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의 얼굴, 신디 셔먼에 대하여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신디 셔먼의 회고전이 영국국립초상화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천의 얼굴을 가진 아티스트가 연출하는 장난기 많고 도발적인 캐릭터들 그리고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작품을 만드는 신디 셔먼에 대해. | 신디셔먼,코스튬,작가,메이크업,사진

 ━  BEYOND THE FRAME   ‘Untitled #204’, 1989. 뉴욕 소호에 위치한 신디 셔먼의 아파트 문 앞에 선 순간 과연 그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궁금한 마음이 들었다. 어리고 순진한 처녀에서 관록 있는 여성, 일하는 소녀, 지친 가정주부, 르네상스시대 귀족부인, 21세기의 스타까지, 사진가 신디 셔먼은 40년 넘게 커리어를 쌓아가며 여성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역할의 캐릭터를 맡았다. 그래서일까? 막상 집 안에서 문을 열어준 그가 현실에 없을 법한 과장되거나 현란한 옷을 입은 캐릭터가 아닌, 맨 얼굴과 조용한 말투로 맞았을 때 약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올해로 65세를 맞이한 셔먼은 지난 6월 말부터 새로운 회고전을 열고 있다. 그는 “어떤 사진에도 나는 없어요.”라고 말하며 전시된 작품이 자화상이 아니라 연출적인 성격을 띤다는 사실을 명백히 했다. 스튜디오에 있는 책꽂이와 방 한 구석에는 가면과 가발을 비롯한 소품들이 쌓여 있었다. “이 중엔 이전에 맡았던 역을 연기할 때 썼던 물건들도 있고, 20년 동안 가지고 있는 물건들도 있어요.” 부두 조각상, 제임스 본드 피겨, 상반신 조각들(“한때 이런 걸 모으곤 했죠.”)과 최근 파리의 벼룩시장에서 사들인 왕관까지 다양했다. “이것들을 가지고 뭘 할지는 아직 모르겠어요. 다음에는 여왕 시리즈를 연출할 수도 있고….” 롱아일랜드의 집에서 인형놀이를 하던 어린 시절부터 옷과 오브제들은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1950년대와 60년대 여성들이 입었던 거들, 스타킹, 괴상한 브래지어와 이상한 장신구들을 언급하며 회상한다. “메이크업 혹은 코스튬을 통해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은 정말 재미있었어요. 하지만 어렸을 때 그런 분장은 쿨함과는 거리가 있었어요. 페미니스트들은 자연스러운 모습이어야 했죠. 메이크업과 염색은 물론 브래지어조차 하지 않았지만 옷을 입고 꾸미는 것은 포기할 수 없는 비밀스러운 즐거움이었어요.” 패션에 대한 관심은 커리어를 이어가는 동안 지속되었지만, 취향은 자아와 의식이 자람과 동시에 변하기 시작했다. “지금보다 어렸을 땐 튀고 싶지 않아 수수하게 입곤 했어요. 친구들이 힘들어할 때 혼자 성공했다는 사실에 대한 일종의 죄책감도 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이제 그 시절은 지났고 개성 있는 옷들이 좋아졌어요. 가끔 무언가를 샀을 때 이걸 입을 일은 없겠다는 생각이 들곤 하지만, 캐릭터를 연출할 때 입을 수 있는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으니까요.” 메이크업과 코스튬을 벗은 신디 셔먼의 초상. 코스튬과 메이크업은 셔먼을 유명하게 만든 시네마틱한 사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역설적이게도 신입생 시절 사진 수업에서 낙제를 했던 버팔로 주립대학에서 시각미술 학위를 딴 후 1977년 뉴욕으로 이주하여 누벨바그와 알프레드 히치콕의 작품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Untitled Film Still’ 시리즈를 70장 발표했다. 