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뒤뜰에는 복원된 조선시대 종친부 건축물이 있다.
밀푀유처럼 켜켜이 쌓인 역사의 유산이 곳곳에 흩뿌려져 있는 서촌. 경복궁과 인왕산 사이에 아늑하게 자리 잡고 있는 그곳에는 지난 세기 작가들의 창조의 산실이 되었던 공간과 동시대 미술가들의 작품을 소개하는 갤러리가 공존한다. 조선 후기를 살았던 겸재 정선처럼 인왕산에 즐겨 다니며 청아한 그림을 그린 동양화가 박노수의 멋스러운 이층집, 박노수의 스승이었으며 한국적 산수화를 완성한 이상범이 살았던 아담하고 정겨운 단층 한옥이 각각 박노수미술관과 이상범가옥이라 불리며 일반에 공개되어 있다. ‘조선의 툴루즈 로트레크’ 구본웅이 남긴 초상화가 걸려 있는(실제 작품은 아니다) ‘모던 보이’ 이상의 집도 멀지 않다. 사직동에서 태어난 이상은 큰아버지 댁에 입양되어 스물네 살까지 이곳에서 지냈다. 절친한 사이였던 구본웅과 이상이 근대화되어가는 서울을 관찰하며 걸었을 거리를 지나 큰길 건너편에는 대림미술관, 팩토리2, 스페이스 윌링앤딜링, 리안갤러리가 골목마다 들어서 있다. 3D 애니메이션 소프트웨어를 활용해 빼어난 영상미와 깊은 통찰력을 보여주는 제니퍼 스타인캠프의 개인전 «Souls»가 리안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자연을 소재로 한 작가의 작품 속에서 찬란한 꽃과 과일은 우아하게 부유하며, 푸르른 바다 한가운데 신비로운 빛의 섬광이 번뜩인다. 팬데믹 상황에서 지친 날들을 보내고 있을 모두에게 달콤한 치유를 전해주는 어여쁜 작품이다. 이 전시는 삼청동에 있는 리만머핀에서 동시에 진행된다.
제니퍼 스타인캠프(Jennifer Steinkamp), 〈Still-Life 4〉, 2020, Video installation_Dimension Variable.
1936년 스물두 살의 서정주가 전설적인 문학동인지 〈시인부락〉 창간호를 만들었고 현재는 당시 여관의 골조를 그대로 살린 전시 공간을 비롯해 서점, 카페 등이 집합된 보안여관에서는 쉼 없이 흥미로운 문화 이벤트가 벌어진다. 9월 18일부터 일주일간 이어지는 공예주간을 기념해 ‘하얀 밤 까만 초대’라는 호기심을 자아내는 제목의 행사가 예정돼 있다. 매년 가을 ‘우리의 전통을 어떻게 현대의 삶에 스며들도록 할까’를 고민한 결과로서 탁월한 기획전시를 선보이는 아름지기도 같은 길에 있다. 지금은 말끔하게 단장했지만 오랜 세월 이 길을 지킨 ‘메밀꽃 필 무렵’에서 군더더기 없는 맛의 메밀칼국수로 배를 채우고 경복궁 담벼락을 따라 직진해 올라간다. 오른쪽 길로 접어들면 왼편으로는 상서로운 기운의 백악을 등진 청와대, 오른편으로는 궁궐의 돌담을 따라 호젓한 산책길이 펼쳐지는데 이 길이 서촌에서 삼청동으로 이어지는 쇼트컷이다.
