징으로 이용한다. 미자는 옥자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싸운다. 환경 문제를 다룬 영화들은 대개 인간 중심적 시선에서 동물을 보호해야 한다는 도덕적 메시지를 강조하지만, 봉준호는 영화 내내 냉정한 시선을 유지한다. 그는 인간의 감정과 시스템이 동물을 어떻게 소비하는지를 낱낱이 보여준다. 봉준호 감독은 <옥자>에 대해 “인간이 만들어낸 생명체를 어디까지 소유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고 밝혔다.



<미키 17> : 더욱 확장된 크리처의 개념과 공생

사진/워너브라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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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과 동시에 무서울 정도로 흥행 중인 <미키 17>에서 봉준호는 기존의 크리처 개념을 또 한 번 전복시킨다. <괴물>에서는 인간이 괴물을 만들어냈고, <옥자>에서는 인간이 괴물을 소비했다면 여기서는 인간이 스스로 크리처가 된다. <미키 17>의 출발점은 복제 인간이다. 로버트 패틴슨이 연기하는 주인공 미키는 우주 개척을 위해 제작된 소모 가능한 존재 ‘익스페더블’이다. 죽으면 다시 복제되고, 기억은 과거와 이어진다. 다시 태어나면 동일한 존재이지만, 감정과 기억의 축적 속에서 점점 변화하는 미키는 인간일까, 아니면 단순한 시스템의 일부일까라는 심오한 질문을 영화는 우리에게 던진다. 영화는 이제껏 보여온 영화들과 달리, ‘괴물’이라는 건 외부가 아닌 인간 자체가 복제와 조작을 통해 변형되어 탄생한 존재가 될 수 있다고 해석해볼 수도 있다. 스크린 앞에서 자연스레 복제 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미래에는 인간이 더 이상 유일한 개체가 아니게 된 순간을 상상해 보게 된다. 결국 크리처는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두었다는 점에서 ‘봉준호식 크리처물’ 연대기의 폭발적 확장을 의미하기도 한다.



최신작 <미키 17>이 더욱 특별한 이유는 인간의 형태를 한 새로운 크리처의 개념을 제시한 데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감독은 니플하임에 서식하는 토착 생물 ‘크리퍼(Creeper)’를 등장시킨다. 따라서 완전히 다른 생태계의 존재와, 인간이 직접 개입하여 탄생한 복제 인간이라는 두 개의 크리처가 공존한다. 크로와상을 닮은 크리퍼는 위협적이거나 무찔러야 하는 존재는 아니다. 외계 생물(니플하임에서는 인간이 외계 생물이기 때문이다. 역시 인간들은 이 사실을 망각한다.)과의 공생을 택하며 인간보다 어쩌면 사랑과 이타심이 훨씬 많은 인간적인 존재에 가깝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귀엽다. 러닝 타임 내내 미키17과 미키18을 통해 “인간도 크리처가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동시에, 인간도 언제든 외계 생물이 될 수 있으며 “다른 생물종과 어떻게 공생할 수 있는가?”란 SF적 질문 또한 자연스럽게 풀어나간다. 그동안 ‘인간 사회가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던 봉준호 감독의 크리처는 여러 형태로 분화하며 인간성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와 고민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크리처는 단순한 장르적 장치가 아니다. 오랜 기간 동안 감독은 단순히 ‘괴수’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괴물처럼 취급받는 존재들을 자신만의 시각으로 영화 속에서 다양하게 형상화하는 작업을 해왔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게 한다. 결국 감독이 우리에게 던지는 핵심 질문은 현재진행형이다.


괴물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시스템 속에서 탄생하는 것이 아닐까?


Credit

  • 사진/네이버 영화_워너브라더스_넷플릭스_우노필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