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드레스X의 디지털 룩을 활용해 SNS에 사진을 올린 여성. 2 드레스X에서 선보인 우크라이나 지원 하트 귀고리. 3 발렌시아가의 2022 F/W 쇼의 푸른 드레스. 4 우크라이나를 위한 행동을 촉구하는 메시지가 담긴 드레스X의 모자.
샤넬을 비롯한 많은 패션 기업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대응으로 러시아에서의 영업을 중단했다. 특히 샤넬은 러시아에서 일시적으로 매장을 폐쇄하고 배송을 중단하는 것 외에도 다른 국가의 매장을 찾은 고객에게 샤넬 제품을 러시아에서 착용 및 사용하지 않을 것임을 증명하는 서류를 요청하고 있다. 샤넬의 이와 같은 방침은 유럽연합(EU)의 제재를 준수하기 위한 것으로 EU는 러시아의 법인이나 단체 등에 직간접적으로 사치품을 판매, 공급, 수출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샤넬 측은 이 제재 조치는 품목당 3백 유로(약 3백26달러)를 초과하는 사치품에 적용되며 이는 대부분의 샤넬 제품에 적용된다고 덧붙였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후 두 달여가 흐른 지금, 유엔 인권사무소에 따르면 4월 10일 기준 어린이 2백92명을 포함한 우크라이나 민간인 사상자가 3천4백55명 발생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이는 접전지의 사상자가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 실제 사상자 수는 이를 훨씬 웃도는 수치일 것으로 예측된다.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뉴스가 보도되자 전 세계 SNS는 우크라이나의 국기 색인 파랑과 노랑으로 물들었고, 우크라이나를 지지하는 ‘#StandWithUkraine(우크라이나와 함께 저항할 것)’ 해시태그 운동이 활발하게 이어졌다. 전쟁과는 사뭇 멀게 느껴지는 패션계에도 그 바람은 거세게 불어왔다. 특히 전쟁의 발발 시기와 맞물린 밀라노와 파리의 2022 F/W 패션위크는 전례 없이 침울했고, 이미 반년 전에 컬렉션을 구상한 디자이너들은 자신의 패션쇼가 시국과 맞물려 어떤 평가를 받게 될지 긴장해야 했다. “지금부터 선보이는 쇼들은 어느 때보다도 엄숙하게, 그리고 이 어두운 시간들을 반영해 진행하도록 장려하겠습니다.” 시기가 시기인 만큼, 파리 오트 쿠튀르 협회의 회장인 랄프 톨레다노(Ralph Toledano)도 위와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파리 디자이너 중 가장 먼저 런웨이를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낸 이는 발렌시아가의 뎀나 바잘리아. 그는 1990년대 초, 겨우 12살의 나이에 조지아 내전을 겪은 뒤 난민 생활을 한 경험이 있다. “이번 주 이 쇼에서 일하는 것이 저에겐 매우 힘든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시기에 패션은 그 타당성과 존재의 권리를 잃기 때문이죠. 현재 상황에서 패션위크는 일종의 부조리처럼 느껴집니다. 저와 저희 팀이 열심히 준비한 쇼를 취소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이 쇼를 취소하는 것이 거의 30년 넘게 제 자신을 너무도 아프게 한 악에 굴복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더 이상 제 일부를 무의미하고 무자비한 자존심 전쟁에 희생할 수 없다고 결심했습니다.” 본디 그가 기후위기에 대한 심각성을 일깨우고자 기획했던 눈보라 속 캣워크는 러시아 군대를 피해 피난길에 오른 난민들을 연상케 했고, 우크라이나의 국기 색을 담은 룩과 모델들 손에 쥐어진 쓰레기 봉투 모양의 가방은 그 무드를 고조시키기에 충분했다. 또 그보다 앞서 열린 조르지오 아르마니의 밀라노 쇼는 보다 우회적인 방식으로 우크라이나 사태를 규탄했다.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극을 통감하며 쇼에서 어떠한 음악도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침묵을 통해 옷이 더 강력해졌죠.” 침묵 속에 치러진 런웨이 쇼 피날레엔 미스터 아르마니의 행보를 지지하는 이들의 함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한편 우크라이나 태생의 디자이너들은 보다 개인적이고도 직접적인 방식으로 전쟁의 참상을 알렸다. 자신의 정체성을 미니멀한 디자인에 담아내왔던 베브자(Bevza)의 스비틀라나 베브자는 자신의 SNS에 “뉴욕 패션위크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나와 내 가족은 이곳, 키이우(우크라이나 수도)에 머물기로 결정했습니다. 어젯밤엔 1분에 한 번씩, 총 20분 동안 무언가 폭발하는 소리를 들었죠. 러시아군이 도심과 공항에 로켓을 발사했고, 건물은 파괴되었으며 민간인들이 죽었습니다.”라는 생생한 피드를 올려 많은 이들을 안타깝게 했다. 디지털 패션 마켓플레이스 드레스X(DRESSX)의 공동 설립자이자 패션 저널리스트인 다리아 샤포발로바(Daria Shapovalova) 또한 우크라이나인으로, 그녀는 판매 수익금 전액을 우크라이나 국방부와 자선기금 단체로 보내는 ‘우크라이나 지원’ 디지털 컬렉션을 만들어 주목을 받았다. 그 외에도 비타 킨(Vita Kin), 안나 옥토버(Anna October)와 같은 우크라이나 디자이너들이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국기를 올리며 패션계를 비롯한 전 세계인이 우크라이나를 지지해주길 염원했다.
