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회화와 조각 사이, 감각을 자극하는 정희민의 작품 앞에서
미끄럽거나 거칠거나, 딱딱하거나 부드럽거나. 주름지고 포개어진 정희민의 회화 앞에서는 누구나 감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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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민, <오래된 선지자로부터>, 2024, Acrylic, gel medium and UV print on canvas, 194x130cm.
전시가 그런 서사를 품고 있다면 각 작품에 부여한 역할도 있겠다. 작업을 할 때 구체적인 서사를 다루어본 적은 거의 없는데 이번 전시는 특별히 하나의 무대를 가정하고 꾸렸다. 그렇게 만든 전시장에서 보여주고 싶은 건, 도시에서는 아주 쉽게 지워지고 마는 ‘죽음의 흔적’이다. 죽은 새와 나무, 부서진 도로, 차체의 파편, 조각상 등. 각각의 작품은 죽음 뒤에 남은 것들을 상징한다. 온라인에서 찾은 여러 이미지를 부활한 살점으로서 재구성했다. 각각이 하나의 개체로 존재하고 있음을 강조하고자 실내의 조명을 통해 물성을 부각시켜볼 생각이다.
회화, 조각, 영상 등 서로 다른 매체를 하나의 이야기 안에서 구현하는 과정에서 가장 예민하게 파고든 부분은 무엇인가? 이질적인 접근 방식을 지닌 작업들이 하나의 무대에서 충돌하는 장면을 오랫동안 상상해왔다. 각 작품 사이에 어느 정도의 거리감이 필요할지에 대해 가장 많은 고민을 했다. 결과적으로 그림은 추상적인 데 반해 조각은 매우 구체적인 형상을 갖추고 있고, 영상에서는 뚜렷한 서사가 전개되고 있는 형국이 되었다. 앞서 작품이 상징하는 것들의 예를 나열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작품이 하나의 대상을 가리킨다는 뜻은 아니다. 이야기 안에서, 어떤 상황과 맥락에 주목한 결과에 가깝다. 그래서 작품의 제목도 <눈 덮인 땅을 걸었네. 빙판에 비친 기괴한 환영 속에서 나는 설탕물에 빠진 개미처럼 익사하였네>처럼 굉장히 길어졌다.
질감과 부피가 강조되어 있다는 점에서 당신의 회화는 곧 조각이기도 하다. 납작한 평면에서 시작해 두께를 갖기까지 작업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먼저 그래픽 스케치로 여러 레이어를 만든다. 이 단계에서는 구체적인 모양을 상정해두지 않기 때문에 예측하지 못한 결과를 향하는 설계 과정에 가깝다. 어떤 그림에서는 우연한 주름이나 물감이 흘러내린 자국을 상상하며 흥건히 적신 붓을 가지고 7~8번의 스케치를 할 때도 있다. 이후에는 각 이미지를 건조시킨 아크릴 미디엄(물감의 특성을 변화시키는 보조제)에 입혀 그 조각들로 입체감을 만드는 식이다. 결국 최초의 스케치는 후에 어떤 모습이 될지 모르는 하나의 퍼즐 조각인 셈이다. 흐릿하고 추상적인 감각은 눈에 보이는 이미지로 변했다가 양감을 입고 일종의 제스처가 된다. 이렇게 모은 각각의 퍼즐 조각을 이리저리 꿰어보다 하나의 그림을 완성시켰을 때 가장 짜릿하다.

정희민, <벌린 입 사이로 흩어짐 없음 모름>, 2024, Acrylic, gel medium, and UV print on canvas, 240x459cm.
회화나 판화 같은 올드 미디어부터 영상, VR까지. 매체는 물론이고 아크릴, 오일, 에어브러시 등 다양한 물성을 지닌 재료를 쓰는 데도 거침이 없다. 맞는 작업 방식을 찾아가는 과정이 길었을 뿐이다. 나에겐 어떤 미술 매체도 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때로는 어떤 미술도 결코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없다는 생각을 한다. 미술은 ‘자연스러움’이 무엇인지 대해 질문을 던지는 역할을 할 때도 있으니까.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야 예술가라는 꿈을 진지하게 꾸기 시작한 것으로 안다. 그 시절 깨달았던 미술의 매력과 가치는 어떤 것이었나? 사실 대학 시절에는 미술 자체보다 작업가로서의 삶에 아무런 규칙과 제한이 없다는 점에 매료되었던 것 같다. 아주 순진했다.(웃음) 하지만 표면적인 규율과 관습 이면을 보는 작가들의 삶의 방식에 큰 가치가 있다는 생각은 여전하다. 내가 속한 커뮤니티 안팎의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작품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큰 위로를 느낄 때도 많다.
책이 중요한 영감의 원천이라고 밝힌 적도 있다. 요즘은 어떤 책에 꽂혀 있나? 한국 여성 시인들의 작품을 읽는 중인데, 그 중에는 내 또래의 작가도, 원로 작가도 있다. 나는 시를 읽을 때 무한한 자유를 느낀다. 물리적 세계 안에서는 공고해 보이는 체계일지라도 언어를 통해 얼마든지 무너지고 다시 세워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느낀다.
언제나 시간을 정해두고 작업을 하려 하지만, 퇴근 시간 엄수에 실패하는 날이 훨씬 많다고 들었다. 창작자에게는 엉덩이를 붙이고 오래 앉아 있을 수 있는 체력이 가장 필요한 자질일지도 모르겠다. 체력과 에너지의 고갈 역시 시간의 문제라는 것을 알기에 그저 지나가고 채워지기를 기다린다. 요즘엔 체력보다 회복력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도 한다. 작업을 한다는 건 끊임없이 나를 밖으로 내보이는 일이기도 해서 몸보다 마음이 지칠 때가 많다. 심리적 피로를 감당할 수 있는 절대적인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나에게 가장 확실한 방법은 좋은 작품을 보는 것이다. 내가 가치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상기해주는, 공감하게 만드는 작품 앞에서는 저절로 회복이 된다.
작년 이맘때 했던 인터뷰에서 “이제는 깊이에 대해 고민할 시점”이라는 말을 했다. 요즘은 어떤가? 작업을 시작한 이래로 지금까지 정말 다양한 시도를 해봤다. 이제 막 하나의 챕터를 지난 느낌인데, 비로소 터득한 방식을 좀 더 진득하게 탐구해봐야겠다는 생각에서 했던 말이다. 한 가지에 정착하기까지 시간은 오래 걸렸을지언정 그 덕에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배울 수 있었다. 여전히 해보고 싶은 것이 많다. 요즘은 평면 위에서 비미술적 재료를 보다 적극적으로 다뤄보고 싶어 아이디어를 구상 중이다.

고영진은 <바자>의 피처 에디터다. 런던에서 볼 수 있는 정희민의 신작을 서울 사무실에서 노트북 모니터로 감상하며 어렴풋한 가상의 촉각을 경험했다.
Credit
- 사진/ 타데우스 로팍 제공
- 디자인/ 한상영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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