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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하여, 제니 홀저

미국의 현대미술가 제니 홀저는 새로운 감수성의 예술로 당신에게 편지를 쓴다. 타인의 고통과 나의 고통의 경계가 사라지는 순간의 증거이자 기록으로서의 편지다.

BYBAZAAR2020.01.03
 
TV를 보다 보면 하물며 드라마, 영화, 예능에도 시청 적정 연령을 내걸면서, 어째서 뉴스에는 이토록 관대한가 싶을 정도로 당혹스러운 순간들을 종종 대면하게 된다. 살인, 치정, 성 문제, 폭행, 범죄 등에 대한 갖가지 소식들은, 딱히 구체적이라서가 아니라, 이슈 자체가 숫제 ‘19금’이다. 특히 괴로운 건 타인의 고통을 진열하는 방식이다. 객관성을 빙자한 잔인함이야 꾸준히 제기되어온 문제지만, 아이들을 키우는 입장에서 이는 삶의 방향과 일상의 결을 직조하는, 사소하지만 중요한 선택의 문제로 승화된다. 게다가 현대가 근대와 가장 차별화되는 점이 바로 고통에 대한 감수성의 변화 아닌가. 타인의 고통이 나의 고통보다 더 본질적이고, 자극적이며, 익숙해진 시대다. 타인의 고통을 곧 나의 고통으로 받아들이는 공감능력 한편에는 철저히 구경거리가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언젠가부터 나는 뉴스 앞에 앉아 세상이 왜 이 모양인가 한탄하는 대신 아이들에게 타인의 고통을 어떻게 대면하고 인식하여 공감하도록 하는 게 옳은가를 고민했다.
그러나 최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의 로비, 제니 홀저(Jenny Holzer)의 LED 작업 앞에서 내가 오만했음을 스스로 인정해야 했다. 그건 아이들의 문제이기 전, 나의 문제였다. 타인의 고통을 대면하는 일은 생각보다도 더 고통을 강하게 각성했다. 김혜순 시인의 시를 읽다가는 급기야 화장실로 뛰어들어갔다. 〈죽음의 자서전〉 속 ‘저녁메뉴’라는 시가 길이 6백40센티미터, 폭 12센티미터의 LED 기계 안에서 소리 없이 오열하고 있었다. ‘엄마의 쌀독엔 쌀이 없고/ 엄마의 지갑엔 돈이 없고/ 엄마의 부엌엔 불이 없고// 오늘 엄마의 요리는 머리지짐/ 어제 엄마의 요리는 허벅지찜/ 내일 엄마의 요리는 손가락탕수/ 부엌에선 도마에 부딪치는 칼/ 부엌에선 국물이 우려지는 뼈/ 부엌에선 기름에 튀겨지는 허벅지 (중략) 네 엄마의 부엌엔/ 배고픈 너의 폭 꺼진 배 (중략) 너는 오늘 밤 그 프라이팬에 엄마의 두 손을 튀길 거네.’ 조재룡 평론가가 쓴 바, “나는, 너는, 우리는, 그렇게 엄마를 잘라먹고 지금까지도 잘도 살아”왔음을 인지했을 땐, 명치 끝에 숨겨둔 죄책감이 나의 오장육부를 마구 찔러댔다.
지난 1982년 제니 홀저가 세상에서 가장 값비싼 광고 자리인 뉴욕 타임스퀘어 거대 전광판에 ‘내가 원하는 것으로부터 나를 지켜줘(PROTECT ME FROM WHAT I WANT)’ 같은 문장을 처음 띄웠을 때, 당시의 충격은 이보다 더 강력했을지도 모른다. 미국 현대미술가 제니 홀저는 사회와 개인, 거대담론과 일상을 관통하는 텍스트를 활용한 예술을 이른바 ‘시대의 명상록’으로 제시해왔다. 그녀의 텍스트에는 오롯이 인류가 창조한 뿌리 깊은 인간세상의 비극이 도사린다. 전쟁, 권력, 학대, 섹스, 테러, 살인, 사회적(인종, 계급, 성) 불평등, 공포, 탐욕, 자본주의, 인간본성에 이르기까지, 동서고금 시대가 가장 숨기고 싶어하거나 불편하게 여기는 치부를 어김없이 향한다. 최근 기밀 해제된 정부 문서, 부검 보고서, FBI 이메일은 물론 참전 용사들, 총기사건의 피해자, 비영리 단체의 생생한 목소리를 수집하는 것도 같은 맥락일 텐데, 언젠가 키키 스미스가 〈인터뷰〉지에서 정확히 언급한 대로다. “제니 홀저는 이라크와 아프카니스탄 전쟁 정보와 텍스트를 이용해 작품을 만드는 유일한 예술가다.”
