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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저항 없이 끌어안는 배우', 장선과 나눈 대화.

ACTOR'S CHAIR #3 배우 장선

프로필 by BAZAAR 2023.12.28
 
코트, 팬츠는 Gabriela Hearst. 반지는 & Other Stories. 뱀피 패턴 뮬은 Pieton.
 

오늘 화보 촬영은 어땠어요?
릴랙스된 느낌이라 좋았어요. 지금까지의 저와는 다른 새로운 이미지이기도 하고, 다양한 느낌이기도 해서 재밌었던 것 같아요.
아무래도 배우는 자신이 다양한 이미지로 드러나길 바라나요?
배우들마다 다르긴 하더라고요. 저는 배우를 꿈꿨을 때부터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어요.
처음으로 연기를 하고 싶다고 느꼈던 때가 기억나요?
초등학교 시절이었던 것 같아요. 사람들 흉내 내는 것도 좋아하고 늘 거울을 보고 놀아서 엄마가 농담처럼 “쟤 저러다가 TV 나오겠어” 하셨어요. 엄마의 반복되는 농담에 막연히 나 어쩌면 배우가 될 건가, 생각하게 된 것 같아요. 그러다가 성당에서 수녀님들이 올린 순교자를 위한 공연을 봤는데 충격적이었어요. 무대 오르기 전까지 저와 재밌게 놀던 수녀님이 갑자기 돌변하는 그 모습. 처음 느끼는 에너지였어요.
그렇게 연극영화과에 진학하게 되고, 졸업 후 연극 무대에서 본격적인 커리어를 시작했죠. 왜 연극이었나요?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알고 보니 단국대가 꽤 연극 중심의 학교였더라고요. 제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카메라 연기 수업이 없었어요. 연극의 재미에 빠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던 것 같아요. 자연스럽게 연극으로 애정이 기울었죠.
 
괴물 같은 영화 데뷔작이 이승원 감독의 <소통과 거짓말>(2017, 부산국제영화제 ‘올해의 배우상’ 수상)인데 촬영은 언제였죠?
2015년요. 졸업하고 4~5년 정도 연극을 하다가 영화를 하게 된 거였어요.
그 시간이 길었다고 생각하나요, 짧았다고 생각하나요?
글쎄요. 당시에는 참 길게 느껴졌는데 지나고 나니까 길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땐 공연을 해도 수입이 없었기 때문에 계속 투잡, 스리잡을 하면서 그 시간을 보냈고, 그런 현실이 정말 슬펐거든요.
어떤 종류의 슬픔이었나요?
그러니까 연기에 집중해야 할 시간에 뭔가를 팔고 있으니까요. 지나고 보니 그것도 다 공부더라고요. 동대문에서 아르바이트할 때 알게 된 언니의 캐릭터가 참 재밌었는데, 인물을 맡을 때 그 언니를 좀 떠올려보기도 하고요. 지금은 저에겐 모든 게 자산인데 당시에는 내 시간을 연기에만 알차게 집중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있었던 것 같아요.
뭔가를 팔았다고 했는데 주로 어떤 것들이었나요?
아르바이트를 아주 다양하게 했어요. 에버랜드에서 퍼레이드 댄서도 했고, 유적지 같은 데서 아이들한테 역사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도 했고, 호프집 서빙, 백화점에서 방향제도 팔고, 동대문에서 옷도 팔고요. 결국 다 사람을 만나는 일인데 그런 걸 힘들어하지 않는 편이었어요. 적응력도 빠르고요.
 
 
잘 웃잖아요, 환하게. 작품을 볼 때도 느꼈지만 아까 촬영하면서도 새삼 놀랐어요. 성인이 어떠한 주저함도 없이 저렇게 환하게 웃을 수 있다니. 완벽한 웃음이다.
원래 잘 웃는 것 같아요.(웃음) 어릴 때도 넌 뭐가 좋아서 만날 그렇게 웃고 있니, 이런 말을 많이 들었던 것 같고. 제가 연기했던 캐릭터에도 자연스럽게 묻어나오긴 하는데 힘들 때도 웃는 편이에요.
그래서 장선이 연기하는 인물들은 묘한 페이소스가 있는 것 같아요. 얼굴은 웃고 있는데 눈이 슬퍼 보일 때가 있거든요. 배우에겐 자신의 몸이 연기하는 도구인 셈인데, 참 좋은 도구를 가지고 있지 않나 생각했어요.
그래서인지 연기하면서 나를 더 좋아하게 된 것 같아요. 전혀 의도하지 않고 삶이 쌓여서 만들어진 것이든 혹은 그저 타고난 것이든 그것들이 작품 속 인물과 만나 개성이 되고 매력이 될 때 나의 이런 모습에 참 고맙다 싶어요.
그러면 원래 자기 자신을 긍정하고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나요?
불과 2~3년 전만 해도 그랬던 것 같아요. 전형적으로 타인에 관대하고 나에게 엄격한 타입이었어요. 연기를 좋아하는 마음에 비해 나는 항상 부족한 거죠. 가진 게 너무 없고. 그런 생각이 어떤 때는 원동력이기도 했어요.
그 부족함은 어떤 측면에서인 거죠?
이 인물을 완벽히 만나고 싶다, 라는 불가능한 욕망에 계속 도전하는 일이잖아요. 그러다 이런 원동력으로는 이 일을 오래 할 수 없겠다고 깨달았어요. 건강하게 오래 이 일을 하려면요. 사실 오늘의 만남도 지난날의 나 덕분이잖아요. 요즘은 내가 나에게 더 고마워하고, 더 아끼려고 해요.
 