삼청동은 한국 최고의 갤러리 워크인 만큼 놓칠 수 없는 전시공간이 즐비하다. 바라캇컨템포러리, 페로탕, 국제갤러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갤러리현대 등 원하는 동선으로 갤러리 호핑을 한 후 ‘월하보이’에서 주섬주섬 모아온 전시 안내문을 찬찬히 읽으며 사유의 시간을 가진다. 지난 세기부터 거기 있었을 것 같은 돌벽을 배경으로 바우하우스 100주년 리미티드 에디션 버전의 ‘바실리 체어’와 베르너 판톤의 ‘VP 글로브’ 조명이 놓여 있고, 디귿 자 바에는 청대 중국으로까지 올라가는 앤티크 찻잔들과 괴석 사이에 박서보 작가의 〈묘법〉이 걸려 있다. 그 가운데 쫄쫄 물소리가 울려 퍼지는 신묘한 보이차 집이다. 9월 말부터 관객을 인지적 모험으로 초대하는 구정아 작가의 개인전이 열릴 PKM갤러리 꼭대기 층에도 단정한 잔디밭 너머 남산타워가 내다보이는 가든 카페가 마련돼 있다. 청명한 하늘을 나만의 풍경으로 담으며 티 타임을 가질 수 있는 곳이라 즐겨 찾는다. 구정아 작가는 오랜만의 개인전에서 30여 점의 작품과 더불어 스케이트 파크를 정원에 설치할 예정이라고 하니 해가 지고 난 후의 풍경도 제법 근사하겠다. 지난해 말 밀라노 트리엔날레에서 선보였던 스케이트 파크 설치작품 〈OooOoO〉는 야광 페인트가 뿜어내는 초록 네온 컬러로 SNS를 달궜다.
저녁 시간이 되었다고 삼청동을 떠날 필요는 없다. 1980년대 후반부터 지금의 자리를 지켜온 국제갤러리, 약 2년간의 리모델링을 거쳐 재개관한 갤러리 2층에 ‘더 레스토랑’이 있다. 솔 르윗의 입방체 구조를 참조한 양혜규 작가의 블라인드 연작이 천장에 걸리고 벽면에는 런던 디자이너 그룹 OK-RM과 협업한 벽지 작업의 일부가 배치돼 풍경에 속하는 것만으로도 충족감이 차오르는 공간이다. 차가운 사과수프로 유명한 아베 고이치 셰프의 계절감 가득한 파인 다이닝을 즐길 수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뒤쪽 정원에는 조선시대 종친부 건축물이 있다. 종친부는 조선왕조 역대 제왕의 의복을 관리하고 관혼상제 등 사무를 맡아보던 관청으로 2013년 미술관을 건립하면서 원래의 자리에 복원됐다. 올봄 그 앞에 송웅식 셰프의 ‘스시 키즈나’가 문을 열었다. 고즈넉하게 멋스러운 스시 집에서 식사를 하고 나오면 미술관의 현대식 건물과 조선시대 전각이 나란히 있는 풍경이 당신을 배웅한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은 기획전시도 좋지만, 그저 산책이 하고 싶어 자주 간다. 미술관 계단을 오르다 뒤를 돌아보면 중화전, 함녕전의 의젓한 기와지붕 너머로 높다란 빌딩들이 시간의 겹을 드리우며 펼쳐지는 모습이 낭만적인 기분에 젖게 한다. 여기서 시청 쪽으로 더 들어가면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이 있다. 최근 조각가 권진규 기념사업회에서 작가의 작품과 기록물 7백여 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했다고 하니 멀지 않은 시기에 권진규의 작품을 한자리에서 실컷 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서울시립미술관의 매력적인 분관 두 곳이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건설된 대피용 방공호를 용도 변경한 여의도의 SeMA 벙커와 질병관리본부의 시약 창고를 리모델링한 은평구의 SeMA 창고다. 수십 대의 버스가 바삐 스치는 12차선 도로 아래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SeMA 벙커와 지붕 서까래의 목조 구조를 살려 빗살 무늬 채광이 어른거리는 SeMA 창고, 전혀 다른 분위기의 두 공간에서 열리는 실험적인 전시들은 먼 발걸음에도 만족스러운 관람을 보장한다.
P21에서 열리고 있는 최정화 개인전 ≪살어리 살어리랏다≫ 전시 전경.
