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회화와 조각 사이, 감각을 자극하는 정희민의 작품 앞에서

미끄럽거나 거칠거나, 딱딱하거나 부드럽거나. 주름지고 포개어진 정희민의 회화 앞에서는 누구나 감각하게 된다.

프로필 by 고영진 2024.10.28
정희민, <오래된 선지자로부터>, 2024, Acrylic, gel medium and UV print on canvas, 194x130cm.

정희민, <오래된 선지자로부터>, 2024, Acrylic, gel medium and UV print on canvas, 194x130cm.

≪UMBRA≫는 런던에서 선보이는 첫 개인전이다. 이번 전시의 신작을 사진으로 받아본 뒤로 다양한 상상을 펼쳐봤다. 달 표면의 그림자 중 가장 어두운 부분을 뜻한다는 전시 제목과, 상실감에 대한 탐구가 녹아 있는 작품이라는 설명에서는 ‘죽음’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특정한 주제를 콕 집어 이야기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잘 드러나진 않지만 언제나 내 작업이 품고 있는 어떤 면을 강조해보고 싶었다. 어렴풋한 구상은 2~3년 전 팬데믹을 지나며 시작됐다. 급진적인 기술의 지형 속에서 새삼스레 실존의 문제를 눈앞에 둔 인간의 상황에 대해 생각이 많을 때였다. 접촉과 대면으로부터 멀어져만 가던 그 무렵, 문득 치정에 대한 비디오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 구체적으로는 장례의 현장에서 벌어졌던 전통 놀이극 ‘다시래기(reborn)’를 재현해보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스토리는 아주 심플하다. 한 여성이 눈먼 남편을 속이고 중과 바람을 피워 출산까지 하게 되는 이야기다. 특별한 점은 이 극이 오랜 시간 자연에서 탈육한 뼈를 이장하는 장례 현장에서 벌어진다는 것이다. 선조들은 왜 죽음의 현장에서 춤을 추고, 농담을 주고받고, 불경스러운 상상을 하고, 새로운 탄생에 대해 이야기했을까. 이에 대한 의문과 공감이 시작이었다.
전시가 그런 서사를 품고 있다면 각 작품에 부여한 역할도 있겠다. 작업을 할 때 구체적인 서사를 다루어본 적은 거의 없는데 이번 전시는 특별히 하나의 무대를 가정하고 꾸렸다. 그렇게 만든 전시장에서 보여주고 싶은 건, 도시에서는 아주 쉽게 지워지고 마는 ‘죽음의 흔적’이다. 죽은 새와 나무, 부서진 도로, 차체의 파편, 조각상 등. 각각의 작품은 죽음 뒤에 남은 것들을 상징한다. 온라인에서 찾은 여러 이미지를 부활한 살점으로서 재구성했다. 각각이 하나의 개체로 존재하고 있음을 강조하고자 실내의 조명을 통해 물성을 부각시켜볼 생각이다.
회화, 조각, 영상 등 서로 다른 매체를 하나의 이야기 안에서 구현하는 과정에서 가장 예민하게 파고든 부분은 무엇인가? 이질적인 접근 방식을 지닌 작업들이 하나의 무대에서 충돌하는 장면을 오랫동안 상상해왔다. 각 작품 사이에 어느 정도의 거리감이 필요할지에 대해 가장 많은 고민을 했다. 결과적으로 그림은 추상적인 데 반해 조각은 매우 구체적인 형상을 갖추고 있고, 영상에서는 뚜렷한 서사가 전개되고 있는 형국이 되었다. 앞서 작품이 상징하는 것들의 예를 나열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작품이 하나의 대상을 가리킨다는 뜻은 아니다. 이야기 안에서, 어떤 상황과 맥락에 주목한 결과에 가깝다. 그래서 작품의 제목도 <눈 덮인 땅을 걸었네. 빙판에 비친 기괴한 환영 속에서 나는 설탕물에 빠진 개미처럼 익사하였네>처럼 굉장히 길어졌다.
질감과 부피가 강조되어 있다는 점에서 당신의 회화는 곧 조각이기도 하다. 납작한 평면에서 시작해 두께를 갖기까지 작업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먼저 그래픽 스케치로 여러 레이어를 만든다. 이 단계에서는 구체적인 모양을 상정해두지 않기 때문에 예측하지 못한 결과를 향하는 설계 과정에 가깝다. 어떤 그림에서는 우연한 주름이나 물감이 흘러내린 자국을 상상하며 흥건히 적신 붓을 가지고 7~8번의 스케치를 할 때도 있다. 이후에는 각 이미지를 건조시킨 아크릴 미디엄(물감의 특성을 변화시키는 보조제)에 입혀 그 조각들로 입체감을 만드는 식이다. 결국 최초의 스케치는 후에 어떤 모습이 될지 모르는 하나의 퍼즐 조각인 셈이다. 흐릿하고 추상적인 감각은 눈에 보이는 이미지로 변했다가 양감을 입고 일종의 제스처가 된다. 이렇게 모은 각각의 퍼즐 조각을 이리저리 꿰어보다 하나의 그림을 완성시켰을 때 가장 짜릿하다.
정희민, <벌린 입 사이로 흩어짐 없음 모름>, 2024, Acrylic, gel medium, and UV print on canvas, 240x459cm.