장선의 연기나 선택한 작품들을 보면서 줄곧 용감하다고 생각해왔어요. 몸을 사리지 않는구나. 그러니까 내가 어떻게 보여야 한다, 혹은 보이고 싶다, 하는 것에 개의치 않는 요즘 보기 드문 배우라고 생각해요. 시선 앞에서 자기 자신을 의식하지 않는다고 할까요.
그건 맞아요. 연기할 때 저를 지우길 바랐어요. 그리고 제가 자신감이 없다는 점이 그렇게 연결된 것 같아요.
흥미롭네요. 자신감 없음이 나 자신을 지우는 방식으로 연결됐다는 말인가요?
그렇죠. 나보다는 지금 이 인물이 더 중요한 거죠. 자신감이 있어서 힘 있는 연기를 하는 배우들도 있지만, 저는 그 반대였던 거죠.
그 출발이 무엇이든 관객으로서는 어쨌든 좋은 결과를 맛본 건데,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네요.
출발은 스스로한테는 다소 좋지 않았다고 해도 저를 역할에 내던진 건 맞아요.
데뷔작도 그렇고 같은 해 개봉한 <해피뻐스데이>(2017) 등을 보면 정말 연기가 무시무시하거든요. 어떤 처절함까지도 느껴진 이유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 초기작들에서 남긴 인상이 워낙 커서 어떤 편견도 생기진 않았을까요? 안선경 감독은 그 영화를 보고 소통이 가능한 배우일까, 하는 의문이 있었다고 했어요.(웃음)
그랬던 것 같아요. 자기 세계에만 갇혀 있는 듯한 이미지. <바람의 언덕>(2020) 박석영 감독님은 저를 캐스팅하고 나서 주변 사람들에게 “괜찮겠어?”라는 말도 들었다고 하시고.(웃음) 저는 열려있는 배우거든요. 감독님 관찰도 많이 하는 편이고. 감독님들마다 스타일이 다르니까 촬영장에서도 어떤 분인지 어깨 너머로 살펴보고, 다가가서 이야기도 많이 나누고 싶어 하는 스타일이에요.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재미가 크거든요.
그렇다면 대중이나 관객과의 소통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결국 보는 사람을 향해서 뭔가를 내놓는 직업이잖아요.
그래서 엄청 긴장되는 일이죠. 사실 영화는 세상에 나올 때 그제야 비로소 완성되는 거잖아요. 관객분들의 감상을 들으면서 울컥할 때가 참 많았던 것 같아요. 대화를 나누는 것도 좋고요. 그런데 피드백 측면에서 제가 가장 비중을 두는 건 역시 저의 만족도예요.
그 기준은요? 영화를 봤을 때 내가 저기 잘 묻어나 있는가 하는?
맞는 것 같아요. 내가 저 세계에 존재하고 있는 것 같은지 아닌지. 아까 얘기했든 아주 엄격한 잣대를 대면서요.
 
연기를 시작하고 난 후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 있나요?
대학 다닐 때 러시아 극작을 올린 적이 있는데, 트리플 캐스팅이라 동선까지 정말 첨예하고 정밀하게 맞춰놓은 작품이었어요. 죽은 동생의 장례식을 막 마치고 온 장면이 있는데, 무대에 오르기 직전에 그 동생 역을 맡은 배우가 잘하라면서 제 손에 핸드크림을 발라줬어요. 무대에 서있는데 그 향과 손의 감촉이 여전히 남아있는 거예요. 그때 급격한 상실감이 몰려오면서 연기의 감정이 제 계산과는 완전히 다르게 흘러갔어요. 연습할 때 웃었던 부분에서 운다든가 울었던 장면에서 갑자기 웃는다거나. 저도 모를 감정의 파고를 경험했던 것 같아요.
그렇게 연기하고 무대에서 내려오니 연출가가 뭐라고 하던가요?
연출님은 좋아하셨어요.(웃음) 왜 그러신 것 같냐면, 제가 어릴 때부터 힘들어도 사람들 앞에서는 웃었다고 했잖아요. 교수님이 제가 처음으로 저의 감정을 온전히 자유롭게 받아들인 것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저에겐 터닝포인트였어요.
그런 게 우리가 소위 얘기하는 “이것은 허구이지만 진실을 연기한다”에 가까운 것인가요?
그런 것 같아요. 그래서 늘 그때의 마음처럼 연기하고 싶은 것 같고요. 그렇다고 매번 그렇게 되지만은 않지만.
맡은 인물에 대한 사명감이 있나요?
있죠. 특히 실제 인물을 모티프로 한 경우에는 더 그렇고요. 그럴 땐 리서치도 많이 하고 그 사람의 마음을 내 안에 계속 심으려고 하는 것 같아요. 생각의 구조를 실제로 내가 그런 일을 겪었던 것처럼 기억을 조작하는 느낌으로. 시간이 허락한다면 애정을 갖고 아주 오랫동안 그렇게 해요.
 