이름없이 죽어간 무명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는 건 “나의 고통을 연필 삼아, 타인의 고통에 대한 글을 쓴다”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이 말의 출처인 시인 안나 스위르는 제2차 세계대전 때 활동한 간호사이자 레지스탕트였다. 2000년대 이후 안나 스위르, 헨리 콜, 비스와바 심보르스카 등 작가들의 글을 작업에 적극 차용해온 홀저는 이번 전시를 통해 몇 명의 새로운 작가들을 이 특별한 세계에 초대했다. 개인적 죽음과 사회적 참상을 관통하는 죽음의 시 49편을 모은 김혜순 시인의 〈죽음의 자서전〉, 2015년 노벨문학상 수상작이자 세계대전 등에 참전한 여성들의 처절한 목소리를 담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삶과 고독, 죽음의 경계를 담담하게 투영하는 소설가 한강의 첫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위안부의 이야기를 서술한 시로 미국 사회 내에서 반향을 일으킨 젊은 시인 에밀리 정민 윤의 〈우리 종에 대한 잔혹함〉, 그리고 여성인권과 난민보호에 앞장서는 학자 겸 활동가 호진 아지즈의 글이, 미술의 언어로 변모해 ‘지금, 이곳’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다.
이들 여성들의 삶은 어림잡아 1백 년 세월에 걸쳐져 있지만, 지금 내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텍스트는 내 삶과 등을 맞대고 있다. 홀저의 작업은 이 불편한 진실을 공공장소에서 공유함으로써, ‘누군가의 고통’ 이상임을 인지하게 한다. 국경과 시대, 나와 타인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엄마의 삶은 엄마에 국한된 적 없었고, 여자의 삶은 여자에 머문 적 없었으니까. 여자이기에, 엄마이기에, 약자이기에 감내해야 했던 고통이 2019년에도 다른 형태로 반복되고 있음을 매일 느끼며 살고 있다. 이런 일종의 통각은 “새로운 감수성은 예술을 삶의 연장으로 이해한다”는 수전 손택의 말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예술작품 고유의 특징은 개념적 지식을 창출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작품 자체에 완전히 사로잡히거나 매혹된 상태에서 우리가 어떤 흥분, 참여, 판단에 연루될 수 있도록 만드는 데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당신을 위하여〉, 2019,로봇 LED 사인, 640.1x12.7x12.7cm.텍스트: 김혜순, 한강, 에밀리 정민 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호진 아지즈의 글 발췌.국립현대미술관과 국립현대미술관후원회의 커미션으로 제작.ⓒ 2019 Jenny Holzer, member Artists Rights Society (ARS), NY/ Society of artist copyright of Korea(SACK), Seoul.Text: 김혜순, 〈죽음의 자서전〉(문학실험실, 2016) 중 ‘질식’ ⓒ 2016 by Munhaksilhumsil. Used with permission of the author.

