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STYLE

서울 아닌 우리 동네 이야기

의정부, 밀양, 영주. 바자 피처 에디터들이 말하는 '우리 동네'

프로필 by 손안나 2025.02.28

우리 동네


너와 내가 자란 곳. 서울이 아닌, 우리 동네 이야기.




의정부미술도서관의 오후 풍경. 어느 노신사가 의정부음악도서관에서 재즈 잡지를 읽고 있다. 의정부 평양면옥 창밖 풍경. 육향이 진한 맑은 육수에 파와 고춧가루가 듬뿍 얹어져 독특한 풍미를 자아낸다.

어디 사세요? 우리 동네를 밝히면 나는 마치 존 르카레의 소설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의 열여덟 번째 등장인물이라도 된 기분이다. 질문자의 선택지에 결코 존재한 적 없는 답이 튀어나왔기 때문이리라. 경기도 의정부시. 내가 나고 자랐으며 지금도 살고 있는 동네다. 경기도의 북쪽. 한때 미군부대가 있었던 군사 도시.(나열하고 보니 춥고 황량하고 척박한 이미지긴 하다. 이 글을 쓰면서 괜히 옷깃을 한번 여몄다.) 내 친구들이 대부분 그랬듯 스무 살 대학에 입학하면서 나도 이 동네를 탈출했다. 나의 로망이었던 서울로. 감수성은 충만하고 물정은 몰랐던 10대 여고생은 문화생활에 목말라 있었다. 종로의 교보문고, 삼청동의 국제갤러리, 혜화동의 정미소와 학림다방, 북촌의 정독도서관, 부암동의 클럽 에스프레소가. 지하철을 타고 유람하던 교양 있는 남의 동네다.


그러나 “영원한 건 절대 없다”는 지드래곤 선생님의 명언처럼 로망도 변했다. 자취방 냉장고엔 말라비틀어진 사과 한 알이 전부였지만 개의치 않고 집밖을 뛰쳐나와 홍대 거리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던 20대와 달리 30대에 접어들면서 나는 그동안 내가 지나쳐왔거나 머물고 있는 공간을 돌아보게 되었다. “우리는 언제나 시간을 알고자 하지만,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는 결코 궁금해하지 않는다”는 조르주 페렉의 말이 내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진 가늠할 수 없지만 내 안의 무언가가 달라지고 있음은 분명했다. 별안간 귀소본능이 발동한 나는 30대 중반 다시 의정부로 돌아갔다. 신사동에 위치한 회사와는 고속도로를 타고 왕복 70km. 어쩌면 나는 매일 추운 나라에서 돌아오는 중인 게 맞다.


그렇게 싫어했던 부대찌개 거리와 제일시장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나는 그 골목 어귀 의정부 평양면옥 단골이 됐다. 1969년 의정부보다 더 북쪽에 위치한 연천에 문을 연 이래 의정부로 자리를 옮긴 이 노포는 지금의 을지면옥과 필동면옥의 모태이다. 맑은 육수에 파는 적당량 올리고 고춧가루를 팍팍 뿌려 먹는 게 내가 추천하는 방식. 배가 부르면 마음이 열린다던가. 그제서야 새로운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떠나 있던 동안 생긴 미술도서관이 그것이다. 국내 최초이자 유일한 이 도서관은 도슨트를 길러내는 학교이자 신진 예술가들의 스튜디오, 작품을 전시하는 갤러리로도 기능한다. 미술관 곳곳에 별 모양 상징이 눈에 띈다. 김수근, 이중섭과 함께 한국의 신사실주의 화풍을 주도한 백영수의 그것이다. 의정부는 그가 살고 죽은 도시다.


