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미국 젊은 여성들은 좌절의 한숨을 내쉬었다. ‘세계에서 가장 섹시한 남자’ 존 F. 케네디 주니어가 조지아주 외딴 섬에서 조촐한 비밀 결혼식을 올렸기 때문. 미국 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의 아들이자 배우 뺨치는 외모와 몸매, 잘나가는 잡지 발행인, 재벌 부럽지 않은 재력을 가진 남자. 그의 결혼 소식이 전해진 날 미국 방송사들은 앞다투어 특집 보도를 했다. “너무나 매력적인 존 F. 케네디 주니어를 차지한 여자라면 모든 사람들을 사로잡을 거예요.” 이 마성의 남자를 사로잡은 여인은? 바로 캐롤린 베셋 케네디다.
누군가의 말처럼 캐롤린은 등장과 동시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타블로이드와 파파라치는 단번에 캐롤린을 에워쌌고, 그녀의 이름이 하루라도 언급되지 않는 날이 없었다. 화장기 없는 말간 얼굴과 푸른 눈동자, 내추럴한 블론드 헤어 그리고 공들이지 않은 듯 멋스러운 스타일은 연일 화제를 모으며 뭇 여성들의 워너비로 떠올랐다. 지금도 꾸준히 회자되고 있는 ‘새로운 케네디 부인’의 웨딩드레스는 캐롤린 시대의 출발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심플한 실크 슬립 드레스 디자인으로 당시 캘빈 클라인의 디자이너였던 나르시소 로드리게즈가 만들었다.) 캘빈 클라인의 홍보 담당자였던 그녀의 스타일은 한마디로 ‘1990년대 미니멀리즘’ 그 자체였다. 캐롤린의 패션을 탐구한 책 <CBK: Carolyn Bessette Kennedy, A Life in Fashion>에서 가브리엘라 허스트는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억지스러운 게 없었어요. 그 부분이 그녀를 카리스마 있게 만들었죠. 호화롭지 않지만 고급스러웠습니다. 그녀에게 옷이 몇 벌뿐이었다는 사실은 캐롤린이 굉장히 모던했다는 것을 잘 보여주죠.” 오랜 팬인 요지 야마모토의 블랙 테일러드 수트를 즐겨 입고 화이트 셔츠, 블랙 코트, 롱앤린 실루엣의 LBD, 펜슬 스커트, 스트레이트 팬츠가 주를 이루는 그녀의 지적인 스타일은 ‘캐롤린의 작은 옷장’에서 비롯된다는 사실. 여기에 액세서리는 파파라치 사진에 일 년 내내 목격된 프라다 1995 백(서운할 정도로 심플한), 오벌 셰이프의 선글라스, 두꺼운 헤어밴드, 머리에 질끈 묶어 연출하는 스카프, 사각 손목시계뿐이다. 실제로 그녀는 과도한 레이어링과 액세서리를 꺼리기로 유명하다. 한 번 입고 옷장에 처박아두는 요즘 잇 걸과 다른 행보는 최근 트렌드로 자리 잡은 조용한 럭셔리의 선두주자답다. 여기에 수수께끼 같은 매력과 비극적인 결말(1999년 경비행기 추락 사고)은 그녀를 시대를 초월한 패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캐롤린 베셋은 사진이나 인터뷰를 거부했기 때문에 더 흥미로웠죠. 제 생각엔 언론 매체와 거리를 유지했던 시어머니로부터 배운 것 같아요. 카다시안가와는 정반대예요. 만일 그녀가 사람들에게 노출되었다면 아마 히트 상품이 되었을 거예요. 미국인에게 그녀는 다이애나 비에 가장 가까운 존재였어요.” <뉴욕 포스트> ‘페이지 식스’의 에디터였던 칼럼니스트 리처드 존슨의 말이다.
불의의 추락 사고로 케네디 부부가 세상을 떠난 지 25주년. 캐롤린을 추모라도 하듯, 지금의 패션계는 그녀가 환생한 듯한 룩을 대거 등장시켰다. 요란뻑적지근했던 Y2K와 바비코어가 유행하는 사이, 서서히 스며들기 시작한 조용한 럭셔리와 올드 머니 패션의 등장도 미니멀리즘의 부활을 촉발했다. “이념과 견해에 관한 이야기는 지겹습니다. 이제 옷 이야기 좀 합시다.” 미우치아 프라다의 말처럼 전례 없는 혼돈의 시기를 겪는 지금, 우리가 점점 실질적인 것에 집중하는 건 자연스러운 흐름일지도. 1990년대 아카이브를 오마주한 피터 도의 헬무트 랭 데뷔 쇼를 시작으로 더 로, 프로엔자 스쿨러, 티비, 가브리엘라 허스트, 베브자(Bevza) 등 뉴욕에서 시작된 미니멀리즘의 열풍은 보테가 베네타, 구찌, 베르사체, 토즈, 지방시 등 럭셔리 하우스로 이어졌다. 아미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알렉상드르 마티우시(Alexandre Mattiussi) 역시 1990년대로 향했다. “패션과 사랑에 빠졌던 1990년대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1990년대의 전형적인 테일러링을 따르고 있죠. 비율에 집중하고, 기교는 최소화했습니다.”
20여 년이 흘렀지만 캐롤린의 스타일은 여전히 훌륭한 패션 교과서다. <뉴욕 타임스>는 그녀를 고스트 인플루언서라 칭하기도. 여전히 패션 디자이너들의 무드 보드 한쪽을 차지하고 있으며, 미디어는 ‘캐롤린 베셋처럼 옷 입기’ 기사를 정기적으로 게재한다. 또 인스타그램과 틱톡에서도 끊임없이 그녀의 자료가 업로드되고 있다. 사실 패션에 있어 단순함은 말처럼 간단하지가 않다. 단순함을 근사하게 풀어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단순한 디자인이 성공한다>의 저자 자일스 콜본은 “사람들은 단순하고 믿을 수 있고 융통성 있는 제품을 사랑한다. 복잡해지는 것은 한순간이다. 반면 단순해지기 위해서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단순함은 명석함과 명쾌함을 모두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노력하지 않아도 멋진(그러나 노력이 필요한) 캐롤린’을 꿈꾼다면 몇 가지를 꼭 기억할 것. 첫 번째, 어떠한 일이 있어도 핏은 포기하지 말자. 두 번째, 많은 옷이 필요하지 않다. 싸구려 여러 개보다 질 좋은 아이템 하나가 낫다. 세 번째, 패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 ‘자신감’이 필수다. “좋은 교육, 매너, 결점 없는 외모, 우아함의 특별한 조합이죠. 캐롤린의 말과 움직임을 보세요. 청바지에 티셔츠, 샌들 차림일지라도 그녀는 사람들이 얻으려고 애쓰는, 그 무언가를 갖고 있었습니다.” 캐롤린을 떠올리며 마놀로 블라닉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