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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OR'S CHAIR #9 안민영

몰입의 순간, 안민영의 눈에 눈물이 맺힌다. 소란한 현장 분위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렌즈 속으로 깊게 몸을 던져 유유히 잠영한다. 그 세계에서 그는 고독하지만 무한히 자유로워 보였다.

프로필 by 손안나 2024.08.28
카디건은 Lauren Ralph Lauren. 니트 톱은 Claudie Pierlot. 스커트는 Coach. 목걸이는 H&M. 반지는 Loewe.

카디건은 Lauren Ralph Lauren. 니트 톱은 Claudie Pierlot. 스커트는 Coach. 목걸이는 H&M. 반지는 Loewe.

하퍼스 바자 카메라 앞에서의 몰입이 빠르고 강하시네요.
안민영 그런가요? 사진 속 제가 저 같지 않아서 재밌어요. 몇몇 컷은 어린 시절 느낌도 나요. 온 세상을 부정하던 반항기의.
하퍼스 바자 그 시기가 언제쯤인가요?
안민영 아마도 중학생 때. 그땐 지구의 종말을 걱정했어요.
하퍼스 바자 걱정한 거예요, 기다린 거예요?
안민영 당연히 걱정이었죠. 슬픈 기사나 안 좋은 뉴스를 접할 때면 세상이 곧 끝날 것만 같았어요. 역사를 돌아봐도 인간은 여간 악한 존재가 아니잖아요.
하퍼스 바자 대책 없는 불만을 토로한 게 아니라 인간의 본질적인 악함에 대한 저항에 가깝네요. 어떤 10대 시절을 보냈나요?
안민영 ‘불의를 보면 참지 말자’가 제 인생의 모토였어요. 그런데 나이 들면서 점점 몸을 사리게 되네요.(웃음)
하퍼스 바자 몸을 사린다는 게 곧 타협을 뜻한다고 생각진 않아요. 세상과 인간의 복잡성에 관한 이해와 관용이 생긴 게 아닐까요.
안민영 그럴 수 있어요. 일종의 직업병 같은데 거의 모든 사람이 이해가 가거든요. 수많은 작품에 출연하면서 정말 다양한 인물을 만났잖아요. 그만큼 공감의 폭이 넓어진 것 같아요. 몸을 사린다는 느낌은 혼자서 두 아이를 키우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아요. 타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많이 겪었거든요. 그 무렵부터 성격이 좀 많이 변한 것 같아요.
하퍼스 바자 아이들을 혼자서 키우셨나요? 지금은 기혼이시잖아요.
안민영 첫 남편과 사별했어요. 스물셋에 결혼해 스물넷에 첫 아이를 낳고 스물다섯에 둘째를 낳았는데 그 이듬해 남편이 세상을 떠났어요.
하퍼스 바자 감히 힘들었겠다는 수준의 표현으로는 형용할 수 없는 시절이었겠어요.
안민영 그때 대구에 살았는데, 주변에서 <인간극장>에 나가라고 할 만큼 상황이 좋지 않았어요. 사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도 돌아가셨거든요. 연극을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던 시절이었어요. 어떻게 보면 연극 덕분에 살았다고 생각해요. 일종의 자가 치유였다고 할까요.

케이프 코트는 Ermanno Scervino.

케이프 코트는 Ermanno Scervino.

