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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출판사 대표이자 배우, 박정민의 투명한 얼굴

한때 박정민은 자신을 평범한 옆집 남자라 말했지만, 이제는 평범하지 않은 배우가 되었다. 변하지 않은 건,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일은 억지로 하지 않는다는 것. 마음 가는 대로 자연스럽게. 박정민의 세계는 그렇게 거기 있다.

프로필 by 안서경 2024.10.24

톱은 Songzio. 데님 팬츠는 We11done. 양말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하퍼스 바자 차기작 촬영에 들어가기 전, 출판사 대표로서 책 홍보에 여념이 없는 날을 보내고 있다고요. 출판사 ‘무제(MUZE)’의 두 번째 책 <자매일기>를 펴냈어요.

박정민 첫 책을 냈을 땐 추천사만 썼지 배우 박정민의 출판사라는 걸 감췄어요. 본격적으로 책을 내려고 마음먹으니 굳이 숨기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책 만드는 게 잘못도 아니고, 책이라는 걸 사람들이 많이 보면 좋지 않나. 요즘 서점에 홍보 제안을 하느라 바빴어요. MD분들을 직접 찾아가서 인사드리고, 10분 단위로 미팅하고.

하퍼스 바자 온라인 서점 ‘편집장의 픽’이 되어야 할 텐데요.

박정민 맞아요, 그걸 노려봐야죠.(웃음)

하퍼스 바자 <자매일기>는 무제의 첫 책 <살리는 일>을 쓴 박소영 작가와 동생 박수영 작가가 동물구호활동가로 살아가며 함께 쓴 에세이예요. “난 늘 혼자서 길거리를 배회하는 박소영을 떠올렸다. 건조한 얼굴, 굳은 표정, 속절없는 눈물 같은 것이 그녀에 대한 나의 편견 섞인 이미지였다.” 출판사 SNS에 서신처럼 쓴 책 소개글이 인상적이었어요.

박정민 오랫동안 알고 지낸 친구의 삶이 퍽퍽해지는 걸 보는 건 마음 아프고 힘든 일이에요. 그 사람의 가치관이기 때문에 대신 해결해줄 수 있는 일도 아니고요. 그렇다면 친구로서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이 사람이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걸 소개해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단 첫 책보다는 좀 더 유쾌하고 덜 무거운 느낌의 책이었으면 했어요.

하퍼스 바자 박소영 작가와는 독립영화에 출연하던 시절 만난 오랜 친구 사이죠. 세월이 흘러 각자 달라진 자리에서 서로를 지지하는 든든한 지원군이 되었고요.

박정민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제가 힘든 일이 있을 때 큰 의지가 되어준 친구예요. 친구의 삶에 구조를 기다리는 동물들이 깊이 자리하면서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씩 변하는 걸 지켜보게 됐어요. 그 사이 저는 영화배우로 영화계 안에서 돌아가는 논리에 적응해가고, 서로 길이 달라졌죠. 예전에는 한 영화를 보고 비슷한 감상을 나눴다면 이젠 각자 다른 얘길 하는데 그 지점이 흥미로워요. 여전히 그 사람을 신뢰한다는 뜻이겠죠. 물론 출판사 대표로서 저는 책의 모든 내용에 동의하진 않아요. 저도 책 속의 가치관을 지키지 못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모든 걸 변화시키겠다는 생각도 없죠. 다만 책을 통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알릴 수 있는 매개체가 되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하퍼스 바자 두 작가는 보호소 강아지들이나 길거리 고양이들을 구조하며 동물권에 관해 한 목소리를 내지만 삶을 대하는 결이 비슷한 듯 다른 점이 흥미로웠어요. 본업이 기자인 박소영 작가는 논리적이고, 연극을 전공한 박수영 작가는 좀 더 감성적인 관점을 지니죠.

박정민 교정을 보며 10번씩 글을 읽다 보니 어느 순간 이 책의 매력은 ‘박소영은 질문을 만들고, 박수영은 장면을 만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 사람은 일침을 하고 깊이 사고하는 사람이라면, 다른 한 사람은 관찰을 굉장히 세밀하게 하거든요.

후디는 Gucci. 목걸이는 Damiani.

데님 재킷은 Dior.


하퍼스 바자 두 권의 책을 세상에 내놓는 일이 배우 박정민의 삶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박정민 아주 솔직히 말하자면,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는 영화배우의 삶은 비교적 쉽다고 생각해요. 어느 식당에 가더라도 사장님이 저를 알아보면 콜라라도 하나 더 주시고. 호의를 받죠. 제가 열심히 해 만들어낸 성과라고 생각할 때도 있지만 그만큼 무언가 베풀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두 사람을 보며 내 삶을 쉬운 방향으로만 흘러가지 않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이들이 사는 삶에 비하면 나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쉬운 삶이 아닌가, 그러려면 나도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걸 하자고 다짐하죠.