을지로는 상업화랑, N/A, 가삼로지을, 빈칸, 리:플랫, 을지로OF, 중간지점, 쉬프트, 공간형 등 그 이름부터 기기묘묘한 전시 공간들의 인스타그램을 수시로 체크하며 시차와 거리가 존재하지 않는 동시대 미술을 만나러 간다. 2017년 문을 연 상업화랑에서는 9월 말까지 서울의 을지로, 청계천, 종로와 같은 지역의 특징과 역사적 의미에 천착하며 작업해온 박경근 작가의 아카이브 전시 «미디엄 레어»가 계속된다. 전시 제목처럼 현재 제작 중이거나 그간 작품 활동을 하면서 발생한 드로잉, 메모와 같은 ‘덜 익은’ 작품들을 공개한다. 을지로 전시 투어가 즐거운 이유는 을지면옥, 조선옥, 우래옥 등의 노포, 오트렉, XML 등 개성으로 무장한 파인 다이닝, 에이스포클럽, 평균율, 59계단 같은 ‘힙지로’ 감성의 바가 뒤섞여 있기 때문. 거대한 혼종의 공간에서 미로찾기 하듯 갤러리와 맛집을 골라 다니며 자신만의 좌표를 찍는 즐거움이 을지로를 즐겨 찾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한남동에서는 갤러리 페이스, 아마도 예술공간, P21, 휘슬을 놓치지 말 것. 경리단길 높은 곳에 자리한 P21에서는 현재 최정화 작가의 개인전 «살어리 살어리랏다»가 열리고 있다. 작가는 과거의 평화로운 삶을 그리워하는 모두에게 일상 소재로 만든 생활 기념비를 통해 희망을 선사하는 마음으로 이번 전시를 만들었다고 한다. 올라퍼 엘리아슨, 아니시 카푸어 등 세계적인 현대미술 작가의 전시를 개최했던 삼성미술관 리움은 아쉽게도 더 이상 기획 전시를 열지 않는다. 하지만 선별된 고미술과 현대미술 컬렉션으로 이루어진 리움미술관의 상설전시와 야외정원은 생각날 때마다 찾게 되는 서울 최고의 예술적 유산이다. 리움의 휴식이 길어지는 데 대한 아쉬움을 아모레퍼시픽미술관을 통해 보상받는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있다. 2018년에 개관해 라파엘 로자노-헤머, 바바라 크루거의 개인전을 비롯해 현대미술 소장품전을 열었던 아모레퍼시픽미술관에서는 첫 번째 고미술 소장품 기획전을 선보이고 있다. 고려시대 미술의 정수인 보물 1426호 〈수월관음도〉, 1907년 고종이 강제로 퇴위당하기 5년 전 덕수궁에서 열린 마지막 궁중 연향을 묘사한 〈고종임인진연도8폭병풍〉 등 회화작품을 비롯해 선사시대부터 근대까지, 도자·금속·목공예를 아우르는 다채로운 작품을 만날 수 있다. 미술관을 나오면 어느덧 하늘은 어둑해지고 아모레퍼시픽 신 본사 건물이 빛으로 그린 점묘화처럼 용산을 밝히고 있을 시각. 마시고 먹을 곳은 많다. 요즘 떠오르고 있는 삼각지 주변 맛집 가운데 낙하산 커피에서 라테를 마시며 전시 얘기를 나누고 길 건너 내추럴 와인 바 파브에서 저녁을 먹은 후 아쉬움이 남는다면 베트남 음식점 효뜨에서 닭목살튀김과 맥주로 마무리하는 동선을 추천한다.
프리랜서 에디터 안동선은 옥상에서 인왕산을 마주할 수 있는 곳에 살며 서촌과 북촌을 잇는 산책 루트 개발에 열성적이다. INFO 박노수미술관 | 서울시 종로구 옥인1길 34
이상범가옥 | 서울시 종로구 필운대로 31-7
이상의집 | 서울시 종로구 자하문로7길 18
리안갤러리 | 서울시 종로구 자하문로12길 9
전시: 제니퍼 스타인캠프 개인전 «Souls», 10월 31일까지 .