하퍼스 바자 다른 인물이 되어 연기를 하다 보면 자기와 거리를 두게 되기 때문일까요?
안민영 내 사정보다 더 처절하고 비극적인 역할도 맡게 되니까. 지금 이 삶은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하죠.
하퍼스 바자 기본적으로 긍정적인 기질이신 것 같아요. 에너지도 크시고요. 극단 생활은 언제부터 하신 건가요?
안민영 21살 때부터요. 아이들이 한창 자랄 동안은 쉬었고, 아이들을 어딘가 맡길 수 있는 시기부터 다시 무대로 돌아가게 됐어요.
하퍼스 바자 무대에 대한 큰 갈증이 있었나요?
안민영 그때는 그런 생각도 못했어요. 너무 어렸고, 갑자기 아이 둘을 혼자 키우게 되면서 내 인생은 이제 여기서 끝이구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당시에는 뭐랄까…. 의욕이 없다는 표현도 딱 맞지 않고, 아무튼 상태가 좀 안 좋았어요.
하퍼스 바자 막막함이 컸을 것 같아요.
안민영 내가 선택한 것도 아니고 이미 벌어진 일을 그저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잖아요. 극단 선배님들이 그 무렵 저를 보러 왔는데, 제가 시체 같더래요. 그분들이 저를 밖으로 끄집어내주셨어요. 한번은 극단이 지방 공연을 가는데 애들 데리고 바람 쐬러 오라고 해서 따라가게 됐어요. 그러다 옆에서 공연을 도와주게 되고, 어쩌다 보니 무대에도 서게 됐는데 이거구나, 싶었어요. 폭포수를 맞은 것처럼요. 이거 하면서 살아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벼락처럼 들었죠.
하퍼스 바자 그러다 서울로 와서 본격적으로 영화 필모그래피를 쌓게 된 때가 30대 후반이잖아요. 서울엔 어떻게 오게 됐어요?
안민영 사실 서울에 가서 연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어요. 대구에 살 때 엄마와 아이들과 같이 살았는데, 그 무렵에 엄마가 돌아가시게 됐어요. 아프셨는데 제가 일을 쉬면서 간병을 1년 반 정도 했거든요. 고단했지만 오히려 애들과 더 가까워진 것 같아서 좋았던 시절이기도 해요. 그런데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니 10년 전처럼 또 막막한 거예요. 세상에 기댈 사람이 진짜 하나도 없는 거잖아요. 처음엔 제주도에 갈까 했어요. 소일거리도 있고 지역 극단에서 소박하게 연극도 할 수 있을 거라고 들어서요. 그런데 애들하고 얘기해보니까 아이들이 세상에 직업이 한 열 개 정도밖에 없는 줄 아는 거예요. 내가 유학은 못 보내줘도 세상에 직업이 최소 백 개 이상은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죠. 그래서 일단 서울로 가자, 하고 저질렀던 것 같아요.
하퍼스 바자 더는 물러설 곳이 없는 감각이었나요?
안민영 그랬던 것 같아요. 있는 재산 없는 재산 탈탈 털어서 왔는데, 이사오던 날부터 드라마틱한 사건이 많았어요. 전세금이 약간 모자랐는데 집주인 분이 사정을 듣고 깎아주시고, 또 그 얘기를 곁에서 들은 부동산 사장님과 이삿짐센터 사장님도 제 사정을 봐주셨어요. 그날 동네 마트에서 우연히 만난 극단 후배가 일자리를 소개해줬고. 그렇게 연기 수업을 하면서 먹고살게 되고, 대학로에서 연극도 쉬지 않고 하게 됐어요.
하퍼스 바자 그러다 처음 찍게 된 영화는 뭐예요?
안민영 엄밀히 처음 찍었던 작품은 아니지만, 세상에 나온 작품으로 치면 <너와 나의 21세기>예요. 그 영화가 아니었다면 지금 아마 영화를 못 했을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고마운 작품이죠.

하퍼스 바자 어떤 기억이 있나요?

안민영 오디션 볼 때만 해도 작은 단역이었어요. 그런데 제작진이 다시 한번만 와달라는 거예요. 이렇게 조그만 역할 시키면서 왜 자꾸 오라 가라 하는 거야, 불평하면서 갔는데 갑자기 더 큰 역을 맡겼어요. 기분이 정말 좋았고, 고맙잖아요. 그래서 잘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첫 촬영을 갔는데 감정 신이었어요. 배우들은 연기하고 나면 스스로 잘했는지 못했는지 감이 오거든요. 전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감독이 갑자기 “10분 쉬겠습니다” 하면서 스태프들을 밖으로 내보내는 거예요. 그러더니 저한테 모니터링을 하자고 했어요. 모니터링은 처음이지만 하라니까 해야지 하면서 자리로 갔는데, 저를 모니터 앞에 앉혀 놓고 감독도 밖으로 나가는 거예요. 화면을 보니까 딱 알겠더라고요. 이게 말로만 듣던 영화 앵글이구나. 바스트 숏인데 제가 풀 숏 연기를 하고 있더라고요. 얼굴이 화면 밖으로 나갔다 들어왔다.

하퍼스 바자 감독님의 인품이 아주 훌륭하시네요.