튜브톱 드레스는 LEHHO. 귀고리, 반지는 & Other Stories. 
 
큰 예산이 들어간 대작 <콘크리트 유토피아>에 짧지만 인상적인 역할로 등장했잖아요. 어땠어요?
어려웠어요. 일단 그렇게 큰 세트장에서 촬영을 해보는 것 자체가 처음이어서 거기에 적응하는 시간도 필요했던 것 같아요.
압도됐나요?
정확히요. 배우가 현장에 가기 전 작품을 분석하고 익히는 과정도 중요하지만, 현장 공기를 딱 받아들이고 거기 얼마나 빨리 적응하느냐도 아주 중요한 문제라는 걸 배운 것 같아요.
작품에서 인간성을 상징하는 인물을 맡았잖아요. 믿을 수 있는 사람의 이미지가 있어요.
그럴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러고 싶죠, 항상.
믿을 만한 기량을 가진 동시에 어떤 긴장을 주기도 해요. 저 장면에서 장선이 어떻게 표현하고 연기할지를 모르겠는.
정말 감사해요. 지금 말씀하신 게 정확히 제가 원하는 방향성이에요.
요즘 연극을 준비하고 있잖아요. 이승원 연출의 <모럴 패밀리>. 5년 만의 상연이죠.
5년 전에는 큰언니 역이었는데 이번엔 여동생 역이에요. 이 인물은 역대급으로 저와 달라요. 이승원 연출이 원하는 방향이기도 하고요.
그게 어떤 거죠?
저는 상대방과 즉각적으로 주고받는 게 잘 되는 배우예요. 액션이든 감정이든. 그런데 이번엔 즉각적인 반응을 절대 안 하는 인물이에요. 자기만의 벽이 아주 두껍고 세상을 향한 경멸이 짙게 깔려 있어요. 저와 아주 다른 인물을 만난다는 희열이 있는 반면, 아직도 이 친구가 누구인지 계속 찾고 있는 중인 것 같아요.
<모럴 패밀리>는 어떤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이 작품을 처음 봤을 때 마음을 주체를 못해서 1시간 반을 걸어다녔던 것 같아요. 같이 본 친구와 말 없이요. 누군가의 진짜 삶 속으로 들어갔다 나온 느낌이 들었어요. 그러니 인물에 대한 애정도 깊게 생겨버렸고. 그게 놀라웠던 것 같아요.
우리는 왜 그렇게 진짜 같은 걸 보고 싶어 할까요?
그러니까요. 우리는 사회적으로 살고 있지만 소설이나 영화를 보듯 어떤 사람을 그렇게까지 집중해서 바라보진 않잖아요. 현실에서 그렇게 내밀하게 누군가를 만날 수 있을까요. 한 사람을 그렇게 따라가고 집중하고 이해하려고 하다 보면 종국엔 내 삶으로 연결되는 것 같아요. 그게 나이든 내 옆의 누구이든 전혀 이해되지 않던 사람을 좀 더 다른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죠. 또 그랬으면 좋겠고요. 이런 마음이 극 중 인물이 더 살아있길 바라는 배우로서의 책임감과 이어지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인간에겐 기본적으로 타자를 이해하고자 하는 호의가 있는 거네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나 봐요. 그게 결국 자기를 이해하는 과정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 의미에서 예술작품은 어쩔 수 없이 영적인 것 같아요.
 
배우가 아닌 다른 인생을 선택한 자기 자신을 상상할 수 있나요?
상상이 잘 안 되네요.(웃음)
지독한 연기 사랑이네요.(웃음) 배우가 된 후 좀 더 나은 사람이 된 것 같나요?
그런 것 같아요. 20대 초반의 언젠가 일기장에 이렇게 써놓았더라고요. “이렇게 고마운 연기에게 보답할 수 있는 배우가 되어야지.” 그걸 찍어서 가지고 있어요. 연기 덕분에 나의 감정을 내비치고 싶지 않은 벽을 깼고,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사람을 살아내다 보니 그를 이해하게 됐고. 그러다 보니 사람을 그냥 그 사람으로 바라보는 힘이 있는 것 같다는 얘기를 들은 적도 있고요. 일상에서도 선입견 없이 사람을 대하는 능력치가 생긴 것 같아요. 
 

Credit

  • 프리랜스 에디터/ 김현민
  • 사진/ 김영준
  • 헤어/ 한지선
  • 메이크업/ 홍현정
  • 스타일리스트/ 김경선
  • 어시스턴트/ 허지수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