보안여관 | 서울시 종로구 효자로 33
전시: 김지평 개인전 «먼 곳에서 온 친구들», 9월 29일까지.
이벤트: ‘하얀 밤 까만 초대’ 9월 18일부터 9월 27일까지.
메밀꽃 필 무렵 | 서울시 종로구 효자로 31-1
PKM갤러리 | 서울시 종로구 삼청로7길 40
전시: 구정아 개인전 «2020», 9월 22일부터 11월 28일까지.
월하보이 | 서울시 종로구 북촌로5길 26
국제갤러리 | 서울시 종로구 삼청로 54
전시: «a’strict», 9월 27일까지.
스시 키즈나 | 서울시 종로구 율곡로1길 78 1층
SeMA 창고 | 서울시 은평구 통일로 684
상업화랑 | 서울시 중구 을지로 143
전시: 박경근 개인전 «미디엄 레어», 9월 27일까지.
P21 | 서울시 용산구 회나무로 74
전시: 최정화 개인전 «살어리 살어리랏다 SARORISARORIRATTA»,10월 10일까지.
아모레퍼시픽미술관 | 서울시 용산구 한강대로 100
전시: «APMA, CHAPTER TWO», 11월 8일까지.
낙하산 커피 | 서울시 용산구 한강대로46길 25
파브 | 서울시 용산구 한강대로 159-1
효뜨 | 서울시 용산구 한강대로40가길 6
서울시 영등포구 여의대로 지하 76, 여의도 버스환승센터 2번 승강장. 이곳에는 해리 포터도 모르는, 숨겨진 비밀 기지가 하나 있다. 메리츠증권, 신한금융 투자타워, NH투자증권, BNK 금융타워를 오가는 직장인들 사이를 뚫고 지하로 내려가면, 박정희의 방공호였던 공간을 개조해 2017년 개관한 SeMA(Seoul Museum of Art) 벙커가 나온다. 특이사항으로는 ‘화장실 없음’이 있다. 이곳은 5·16광장(지금의 여의도공원)이 있던 곳으로, 박정희가 국군의 날 사열식 때 오르던 단상 자리였다고 한다.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대피하려고 1976~77년 즈음 만든 공간으로 추정된다. 〈시사저널〉에 따르면 “차지철 작품”이라는 것. 2005년 여의도 버스환승센터를 짓다가 발견했다는 역사적 우연성, 무려 1백80평에 좌변기, 세면대, 소파, 열쇠 박스까지 그대로 보존돼 있던 구질구질한 치밀함에 소름이 돋는다. 현재 SeMA 벙커에서는 독립 큐레이터 전민경(더 그레잇 커미션)의 주도하에 젊은 작가들의 전시 «너머의 여정(The Journey of Eternity)»이 열리고 있다. 곽이브 작가가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경험한 뒤 상여를 멘 사람들과 죽음 이후의 세계를 설치작품으로 만든 〈꽃별천지〉가 공간에 기기묘묘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비밀 방공호까지 만들며 삶에 집착했지만 최측근 김재규에 의해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암살된 박정희는 꽃별천지, 즉 꽃나라, 별나라, 천국, 지옥 중 어디로 갔을까? 가긴 갔을까?
서울시립남서울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전혀 예술적인, 엉성한 미술관≫ 전시 전경.