안민영 그러니까요. 보통은 “움직이지 말고 하세요”라고 소리쳤을 텐데. 아직도 류형기 감독과 그 작품의 주요 스태프들과 친하게 지내고 있어요. 그 인연 덕분에 차차 다른 기회도 만나게 되었고.


점프수트는 Julycolumn. 니트 베스트는 Münn. 목걸이는 Swarovs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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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퍼스 바자 연극 무대에서 오래 활동하셨는데, 영화 매체 연기에 부침이 없었는지요?
안민영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빨리 적응을 했냐고 더러 물어보는데, 제가 이른 나이에 연극과 영화를 병행했으면 아마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하지만 전 이미 내려놓은 상태로 영화를 시작했잖아요.
하퍼스 바자 이를테면 무엇을 내려놓은 건가요?
안민영 40대에 영화를 시작하다 보니 제 모습이 예쁘게 나오는 것도 포기했고, 주인공 자리도 포기했어요. 제가 어떻게 나오기를 바라는 욕심이나 기대가 없으니까 스크린 위의 내 모습이 하나도 어색하지 않은 거예요.
하퍼스 바자 거꾸로 오랜 기간 무대에 섰기 때문에 오히려 몸에 밴 스타일을 고집하는 경우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안민영 연극을 시작한 초창기부터 저는 과하게 연기하는 스타일을 싫어했어요. 그래서 욕을 많이 먹었죠. 선배들이 너 그렇게 연기할 거면 서울 가서 영화 하라고 했어요. 그땐 그게 욕이었거든요. 한 십 년쯤 지나니까 그나마 톤을 조절할 수 있게 됐어요. 욕을 좀 덜 먹으면서도 내가 하고 싶은 스타일로 연기하기. 그래서 영화 매체 환경에 빨리 적응한 것일 수 있어요.
하퍼스 바자 매체마다 시대마다 연기 스타일과 테크닉은 달라질 수밖에 없죠.
안민영 맞아요. 무대에서는 사실 배우가 편집하는 게 가능하거든요. 관객의 시선이 좀 더 나를 향하게 만들 수도 있고, 필요하다면 나를 더 돋보이게 욕심을 낼 수 있죠. 클로즈업을 배우가 할 수 있다고 할까요. 일종의 테크닉이죠. 하지만 영화에서는 그런 욕심을 낼 수가 없고, 편집은 오롯이 감독의 몫이에요. 특히, 상업영화의 경우에는 정보 전달에 충실해야 하는, 입체적이지 않은 역도 많이 맡았고요. 거기에까지 욕심을 낼 수야 없는 일이죠. 생때같은 아이들을 책임져야 하는 저의 자리가 새로운 환경에 적응과 습득을 빨리 하게 만든 것일 수도 있어요.
하퍼스 바자 서울에 온 지 불과 15년인데, 그간 정말 많은 작품을 하고 단단하게 뿌리를 잘 내리셨네요. 그 힘의 근원은 뭔 것 같아요?
안민영 글쎄요…. 결국 사랑 아닐까요? 인스타그램 프로필에 제가 ‘연극 영화 드라마 하는 사랑’이라고 써놓았어요. 사람의 오타가 아니라, 약간 중의적인 표현으로요. 작품을 하는 사람인데 그 작품들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한다는 의미예요.
하퍼스 바자 어떤 작업들이 특히 기억에 남나요?
안민영 너무 많아서 손꼽기 어렵지만, 연극 얘기를 하자면 <행인두부의 마음>이라는 2인극이 기억나요. 지금은 남편이 된 문호진 배우와 함께 출연한 작품이에요. 그와 거의 15년간 만나며 정말 많이 싸웠고 헤어짐도 반복했어요. 왜냐하면 남편은 총각인데 나는 애가 있고, 아이들은 사춘기 한복판이고. 제 솔직한 심정은 ‘그래 제발 나랑 헤어지고 젊고 예쁜 여자 만나서 알콩달콩 잘 살아라’ 하는 것이었죠. 너무 미안해서요. 당시 남자친구였던 그가 헤어지는 기념으로 헤어지는 장면이 있는 2인극을 같이 하자고 제안했어요.