가상영화의 장면을 연출한 그의 사진들은 창밖을 바라보거나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거나 길 끝에 서서 히치하이킹을 하는 여성의 모습을 반영했다. 영화를 참고해서 찍은 그 사진들은 거친 질감으로 표현되었으며 셔먼이 가진 서술적인 잠재력을 한껏 드러냈다. 가상 시나리오 속 배우처럼 보이기 위해 그는 기괴하고 그로테스크한 캐릭터를 연출하기도 했다. “처음엔 사람들이 저를 자기중심적이고 자기집착적인 사람으로 볼까 두렵기도 했어요. 그래서 그런 캐릭터를 연출할 때는 내 자신보다 연기하는 캐릭터에 관심이 갈 수 있도록 노력했어요.” 1981년에 선보인 센터폴드 프로젝트는 남성지를 통해 전해져 내려오는 포르노그래픽한 전통, 즉 아무것도 모르는 취약한 상태에 놓인 여성을 관음하는 듯한 시선을 전복시키려는 모습을 보인다. 몇 년 후 ‘Disasters’와 ‘Fairy Tales’ 시리즈(1985~1989)에서는 토사물, 피와 배설물 등 체액과 분비물, 마네킹을 사용하여 신체의 유약함을 그리기도 했다. 1 ‘Untitled Film Still #15’, 1978. 2 ‘Untitled Film Still #48’, 1979. 3 ‘Untitled Film Still #54’, 1980. 4 ‘Untitled Film Still #21’, 1978. 5 ‘Untitled Film Still #17’, 1978. 6 ‘Untitled Film Still #56’, 1980. 셔먼스러움. 가장 기괴한 작품마저도 그의 사진은 유머러스한 요소를 갖추고 있다. “어떻게 보면 호러영화와 비슷해요. 엄청 무섭지만 나에겐 흥미로운 방향의 무서움이죠. 그러면서도 내 작품은 항상 어딘가 웃기게 보였으면 좋겠어요.” 메소드를 연기하는 배우들과는 달리 그는 자신과 연기하는 캐릭터 사이의 간극을 잘 인지하고 있다. “몇 초 사이에 여러 감정 사이를 오갈 수 있다는 것에서 사진의 가치를 찾을 수 있어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계속 고민하죠.” 그렇다고 해서 그가 자기 자신과 연기하는 캐릭터를 완전히 분리시킨다는 것은 아니다. “모든 캐릭터에 애착을 갖고 있어요, 이상한 역할일수록 더 정이 가요.” 셔먼이 연기하는 대부분의 역할들이 그의 상상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가끔 1989년 찍은 앵그르의 ‘모아테시에 부인의 초상’ 패러디처럼 특정한 여성을 모델로 삼아 ‘History Portraits’ 시리즈를 만들기도 한다. 여기서 그는 뛰어난 보철술로 초상화에 내재된 환상(대부분의 경우 모델들의 허영심이다)에 주의를 끌며 프랑스 신고전주의 시각 기법을 사용한다. 이는 최근작에 많이 활용하는 기법이기도 하다. 2016년엔 미국판 <하퍼스 바자>와 협업하여 머리부터 발끝까지 디자이너 의상을 입고는 패션쇼 주변을 활보하는 소위 ‘스트리트 스타일 스타’라 불리는 이들을 풍자하는 이미지를 발표하기도 했다. “단순히 사진 찍히려고 리무진에서 미리 내려 두 블록 정도 걸어가는 사람도 있어요.” 1 ‘Untitled #92’, 1981. 2 ‘Untitled #413’, 2003. 3 ‘Untitled #122’, 1983. 4 셔먼이 패러디한 앵그르의 ‘모아테시에 부인의 초상’. 5 ‘Untitled #577’, 2016-2018. 관심을 갈구하는 사람들보다 그들을 점잖게 조롱하는 신디 셔먼에게 오히려 관심이 높은 오늘날 패션계에 대해 본인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다. “실감이 잘 안 나요. 가끔은 재미있지만 수많은 유명인사와 파파라치의 수를 생각해보면 잔혹해 보이기도 하고요.” 그는 최근 마크 제이콥스의 결혼식에 참석했지만 수많은 인파 사이에 파묻힌 그를 거의 보지 못했다고 한다. “벽에 붙은 파리가 된 기분이었어요. 나중에는 그 모습을 찍고 싶어졌다니까요. 하지만 내 휴대폰을 카메라로 쓸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 없어요.” 