어두컴컴한 SeMA 벙커에서 기어 나와 여의도시범아파트 쪽으로 슬슬 걸음을 옮겨본다. 외부 불법 주차 차량을 발견하면 빨간색 페인트로 칠해버리는 ‘무시무시한 단속’으로 유명한 시범아파트다. 여의도는 복잡한 현대사를 가지고 있다. 아무것도 없는 모래 벌판이었던 이곳에 1971년에 발표된 여의도 종합 개발계획안에 따라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1971년 준공된 여의도시범아파트가 그 시작이었다. 당시 서울에서 가장 높은 12층 아파트에 엘리베이터가 최초로 설치돼, 아파트는 중산층이 사는 고급스러운 집이라는 인식을 만드는 계기가 됐고, 서울 시민들의 기억 속에서 와우아파트 붕괴 사고조차 잊게 했다. 여의도에는 삼부아파트, 은하아파트, 삼익아파트 등 아파트 욕망의 역사가 덩달아 지어지기 시작했다. 지금은 물론, 재건축의 욕망으로 꿈틀거리는 중이다. 시범아파트 앞 63빌딩의 빛바랜 위용을 흘깃 바라보며 점심식사를 하러 여의도 미원빌딩 2층 구마산으로 향했다. 구마산은 2012년 〈매경 이코노미〉에서 CEO들의 숨겨진 맛집 중 한 곳으로 소개했던 곳이다. CEO가 못 될 바에 CEO의 단골 밥집이라도 가자는 우리의 허기진 욕망을 투명하게 드러낸 기사. 물론 즐겨찾기 링크를 해놓았다. 여긴 이명박에게 뇌물을 준 걸로 유명한 이팔성 전 우리금융지주 회장의 단골집이라고 했다. 1975년부터 문을 연 곳으로 맑고 깔끔한 경상도식 추어탕과 주방에서 구워 내오는 불갈비가 일품이다. 식사 후 포크 대용 이쑤시개와 함께 주는 과일까지 오래된 상가의 오래된 맛집답다. 장수 식품 미꾸라지의 효능이 메뉴판에 길게 쓰여 있는 것도 정겹다.
컬트 애니메이션 감독 퀘이 형제의 작업 모습. ⓒQuay Brothers Koninck Studios.
옛집이 많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사당(舍堂)’으로 간다. 대한제국 시절 구 벨기에 영사관 건축물이었던 서울시립남서울 미술관은 신고전주의 양식의 고풍스러운 외관만으로도 눈에 띈다. 원래 이 건축물은 1905년 회현동에 지어졌으나 도심 재개발 사업으로 1983년 이곳 남현동으로 밀려났다. 개발에 대한 집단 에너지가 얼마나 서울의 많은 것들을 뒤죽박죽 바꿔놓았는지. 미술관 곳곳에 놓인, 해체 및 복원 도중 생긴 터스칸식 기둥, 필라스터 장식으로 그 욕망의 찌꺼기를 짐작해볼 수 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시끄럽고 복잡한 사당역에서 이 미술관의 존재 자체가 침묵의 역할을 맡고 있다는 거다. 미술관 관람객도 비슷한 생각을 한 것 같다. 지금 열리는 전시 «전혀 예술적인, 엉성한 미술관»은 SeMA 멤버스 클럽으로부터 프로그램 기획안을 받아 기획한 전시로, “작은 가구들을 자신이 원하는 공간에 배치하여 휴식을 취한다” “넓은 복도가 상대적으로 효율적 활용이 안 되고 있는 듯한 아쉬움이 남았다” 등의 의견을 실제로 반영했다. 몇 가지 단서를 가지고 작가를 추리하게 한다거나 미술관에서 경비 및 청소를 담당하는 사람의 공간을 재구성하는 등 제목 ‘전혀 예술적인, 엉성한 미술관’에서 유추할 수 있다시피 미술관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 많다. 그렇다면 다음 선택지는 둘 중 하나다. 맛집을 상표에 당당하게 내건 맛집부추곱창, 혹은 아무런 간판이 없는 태양커피. 어둡고 기괴하고 음울하고 퇴폐적인 퀘이 형제의 작품이 있는 서초동으로 가야 하므로 곱창 냄새 대신 커피 냄새를 선택했다.