하퍼스 바자 듣는 것만으로도 애달픈데요.
안민영 마지막 대사가 너무 슬펐죠. 우리 안 헤어지면 안 될까.
하퍼스 바자 결혼은 언제 하셨어요?
안민영 이제 4년쯤 됐어요.
하퍼스 바자 늦었지만 정말 축하드려요. 그간 힘겹고 고단한 날들이 많으셨겠지만 지금은 참 편안해 보여요.
안민영 애들도 다 독립을 했고, 월세 걱정도 없고, 좋은 일도 많이 생겼어요. 하루는 아침에 눈을 떴는데 오늘의 걱정거리가 없는 거예요. 그 감각이 그저 좋다기보다는 너무 낯설어서 제가 걱정할 뭔가를 까먹은 줄 알고 기억해내려 애쓴 적도 있어요. 주어진 자유 시간에 몸 둘 바를 모르기도 했고요. 그런데 이제는 좀 익숙해졌어요.
하퍼스 바자 영화에서는 엄마 역할을 정말 다양하게 하셨죠. <마더 인 로> <마이 에그즈> <창밖은 겨울> 등등. 엄마 역이 많았던 이유 중 하나가 2010년 중반 들어 독립예술영화계에서 두각을 나타난 여성 감독들의 영향이라고 생각해요. 그 흐름 속에서 여성 서사가 다채롭게 등장했고요. <69세>에서 함께한 임선애 감독은 “배우 안민영이 연기한 엄마는 항상 그 사람 자체가 궁금해지는 얼굴”이라고 평하더라고요.
안민영 지금 얘기하신 영화 속 엄마들은 시나리오를 읽을 때부터 인물의 마음이 훅 느껴졌어요. <창밖은 겨울> 속 엄마는 실제 제 엄마를 모티프 삼아 연기하기도 했고요. 간혹 엄마 캐릭터가 단선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경우에는 내가 누군가의 엄마로 살아온 이력이 있으니 감독에게 좀 더 풍부한 캐릭터 해석을 제안하기도 해요. 그렇게 인물들을 만들어온 것 같아요.
하퍼스 바자 <마이 에그즈>를 함께한 김소이 감독은 “배우 안민영은 감독이 예상한 범위를 훌쩍 뛰어넘는 연기를 펼쳐 보인다. 특히 코미디 감각이 뛰어나다”라고 말하더군요.
안민영 정말 감사한 말이에요. 중학교 1학년 때 장래 희망이 개그맨이었는데, 제가 생각보다 별로 웃긴 사람이 아닌 것 같아서 포기했거든요. 늘그막에 시트콤에서 할머니 역할 하는 게 제 버킷리스트예요.
하퍼스 바자 배우가 된 후 좀 더 나은 사람이 된 것 같나요?
안민영 배우라는 직업을 통해 많은 인물을 만나고 사람 공부도 하다 보니까 조금씩 원래보다는 나은 인간이 되고 있지 않나 싶어요. 내가 하는 이 일이 얼마나 인류에 도움이 되나 의구심이 들기도 하고요. 결과물의 가치와 완성도를 떠나 만드는 과정까지가 다 좋아야 한다는 생각이 점점 더 들어요. 작품 하나가 세상에 미치는 파급을 생각하면 절대 쉽게 이 일을 대해서는 안 될 것 같아요.
하퍼스 바자 출연하신 두 편의 영화가 개봉을 기다리고 있죠. <장손>과 <한국이 싫어서>.
안민영 네, 홍보 좀 해도 되나요?(웃음) <장손>은 경상도를 배경으로 한 삼대의 이야기인데, 가업을 물려받지 않겠다는 영화감독 지망생 아들의 엄마로 출연해요. 가족사와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적인 면모가 교차하는 작품이에요. 미장센도 아름다워서 극장에서 볼 가치가 아주 충분합니다.(웃음) <한국이 싫어서>의 장건재 감독은 개인적으로 정말 응원하는 감독이에요. 저는 짧게 출연했는데, 주연인 고아성 배우가 동세대 목소리를 대변하는 역을 맡았어요. 정말 매력적인 배우예요. 두 영화 모두 많은 관객과 만나면 좋겠어요.

Credit

  • 프리랜스 에디터/ 김현민
  • 사진/김영준
  • 헤어/ 한지선
  • 메이크업/ 홍현정
  • 스타일리스트/ 김경선
  • 어시스턴트/ 정지윤
  • 디자인/ 이진미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