사실 미술도서관보다 내가 더 자주 찾는 공간은 음악도서관이다. 음악 전문 시립도서관이라면 으레 바흐의 피아노 선율이 흘러나올 것 같지만 사실 이곳은 블루스, 가스펠, 소울, R&B. 힙합, 재즈 등을 통칭하는 블랙 뮤직의 성지다. 의정부의 문화적 특성을 반영한 탓이다. 매년 열리는 블랙 뮤직 페스티벌도 비슷한 동기일 테다. “1980년대까지 의정부 축제는 미군이 주도했다. UN의 날, 미국 독립기념일 ‘메이데이’가 되면 미군은 부대를 개방했다. 군악대가 시가행진을 벌였다.”1) 격동의 시대를 함께한 캠프 스탠리, 캠프 잭슨, 캠프 시어스, 캠프 카일은 철수했지만 문화가 남았다. “의정부는 고령자도 블랙 뮤직에 낯설지 않다.”2) 나도 그렇게 자랐다. 구도심의 구제 옷가게에선 꼭 아웃캐스트가 흘러나왔다. <쇼 미 더 머니>도 없던 시절이지만 우리 반 애들은 힙합 동아리를 결성해 시내 클럽에서 에미넴을 따라했다. 소울에 빠져 있던 내 친구는 전업 프로듀서가 됐다. 동네 세탁소집 사장님은 자기 딸래미도 음악을 한다며 홍보에 열심이셨다. 나중에 알았다, 그녀는 윤미래였다.


생각해보니 의정부는 이 세상에 잠시 ‘소풍’을 나왔던 천상병 시인의 도시이기도 하고 일제 강점기 조선 예술인의 자존심을 드높이던 조선영화주식회사 의정부 스타듸오가 있던 곳이기도 하다. 나는 예능의 도시에서 성장했다. “서울이 온전한 한 마리 통닭을 팔 때 의정부는 미군의 입맛에 맞춰 부위별로 여덟 조각을 낸 프라이드 치킨을 팔았다.”3) 부대찌개처럼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진 이방인이 두루 섞여서 이 도시를 건설했다. 다종다양한 DNA가 뒤섞인 이곳이 좋다. 오래된 것과 새것이 공존하는 이곳이 좋다. 만약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내가 기억하는 학창시절의 배경 화면은 꽤 칙칙했을 것이다. 춥고, 황량하고, 척박한 북쪽 나라처럼. 이제는 알고 있다. 10대 시절 나를 채워주웠던 문화적 토양이 얼마나 풍요로웠는지. 내가 사랑하는 우리 동네, 거칠고 소란스럽고 탐미적인.



1)~3) <그래서 우리는 의정부에 올라간다>(상상출판)에서 인용.



내 머릿속에는 강과 연못에 관해 적정한 ‘스케일’이 새겨져 있다. 암스테르담 사람들에게 운하가 그러하듯이. 내게 한강은 너무 크고 빠르다. 오래전 서울에 온 뒤로 숱하게 한강에 갔지만 반한 적은 없었다. 급류를 보고 있으면 지하철 환승역에서 떠밀려가듯 쫓기는 기분이고 산보 삼아 다리를 건널라 치면 마음이 썰렁해진다. 언제나 적당한 강의 스케일은, 밀양강의 그것이었다.


“영화 <밀양> 나도 봤어.” 호구 조사를 열 번쯤 당하면 일곱 번 정도 이 답을 듣곤 했다. 그럼 딱히 할 말이 없어서 어릴 적 감독이나 배우를 본 무용담을 전했다. 지금 부모님이 사는 곳은 조금 떨어진 곳이지만, 고등학생 시절을 점유했던 나의 동네는 밀양시 내이동이다. 빽빽할 밀, 볕 양. 겨울에도 볕이 촘촘히 드는 작은 도시. 동네에 관한 글을 쓰기로 한 뒤 나는 영화에서 신애가 목놓아 울던 그 강에 대해 불쑥 해명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낙동강의 지류. 기차를 타고 역에 다다를 때쯤 밀양강이 보인다. 볼 때마다 이 풍경은 내게 서울역이 종착지인 기차가 서울로 진입할 즈음 광경과 교차편집된다. 63빌딩과 한강, 원효대교가 겹겹이 중첩되는 모습과 달리 한산하다. ‘강변맨션’이라는 이름의 오래된 맨션과 물놀이하기 좋은 개울, 그 옆에 풀밭이 드리워진 게 전부다. 몹시 비극적이며 삶의 이면을 보여주는 영화 내용과 달리, 강 언저리에서의 내 일상은 평화로웠다. 지루할 정도로 별일이 없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서울생활과 독립에 대단한 환상을 품고 빽빽한 일상을 견디던 고3 수험생 시절, 마음이 소란할 때면 강가를 걸었다. (그토록 기분이 요동친 이유 역시 이 도시를 벗어나지 못하면 어쩌지, 싶은 걱정이었고.) 밤 열한 시까지 독서실에 박혀 있다가 계절에 따라 이팝나무 꽃과 라일락 냄새가 섞인 강바람을 맞으면 꽤 거창한 존재론적 불안이 잠재워지는 것 같았다. 가장 큰 일탈은 모의평가가 끝나는 날 노래방과 오리배 코스를 돈 다음 ‘아줌마우동’(지금도 그 맛 그대로다)에서 기계식 우동과 떡볶이를 먹는 일이 다였다.