〈당신을 위하여〉, 2019,로봇 LED 사인, 640.1x12.7x12.7cm.텍스트: 김혜순, 한강, 에밀리 정민 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호진 아지즈의 글 발췌.국립현대미술관과 국립현대미술관후원회의 커미션으로 제작.ⓒ 2019 Jenny Holzer, member Artists Rights Society (ARS), NY/ Society of artist copyright of Korea(SACK), Seoul.Text: 김혜순, 〈죽음의 자서전〉(문학실험실, 2016) 중 ‘질식’ ⓒ 2016 by Munhaksilhumsil. Used with permission of the author.

제니 홀저는 전시 오프닝은 불편해 여길지언정, 대중과의 만남에서만큼은 거리낌이 없었다. “모든 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을 전달하고 싶었기 때문에 언어를 선택했다”고 말하는 그녀는 ‘네 총알이 내 몸을 찢을지라도, 나의 적이여, 날 죽일 수는 없을 것이다(ALTHOUGH YOUR BULLET WILL TEAR APART MY BODY, YOU ENEMY, WILL NOT KILL ME)’라는 문장을 버질 아블로의 런웨이 무대에 투사한 보기 드문 미술가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만약 누군가가 그녀의 작업을 묻는다면, 나는 타인의 고통과 나의 고통의 경계가 사라지는 모든 순간의 증거이자 기록이라 답할 것이다.
특히 제니 홀저의 LED 작업은 ‘영원한 순간성’ 혹은 ‘순간적 영원성’에 대한 반어적인 시다. 1980년대부터 LED를 활용한 것도, 이 반짝이는 첨단 매체가 자본주의의 영속을 예고하거나 상징했기 때문이다. 세월과 함께 진화한 LED는 급기야 움직인다. 오르락내리락하는 기계에 실려, 문장들은 허공으로 부서지고, 비처럼 쏟아지며, 허무하게 사라진다. 눈물 때문인가 싶게 글자가 흐려지기도, 언제 그랬냐는 듯 선명해지기도 한다. 어쨌든 모든 요동과 파열을 감수하여 문장을 읽어내려면 반드시 깨어 있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There was a man. A Japanese soldier. One that did not believe in old superstitions. One that did not believe in sex before battle as charm against harm.(중략)’ 같은 문장(에밀리 정민 윤의 〈An Ordinary Misfortune〉 중)이 붉은 섬광의 이미지로 뇌리에, 심장에 각인된다. 이 순간의 감각적 경험이야말로 예컨대 자신이 베니스 비엔날레 미국관의 첫 여성 미술가이자 황금사자상 수상자였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함을 잘 알고 있는 예술가의 선물이다.
LED 특유의 운동성은 40여 년 전에 시작된 텍스트 아트가 지속되고 있음을, 세상이 변한 듯 변하지 않았거나, 그렇다 해도 여전히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존재함을 은유하며 맞은편 포스터의 형식 및 내용과 대구를 이룬다. ‘앙팡테리블 제니 홀저’를 알린 작업 〈경구들〉(1977~1979)과 〈선동적 에세이〉(1979~1982)가 처음 한글로 번역되어 부활한 풍경이다. 젊은 홀저를 독려한 다양한 경구, 격언, 선언문 등 정제된 단호한 문장으로 구성된 이 두 작업은 당시 맨해튼 도심을 점령했다. 그녀는 게릴라처럼 밤마다 거리를 활보하며 포스터를 붙였고, 다음날 뉴요커들은 출근길에 의외의 진실을 마주했다. ‘따분함은 미친 짓을 하게 만든다, 유명한 사람보다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이 낫다, 자신의 몸이 하는 말을 들어라, 여자아이와 남자아이를 똑같이 양육하라, 자기 혼란은 정직함을 유지하는 한 가지 방법이다, 어머니는 너무 많이 희생해서는 안 된다, 어차피 아무것도 바꿀 수 없으니 즐겨라, 휴머니즘은 한물갔다…’ 이 문장들이 수십 년 후의 나를 환기시킨다는 건 반가운 한편 절망적이다. 이에 반응한다는 건 여전히 세상을 이해하기란 어렵다는 사실의 방증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늘 나의 고통은 잊거나, 무시하거나, 맹신한 그 지점에서 꿈틀거렸다. 이렇게 역설적으로, 이 오래된 작업은 동시대성을 획득하고, 동시대인들을 위무한다.
그리하여 LED 작업의 제목이자 이번 전시 전체를 아우르는 제목 《당신을 위하여(FOR YOU)》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밸런타인 선물 포장지, 90년대 유행가 제목, 초콜릿 광고 카피 따위를 연상시키는 이 전형적인 제목은 이번 작업의 시작과 끝을 시사한다. 제니 홀저의 작업이 진정한 ‘승화’일 수 있는 건 거기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행진하는 여자들과 그 가족들로부터 예술적 동기”를 얻는다는 그녀는 평생 한 발씩 나아간 여성들의 역사와 이야기를 통해 ‘당신’을 ‘우리’의 존재로 묶어낸다. 나의 안녕에 손톱만큼도 도움될 게 없다고 늘 의심받는 현대미술을 백지 상태로 둔 채, 예의 다정한 말투와 엄중한 문체로, 제니 홀저가 쓴 편지. 인간다운 삶을 꿈꾸며 저마다의 행진을 지속하고 있는 그녀의 ‘당신’에게 건네는 엄연한 진실, 고통을 직면하는 가장 시적인 용기다. 마침 새로운 한 해를 앞둔 지금, 연하장의 문구로도, 앞으로 연재할 이 에세이의 첫 문장으로도 더할 나위 없어 보인다. 당신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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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글/ 윤혜정(국제갤러리 디렉터)
  • 에디터/ 손안나
  •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 웹디자이너/ 김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