세계적인 패션 기업들은 우크라이나 사태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을까? 가장 발 빠르게 대처한 브랜드는 우크라이나와 인접한 국가인 헝가리 브랜드 나누슈카(Nanushka)와 덴마크 브랜드 가니(Ganni)로, 이들은 러시아 내 판매를 즉시 중단했다. “이것이 러시아의 국민과 우리의 파트너가 한 결정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회사의 도덕적 가치에 따라 러시아와 거래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나누슈카의 CEO인 피터 발다스치(Peter Baldaszti)가 말했다. 가니는 이 소식을 브랜드 SNS에 게재하는 한편 분쟁으로 인해 고향을 잃은 난민들을 지원하기 위해 덴마크 난민위원회에 10만 크로네(한화로 1천8백만원)를 기부하고, 추가적인 기부를 장려하는 링크를 인스타그램 프로필에 게시했다. 럭셔리 하우스들도 이 움직임에 속속 동참했다. 앞서 언급한 샤넬은 러시아에 있는 부티크를 모두 폐쇄하고, 러시아의 모든 전자 상거래를 중단했으며 국제원조구호기구(CARE)와 유엔난민기구(UNHCR)에 2백만 유로(한화 약 26억원)를 기부했다. 루이 비통과 디올, 펜디 등을 소유한 거대 패션그룹 LVMH는 이 갈등의 피해자들을 돕기 위해 국제적십자위원회(ICRC)에 5백만 유로(한화 약 67억)를 기부하는 통 큰 행보를 보여주기도. 아울러 LVMH는 러시아에 있는 1백여 개 브랜드 매장의 영업을 중단하되 3천5백 명의 직원들에게 지속적으로 급여를 지급할 것을 약속했다. 런웨이 쇼를 통해 앞장섰던 발렌시아가도 추가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바로 기존에 지원해오던 세계식량계획(WFP)에 미공개 금액을 기부한 것인데, 최근 WFP는 우크라이나와 인근 국가에서 탈출하는 사람들에게 식량지원을 제공하기 위해 긴급 작전을 진행 중임을 밝힌 바 있다. 발렌시아가, 구찌 등의 모회사인 케어링 그룹 역시 “우크라이나 난민들을 위해 UNHCR에 상당한 기부를 할 것이며 이 분쟁이 평화적으로 해결되길 바란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그 밖에도 질 샌더와 디젤, 메종 마르지엘라 등을 소유한 OTB 그룹은 이탈리아 패션 기업 중 최초로 UNHCR에 미공개 금액을 기부했고, 그 밖에도 버버리, 에르메스, 발렌티노, 프라다, 리치몬트, 스와치 그룹 등이 러시아 매장을 일시 폐쇄하거나 국제기구에 지원금을 보내며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다.
패션 언론인들도 힘을 모았다. 지난 3월 1일, 영국의 패션 플랫폼이자 매거진인 〈원 그래너리(1 Granary)〉가 패션 업계에 보내온 공개 서한은 패션의 순수한 힘을 상기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패션업계와 그들의 지도자들에게 우크라이나와 함께 서서 러시아의 침략을 강력히 비난할 것을 요청합니다. (중략) 패션에는 힘이 있습니다. 패션은 거대한 문화, 경제, 그리고 심지어 정치적 영향력을 가진 1조 달러 규모의 산업입니다. 위기의 시기에 그 힘을 무시하거나, 낭비적이고, 경박하고, 위선적이거나 필수적이지 않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패션 공급망들은 전 세계의 나라를 연결하고 있으며, 패션 미디어는 모든 곳에 있는 수많은 추종자들에게 도달하고 있고, 패션의 창조적인 언어는 보편적이기도 합니다. 패션은 재능, 기술, 네트워크로 가득 찬 산업입니다. 이러한 도구는 주변 사람들의 삶을 개선할 수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어디에 있든 등을 돌리지 말고, 눈을 감지 마세요. 우리는 우리의 정부가 강력한 제재를 계속 시행하고 우크라이나에서 자유, 민주주의, 주권이 보장될 수 있도록 원조를 제공할 것을 요구할 것입니다. 또한 패션 커뮤니티와 영향력 있는 패션 하우스들이 침묵하지 않고 그들의 플랫폼을 사용하고, 직접 도움을 줄 것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이 서한에 사진가 닉 나이트부터 미소니 그룹의 안젤라 미소니, 디자이너 크리스토퍼 케인, 클레어 웨이트 켈러, 몰리 고다드를 비롯해 〈바자〉 미국판의 편집장 사미라 나스르, 매치스패션의 공동 CEO인 루스 채프먼 OBE, 스타일리스트 로타 볼코바 등 내로라 하는 패션계 인물 3천여 명이 서명했다. 패션의 순기능은 단순히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으며 위기의 순간에 빛을 발한다. 1960년대, 미국-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젊은이들이 입었던 히피 룩과 그들이 노래한 히피 정신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오늘날의 패션도 새로운 저항의 아이콘이 될 수 있다. 이미 2022 F/W 패션위크가 열린 거리 곳곳에서 그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지 않았는가. 부디 머지 않은 미래에 모두가 평등하게, 그리고 자유롭게 이 아름다움을 누릴 수 있길! 그리고 이 땅에 모든 갈등이 사라지고 진정한 평화가 도래하길 온 마음으로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