대학생과 사회초년생 시절, 나는 아끼는 친구들을 서울에서 이곳까지 초대하곤 했다. 코스는 정해져 있었다. 강가를 끼고 언덕을 조금 오르면 도시의 랜드마크와 같은 누각, 영남루가 나온다. 누각 대청마루에 대자로 누워 강을 보는 호사를 누리게 하면 다들 근심 따윈 하나 없는 표정을 짓곤 했는데, 그게 참 좋았다. 누각 뒤편에는 대나무 숲 사이로 좁다란 길목이 나 있다. 이 산책로는 아지트 같은 곳이어서 마음을 나눈 친구들이랑만 걸었다. 이제 어떻게 사는지 안부도 모르는 친구도 있지만 어느 인디 가수의 노랫말처럼 적적해지진 않는다. 종일 볕이 드는 이 동네는 ‘청승’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리틀 포레스트>의 주인공이라도 된 양, 타지 생활에 마음이 낡고 지칠 때엔 위양지로 향했다. 영남루에서 차로 15분 정도 떨어진 시골마을에 있는 저수지다. 무려 신라시대에 만들어졌다. 대체로 지방의 수변공원은 ‘한국의 지베르니’라는 수식을 갖고 있지만, 봄의 위양지는 누구에게 보여주어도 자신할 수 있을 만큼 아름답다. 잔잔히 빛나는 연못을 끼고 흙길로 된 산책로를 한 바퀴 빙 둘러 걸으면 식물 하나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왕버드나무 군락과 생김새가 수백 년은 족히 견딘 듯한 멋스러운 소나무가. 분꽃과 연꽃이 자연스레 어우러지는 광경이 촌스러운 품종이 뒤섞인 꽃밭들과는 비교도 안 된다.


에디터라는 직업을 갖고 수없이 뜬다는 동네를 쏘다녔지만, 언제이고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장소는 아무런 광경이 변하지 않는 이 도시다. 이 칼럼을 통해 처음 밀양에 와본 사진가와 이 코스를 걸으며 나는 이 말을 떠올렸다. “처음부터 고향을 사랑하긴 어렵다. 태어나자마자 놓여 있는 세계 같은 거니까.” 살았던 시간보다 고향을 떠나 산 시간이 더 길어졌을 때 사랑한 적 없던 마산에 대해 쓰기로 했다는 소설가 김기창의 말이. 마음먹으면 사사로운 걱정거리를 끝도 없이 나열할 수 있을 나이가 되었을 때에야 나는 이 동네를 좋아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영화와 뉴스를 통해 알려진 비밀스럽고 의뭉스러운 도시의 모습은 전부가 아니다. 별볼일 없던 풍경은 언제든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을 것 같은 장소가 주는 든든함으로 치환된다. 지방 소멸, 같은 단어까지 다다르기에 이 잔잔한 동네에 기억이 너무 많다.



무섬마을 강변에 만든 달집. 정월대보름 날 달이 뜨는 시간에 맞춰 태운다. 무섬마을을 점령한 새끼 고양이들. 사람의 발길이 뜸한 무섬마을 안 초가집. 봄이면 오색 꽃이 만개한다.