하퍼스 바자 <쓸 만한 인간>이라는 에세이를 썼고, 몇 년 전엔 서점을 운영하다가 이젠 출판사 대표가 되었어요. 연기를 제외하곤 책을 매개로 새로운 일을 모색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박정민 요즘 든 생각인데, 배우는 최대한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끌어내 유무형의 어떤 것을 만들어내야 하는 창작자잖아요. 여러 사람들과 함께 결과물을 만들면서 점점 깨닫는 건 내가 같이 일하고 싶은 사람들과 일하는 데 있어 책은 비교적 적은 돈, 제가 모아둔 자본 안에서 할 수 있는 창작이라는 거예요. 영화는 너무 많은 제작비가 들어요. 단지 재미있을 것 같아서, 한번 해보지 뭐, 같은 마음으로 시작하긴 어렵죠. 반면 책은 자본은 적게 드는 것에 비해 세상에 내어놓았을 때 그 작품에서 받는 감동은 같아요. 사람들이 좋아해주면 거기에서 또 감동받고요. 그런 과정들이 되게 재미있어요. 지금 새로운 책을 기획 중인데 너무 기대돼요.


셔츠, 팬츠, 슈즈는 모두 Givenchy. 목걸이는 Boucheron.


하퍼스 바자 평소 독서 습관은 어떤가요?

박정민 쉴 때는 집 거실 바닥, 소파, 테이블 여기저기 깔아두고 눈에 띄는 걸 집어 읽어요. 촬영에 들어가면 잘 안 읽고요. TV를 안 켜면 늘 책을 읽거든요. 서점 사이트 들어가서 굿즈가 너무 예쁘면 금액에 맞춰 사야 돼요. 한 네 권 사면 두 권 읽고, 두 권은 못 읽고 데커레이션으로 쌓아두고.

하퍼스 바자 세 번째 책으로 직접 쓴 책을 출간할 계획도 있나요?

박정민 연간 플랜을 짜뒀어요. 세 번째 책은 김금희 작가의 소설이 될 예정이에요. 언젠가 제 글을 제 출판사에서 보여주고 싶은데, 원체 즐겁게 쓰는 편이 못 돼요. 마음이 동하지 않으면 못 쓰거든요. 남한테 보여주고 싶은 글을 즐겁게 쓰는 방법을 찾고 있죠.

하퍼스 바자 솔직하게 글을 쓴다는 인상을 받았던 게, 한 영화 잡지에 박찬욱 감독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에세이를 기고한 걸 읽었거든요. <헤어질 결심>이 개봉할 즈음이었죠.

박정민 박찬욱 찬가였죠.(웃음) 스스로 글재주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로지 그냥 마음으로 써야 하는 사람인 거예요. 저는 진심이라는 것의 가치를 아직까지 믿거든요. 감독님에 대한 진심을 눌러 담아 쓴 글이었죠. 종종 책 추천사를 써달라는 요청도 받는데, 그 책이 좋으면 30분 만에 쓰는데 책이 잘 안 읽히면 아, 어떡하지 하면서 며칠 동안 못 써요.

하퍼스 바자 짧게 등장했지만 제겐 배우 박정민의 낯설고 새로운 얼굴을 본 작품이 <헤어질 결심>이었어요. 정서경 작가가 박정민 배우의 팬이 되어 고쳐 쓴 대사 “너 때문에 고생깨나 했지만 사실 너 아니었으면 내 인생 공허했다”도 백미였고요.

박정민 되게 열심히 준비해 갔어요. 한 신을 가지고 감독님을 네 번쯤 만나 의견을 나누고. 다만 어려웠던 점이 제가 딱 하루 촬영하러 간 날이 1회차 촬영이었어요. 다른 배우들도 손발을 맞추고 있는 낯선 상황에 저도 빨리 적응해야 했죠. 감독님과 이후 <일장춘몽>이라는 단편영화로 만나긴 했지만 당시에 박찬욱 감독님 영화를 경험해볼 수 있는 기회라는 것에 벅차고 즐거웠어요.


슬리브리스 톱, 코트, 팬츠는 모두 Fendi. 슈즈는 Bottega Veneta.


하퍼스 바자 최근 공개된 <전,란> 역시 박찬욱 감독의 각본이었죠. 처음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어떤 지점에 이끌렸나요?

박정민 인물들의 면면이 매력적이었어요. 제가 맡은 이종려라는 캐릭터는 선악으로 구분되지 않는, 무척 감정적인 인물이죠. 양반으로 태어나 자신이 가진 걸 어느 순간 모두 상실하게 되는데, 그 인물이 갖는 페이소스가 이야기 안에서 중요하게 작용할 것 같았죠. 전체적으로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점이 분명한 게 좋았어요. 감독님과 작가님의 의도가 확실히 느껴지는 작품을 좋아하는데 <전,란>은 그게 선명히 전달되는 작품이었어요.