디지털 원주민으로서 사진을 포착하는 본능은 없을지 몰라도 셔먼은 이미 소셜미디어를 마스터했다. 항상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 그는 배경을 바꾸거나 손쉽게 사진에 미묘한 변화를 주기 위해 1990년대 후반 필름카메라에서 디지털카메라로 변화를 꾀했다. 인스타그램의 세계에 발을 내딛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2017년부터 페이스튠과 같은 앱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형시킨 기괴하고 창의적인 인스타 초상화로 팔로어들(현재 27만 명에서 계속 늘고 있는)에게 기쁨을 선사한 것이다. 한 사진에서는 코에 인공호흡기를 댄 채 병원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가 다른 사진에서는 입술, 눈, 눈썹을 귀신처럼 새까맣게 칠해놓는 식이다. 비록 셔먼은 그런 이미지를 ‘작은 재미’ 정도로 표현하지만, 그의 작품 활동 속 맥락을 살펴본다면 해당 이미지들이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현대사회에서 자신을 포장하여 표현하고자 하는 강박관념과 이에 수반되는 거짓말을 말이다. 셔먼은 오늘날 셀프카메라가 유행하는 현상이 마냥 반갑지는 않다. “휴대폰 카메라가 얼굴을 잘 담아낸다고 생각하지 않아요.”라며 청소년기 아이들에게 보정 필터가 미칠 영향에 대해 걱정한다. “포스팅하는 셀카에 가깝게 보이기 위해 성형수술을 하는 아이들에 대해 읽은 적이 있어요. 약간 무섭기도 하죠.” 1 ‘Untitled #74’, 1980. 2 ‘Untitled #602’, 2019. 3 ‘Untitled #466’, 2008. 셔먼의 사진에서는 사회에 대한 비판을 암시하는 부분을 꽤 찾아낼 수 있다. “눈 먼 장님처럼 일하는 게 아니잖아요. 제가 표현하여 보여주고자 하는 것들을 항상 의식하고 있어요. 하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내 자신보다는 작품들이 대신 표현해줬으면 좋겠어요. 나서서 연설을 한다거나 인스타그램에 글을 쓰는 건 적성에 맞지 않거든요.” 말하기보다는 보여주기에 초점을 맞춘 신디 셔먼 방식의 페미니즘 또한 이와 비슷하다. 누군가에게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기보다는 미묘하고 은밀한 방식으로 돌려서 표현하는 것을 선호한다. 대부분의 여성 아티스트처럼 셔먼은 남성 동료보다 적은 임금을 받아본 경험이 있지만(“매우 존경받는 아티스트가 되었음에도 남성 작가 작품이 더 높은 값을 받더라고요.”) 이 싸움에서 지지 않을 것을 선언한다. 디자이너 스텔라 매카트니와 최근 한 협업에서는 의도적으로 남성복과 여성복 컬렉션을 섞어 성별 사이의 경계를 흐리게 만들었다. 매카트니는 “신디 셔먼과의 작업은 놀라워요. 신선하고 현대적이며 본인에게도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했죠.”라고 전했다. 셔먼이 나아갈 방향은 무궁무진하다. 최근에는 인스타그램 사진을 태피스트리로 변환하는 작업(“실을 짜는 것은 픽셀 단위로 사물을 나누는 것과 같다고 생각해요.”)을 하고 있으며 영화 제작도 검토 중이다. 1997년 자신이 감독한 코미디 호러영화 <오피스 킬러> 이후로는 아무 영화도 만들지 않은 상태다. “어느 순간 똑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질리게 돼요. 하지만 계속해서 흥미를 느낄 수 있는 무언가를 찾을 거예요.” 그가 밝히지 않은 것 이상이 있겠지만, 그것도 아마 갑작스럽게 나타나지 않지 않을까. 결국 우리를 계속해서 추측하게 만드는 것이 신디 셔먼이 가장 잘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떠올려본다.   ※ 신디 셔먼의 회고전은 영국국립초상화미술관에서 6월 27일부터 9월 15일까지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