〈너머의 여정〉 전시 전경, 곽이브, 꽃별천지, 혼합매체, 440x263cm, 2020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퀘이 형제: 도미토리움으로의 초대展»은 제목 ‘초대’와 달리 이해하기 힘든 그들만의 세계에 불청객으로 침입하는 느낌을 준다. 허우적거릴수록 빠져나올 수 없는 공포 체험관에 들어온 기분이다. 컬트 애니메이션 감독인 그들의 작품이 워낙 생소한 데다가, 그들의 영화를 본다 해도 인물이 횡설수설하거나 말이 없어 무슨 내용인지 도통 알 수 없다. 산업사회에 숨겨진 부조리한 문제와 우울한 인간 심리를 비틀리고 그로테스크한 퍼펫 애니메이션에 담았다는 정도로 이해하고 넘어가자. 쌍둥이 형제 스티븐 퀘이와 티모시 퀘이가 일하는 방식도 어렵긴 마찬가지다. 하루에 18시간 일하고 꿈에서 또 2시간 일한다나 뭐라나. 작업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바스락거리는 질감과 소리가 거슬린다는 이유로 옷까지 벗고 작업하는 그들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구글에서 그들이 디자인한 필립 K. 딕의 〈스캐너 다클리〉 표지와 블러드 스웨트 앤 티어스(Blood, Sweat & Tears)의 동명 앨범 커버를 검색해 저장하는 것뿐. 이 정도면 힙스터로서 최선을 다했다고 본다.
1960년대에 디터 람스가 디자인한 브라운(Braun) 스튜디오 1000+L80 스피커
강남까지 왔는데 복합 쇼핑몰을 가지 않을 순 없다. 믿기 힘들겠지만, 양재동 하이브랜드 3층에는 인류 역사상 최고의 덕후 공간이라 해도 좋을 4560 디자인하우스가 있다. 웹 디자이너 박종만 대표가 지난 5년간 화장실 갈 때조차 손에서 휴대폰을 놓지 않으며 디깅하고 수집한 결과물로, 1950~80년대 산업디자인 미술관이나 다름없다. 엄청난 규모 때문에 들어서자마자 다리가 후들거리는 이 공간에서만큼은 디터 람스의 ‘Less and More’ 모토는 설 자리가 없는 것 같다. 차라리 ‘덕후가 세상을 구한다’가 더 어울린다. 다큐멘터리 〈디터 람스〉에 나오는 모습 그대로 디터 람스의 공간을 재현해놓은 건 물론이고, 브라운 사에서 디터 람스만큼 중요한 디자이너였던 한스 구겔로트와 빌헬름 바겐펠트, 헤르베르트 히르헤의 작품들을 모아놓았고, 그 밖에도 에토르 소사가 디자인한 올리베티 발렌타인 타자기, 마리오 벨리니가 디자인한 브리온 베가의 애스터 20 TV, 애플 매킨토시 등등 기능적이면서도 간결하고 아름다운 산업 디자인 제품을 가득 전시해놓아 CCTV만 없다면 면도기 하나라도 몰래 훔쳐 가고 싶을 정도다. 미술관이 별건가. 박정희, 이명박, 스티브 잡스와 디터 람스가 와도 입이 떡 벌어진다면, 그게 미술관이지.
다양한 욕망이 혼재된 남서울에서 미술관 같지 않은 미술관 기행을 했다. 프리랜스 에디터 나지언은 미술관을 해체 및 확장하는 공간에서 주로 어슬렁거린다. INFO SeMA 벙커 | 서울시 영등포구 여의대로 지하 76(여의도 버스환승센터 2번 승강장 지하)
구마산 | 서울시 영등포구 국제금융로 70 미원빌딩 2층
서울시립남서울미술관 | 서울시 관악구 남부순환로 2076
전시: «전혀 예술적인, 엉성한 미술관», 10월 25일까지.
태양 커피 | 서울시 서초구 방배천로 32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406
전시: «퀘이 형제: 도미토리움으로의 초대展», 10월 4일까지.
4560 디자인하우스 | 서울시 서초구 매헌로 16 하이브랜드 3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