하퍼스 바자 부산영화제 오픈 토크에서의 발언이 꽤 회자되었죠. “제가 양반이고 강동원 선배가 노비”라고.(웃음) 김상만 감독은 이 영화를 계급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했어요.

박정민 왜란으로 인해 한 사회가 무너졌을 때 계급의 논리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생각해볼 만한 기회를 주는 작품이에요. 계급이라는 건 유구한 역사가 있잖아요. 사실 지금도 계급을 덜 인지할 뿐이지 사라졌다고 볼 순 없죠. 법과 도덕으로 인해 드러나지 않을 뿐 사람들의 무의식에 남아 있는 그런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풀어냈을 때 직관적으로 대입되는 부분이 많을 거예요.

하퍼스 바자 이종려를 연기하는 건 어떤 경험이었나요?

박정민 이 정도의 상실감이나 외로움을 느낀 역할을 맡은 적이 있나 떠올려보면 지금 생각나는 건 <사바하>의 나한인데, 둘은 좀 다르죠. 이런 인물을 연기할 땐 두려움이 앞서요. 자연스레 현장에서 감정이 꾸물꾸물 나올 때, 이 영화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외형적으로만 봐도 정통 사극 장편영화는 이번이 처음이거든요. 김상만 감독님은 의상의 색상, 상투의 라인까지 무척 디테일하게 분장을 고려해주셔서 의견을 주고받는 게 재미있었어요.

하퍼스 바자 곧 영화 <하얼빈> 개봉도 앞두고 있죠.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소재로 삼는다는 점에서 <동주> 속 모습을 기대하는 이들도 많더군요.

박정민 항상 저는 독립운동 하셨던 분들이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그게 궁금했거든요. 그런데 이 시나리오를 보고 그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어요.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는 모두가 아는 얘기지만, 한 인물에만 조명된 게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온 인물들의 삶을 짐작할 수 있고 현실적으로 납득할 수 있게 만드는 이야기예요.

하퍼스 바자 촬영을 앞둔 <휴민트>에서는 <밀수> 이후 류승완 감독, 조인성 배우와 재회할 예정이죠.

박정민 액션은 아무리 준비하고 조심해도 가끔 누군가를 진짜 칠까봐, 그런 순간이 아직도 너무 무서워요. <전,란>에서도 날이 무디지만 실제 쇠로 만들어진 칼이라 두려웠거든요. 이번 영화는 부담이 커요. 감독님은 ‘진짜 액션영화 감독’이잖아요.


재킷, 셔츠, 타이는 모두 Prada. 모자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하퍼스 바자 코로나 기간 동안 쉬지 않고 작품을 맡았고 내년까지 연달아 개봉을 앞두고 있죠. 소진되지 않는 동력은 무엇인지 궁금해요.

박정민 제 스스로도 꽤 작품을 많이 했다고 생각해요. 동력은 사람. 시나리오도 재미있고 같이 하는 사람도 좋으면 마다할 할 이유가 없거든요. 좋아하는 감독님, 배우들과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재미있어요. 지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출근하는 직장인보다는 일을 덜하는 것일 테고요.

하퍼스 바자 철저히 직업인으로서 배우라는 직업을 받아들이는군요.

박정민 배우는 직장인보다는 몸을 더 쓰니까 현장에서 너무 힘들 때도 있어요. 하지만 매일 출근하는 건 아니잖아요. 쉬는 날도 있고. “사람들은 매일 출근해서 돈 버는데 나는 굳이 왜 쉬어야 되지, 뭐가 힘들다고 휴식이 엄청 필요한가”라는 생각으로 연달아 해온 것 같아요. 작품이 나오면 그 힘듦을 잊을 만큼 뿌듯하고. 그런데 요즘은 “어우, 좀 쉬어야겠는데” 싶기도 해요. 제동을 안 걸면 이 일이 재미없어질까 봐요. 내가 갖고 있는 걸 다 쓴 건 아닌가, 우려되기도 해요. 저는 재미가 사라지면 굳이 관성으로 배우 일을 하고 싶진 않아요. 돈을 크게 벌고 싶은 것도 아니고요.

하퍼스 바자 요즘 박정민의 일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건 뭐예요?

박정민 같이 일하고 싶은 작가님 찾기요. 집에서 계속 단편, 장편, 문학 잡지 읽고. 아직 못 본 신인 작가님이 있나 살펴보고, 기성 작가님들과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찾으려 하고. 그게 요즘 저한테 제일 재밌어요.


Credit

  • 사진/ 김희준
  • 헤어/ 미진(위위 아뜰리에)
  • 메이크업/ 은지(위위 아뜰리에)
  • 스타일리스트/ 김지원
  • 어시스턴트/ 정지윤
  • 디자인/ 한상영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