정희민, <벌린 입 사이로 흩어짐 없음 모름>, 2024, Acrylic, gel medium, and UV print on canvas, 240x459cm.

반투명한 아크릴 미디엄이 활용된 근작을 보며 가장 많이 드는 생각은 ‘만져보고 싶다’는 것이다. 2019년 선보인 세 번째 개인전 ≪An Angel Whispers≫부터 촉각을 자극하는 회화 작업이 돋보인다. 그 무렵 영향을 받은 게 있었나? 내 작업은 매우 사소한, 찰나의 감각에서 출발한다. 당시의 시작점은 온라인 명상 플랫폼에서 본 브레인 마사지 영상이었다. ‘영상’이라는 시청각 매체로 촉각을 경험한 것이 계기가 되어 작업을 시작했다. 엄밀히 말하면 다른 감각을 자극함으로써 구현되는 가상의 촉각에 관심이 많았던 것이다. 지금 내 찰나의 감각은 촉각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이를테면 새벽에 하는 산책에서만 느낄 수 있는 조명의 분위기와 적막처럼 시각, 청각 등 다양한 것에 열려 있다. 도시에서 느끼는 고요가 재미있는 점은 외부 소음과 미러링된 노이즈가 서로를 상쇄하며 침묵을 만들어내는 ‘노이즈 캔슬링’ 효과와도 유사하다는 것이다. 실은 귀에 엄청난 압력을 가하고 있지만 이상하게 편안한 상태처럼, 보이지 않지만 언제나 존재하는 것들이 자극하는 기이한 감각은 늘 흥미롭다.
회화나 판화 같은 올드 미디어부터 영상, VR까지. 매체는 물론이고 아크릴, 오일, 에어브러시 등 다양한 물성을 지닌 재료를 쓰는 데도 거침이 없다. 맞는 작업 방식을 찾아가는 과정이 길었을 뿐이다. 나에겐 어떤 미술 매체도 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때로는 어떤 미술도 결코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없다는 생각을 한다. 미술은 ‘자연스러움’이 무엇인지 대해 질문을 던지는 역할을 할 때도 있으니까.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야 예술가라는 꿈을 진지하게 꾸기 시작한 것으로 안다. 그 시절 깨달았던 미술의 매력과 가치는 어떤 것이었나? 사실 대학 시절에는 미술 자체보다 작업가로서의 삶에 아무런 규칙과 제한이 없다는 점에 매료되었던 것 같다. 아주 순진했다.(웃음) 하지만 표면적인 규율과 관습 이면을 보는 작가들의 삶의 방식에 큰 가치가 있다는 생각은 여전하다. 내가 속한 커뮤니티 안팎의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작품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큰 위로를 느낄 때도 많다.
책이 중요한 영감의 원천이라고 밝힌 적도 있다. 요즘은 어떤 책에 꽂혀 있나? 한국 여성 시인들의 작품을 읽는 중인데, 그 중에는 내 또래의 작가도, 원로 작가도 있다. 나는 시를 읽을 때 무한한 자유를 느낀다. 물리적 세계 안에서는 공고해 보이는 체계일지라도 언어를 통해 얼마든지 무너지고 다시 세워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느낀다.
언제나 시간을 정해두고 작업을 하려 하지만, 퇴근 시간 엄수에 실패하는 날이 훨씬 많다고 들었다. 창작자에게는 엉덩이를 붙이고 오래 앉아 있을 수 있는 체력이 가장 필요한 자질일지도 모르겠다. 체력과 에너지의 고갈 역시 시간의 문제라는 것을 알기에 그저 지나가고 채워지기를 기다린다. 요즘엔 체력보다 회복력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도 한다. 작업을 한다는 건 끊임없이 나를 밖으로 내보이는 일이기도 해서 몸보다 마음이 지칠 때가 많다. 심리적 피로를 감당할 수 있는 절대적인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나에게 가장 확실한 방법은 좋은 작품을 보는 것이다. 내가 가치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상기해주는, 공감하게 만드는 작품 앞에서는 저절로 회복이 된다.
작년 이맘때 했던 인터뷰에서 “이제는 깊이에 대해 고민할 시점”이라는 말을 했다. 요즘은 어떤가? 작업을 시작한 이래로 지금까지 정말 다양한 시도를 해봤다. 이제 막 하나의 챕터를 지난 느낌인데, 비로소 터득한 방식을 좀 더 진득하게 탐구해봐야겠다는 생각에서 했던 말이다. 한 가지에 정착하기까지 시간은 오래 걸렸을지언정 그 덕에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배울 수 있었다. 여전히 해보고 싶은 것이 많다. 요즘은 평면 위에서 비미술적 재료를 보다 적극적으로 다뤄보고 싶어 아이디어를 구상 중이다.
※ «UMBRA»는 타데우스 로팍 런던에서 11월 20일까지 열린다.

고영진은 <바자>의 피처 에디터다. 런던에서 볼 수 있는 정희민의 신작을 서울 사무실에서 노트북 모니터로 감상하며 어렴풋한 가상의 촉각을 경험했다.

Credit

  • 사진/ 타데우스 로팍 제공
  • 디자인/ 한상영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