“경북 영주라고, 안동 옆에 있어요.” 누군가 고향을 물으면 정해진 매뉴얼처럼 이 문장을 읊었다. 영주가 한반도 어디에 위치해 있는 곳인지조차 감 잡을 수 없어 우물쭈물 눈이 동그래진 사람들에게는 안동을 파는 방법이 제일 효과적이니까. 한번쯤 들어봤으나 긴가민가한 사람들은 눈치를 살피며 “곶감?” 하고 되묻는다.(곶감은 경북 상주의 특산물이다.) 확실히 아는 사람들은 자신 있게 사과를 말한다.(틀린 얘기는 아니지만 기후가 따뜻해져 사과 재배지가 북상한 탓에 영주 사과의 경쟁력은 약해진 지 오래라고, 영주에서 과수원을 운영하는 이모가 말했다.) 영주를 제대로 알고 있다 한들, 실제로 방문해본 사람은 드물다. 그런 사람들에겐 맥도날드가 없고, 작년 7월에 시내 유일한 스타벅스가 생겼으며, 차로 20분이면 웬만한 시내 볼거리와 관광지를 모두 섭렵할 수 있는 도시라고 설명한다. 서울에 산 지 12년이 되었지만 그간 동향 사람을 대면한 건 열 손가락 안에 꼽는다. 지인의 지인의 지인이 영주 사람이라는 이야기라도 들었을 땐 무작정 이름부터 묻는다. 왠지 아는 사람일 것만 같아서. 도시보다는 마을이 어울리는 곳. 영주는 그런 곳이다.


무섬마을은 내가 생각하는 가장 ‘영주다운’ 곳이다. 2012년 방영한 KBS 드라마 <사랑비>의 촬영지임을 알리는 빛바랜 표지판이 반기는 마을. 촌스럽다기보다 예스럽다. 조선시대 후기에 지어진 전통 한옥만 남아 있는 이곳은 그야말로 시간이 멈춰 있는 듯하다. 숙박 시설로 운영되는 일부 한옥은 민박집에 가깝다. 커피보다 직접 달여 만든 차의 종류가 다양한 카페도 있다. 나는 귀와 눈이 쉬고 싶을 때 이곳을 찾는다. 나무나 풀이 바람에 흔들리거나 이따금 고양이가 우는 소리만 들릴 뿐. 새 지저귀는 소리도 드물다. 온통 키가 비슷한 초가집과 기와집만 들어서 있는 탓에 눈에 거슬리는 것도 없다. 조금만 언덕진 곳에 올라도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서울에선 쉽게 할 수 없는 경험이다.


매년 2월 즈음이 되면 무섬마을 앞 강변 백사장에는 대나무와 볏짚, 솔가지로 만든 집 모양의 구조물이 들어선다. 달집이다. 정월대보름 날, 달이 뜨는 시간에 맞춰 달집을 태운다. 마을 사람 모두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며 새카만 연기와 함께 액운을 날려 보낸다.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어쩐지 눈에 선하다. 마을 어귀에서 따뜻한 고구마와 어묵을 내어주고, 생면부지의 타인과 짧은 덕담을 주고받으며 액막이 술을 부딪는 이들이. 어둑한 저녁이면 다 함께 풍악을 울리며 쥐불놀이를 즐기는 풍경이.


그렇게 성실히 달집을 태운 덕인지 몰라도 무섬마을은 언제나 평화롭다. 서울도 영주도 마음 편한 내 집처럼 느껴지지 않아 이방인이 되어버린 것 같은 날에는 이곳에서 위로를 받았다. 이제는 대충 얼굴을 구별할 수 있는 고양이들과 골목을 걷다가 상냥한 초가카페 사장님이 달여 내는 오미자차를 마시고, 흙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흐르는 내성천을 넋 놓고 바라본다. 삼십여 년간 지나온 그 무엇도 이렇게까지 그대로였던 것은 없었다. 유년 시절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 한 장의 사진처럼 그저 가만히 자리해 있는 무섬마을에서는 모든 것이 대수롭지 않은 일이 된다.


Credit

  • 에디터/ 안서경
  • 에디터/ 고영진
  • 사진/ 오준섭
  • 사진/ 하태민
  • 디자인/ 이예슬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