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혜규의 주관적 진실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시간의 축약과 공간의 접합을 통해 양혜규는 우리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세계를 창조했다. 4년 만에 서울에서 마련된 이 공간의 무질서의 밀도는 위계도, 우열도 모두 수렴하는 양혜규의 ‘주관적 진실’을 통해 비로소 상상과 연대의 절정에 이른다. | 이유,공간,미래 시간,양혜규,전시

양혜규와의 인터뷰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추상적인 지점까지 가 닿기 위한 전력질주나 다름없다. 번번이 질문으로 빼곡한 노트를 덮어버리곤 그녀의 방대한 이야기를 경청하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추상이 결국 세상을 해석할 뿐 아니라 살아낼 수 있는 고유한 논리를 창조하는 일이라면, 재현 혹은 설명 대신 추상을 예술언어로 삼은 그녀가 웅숭깊은 문화인류적 세계관, 여과 없이 방출되는 통찰의 단서로 그려낸 ‘주관적인 은유의 지도’를 온전히 나의 두 발로 뚜벅뚜벅 걸어야 함을 뼈저리게 실감한다. 양혜규의 세계에 내 몸을 위치시킬 때 유독 ‘느껴지는 진실’이란 게 있다. 양혜규는 특유의 축약과 상징, 그리고 비약으로 점철된 이 ‘주관적 진실’이야말로 확고부동한 ‘객관적 진실’에 맞서는 유일한 방법임을 말해온 예술가다. 코트는 Saint Laurent by Anthony Vaccarello. 오는 9월 3일부터 11월 17일까지 국제갤러리에서 열리는 <서기 2000년이 오면>은 양혜규가 4년 만에 한국에서 선보이는 전시다. 사동 30번지 전시(2006)가 양혜규라는 별난 존재를 각인했고, 아트선재센터 전시(2010)가 뒤라스라는 대상을 향한 생을 관통하는 애정을 선포했으며, 삼성미술관 리움 전시(2015)가 미래에 초점을 맞춘 세미 회고전 역할을 했다면, 이번 개인전은 양혜규의 ‘주관적 진실’의 세계로 진입할 수 있는 관문이다. 그녀를 설명해온, 예컨대 “역사, 문화, 산업에 대한 사유를 통해 이를 현대로 소환하고 이어내는 조형언어를 구축해왔다”라든가, “예술적 경계와 국적을 넘어 다양한 소재를 독창적 방식으로 다루어왔다” 등의 문장은 ‘서기 2000년’이라는 표제어 아래 전시장의 토양 혹은 공기로 토착화됐다. 대신 현재분사형으로 진행 중인 다채로운 작업들과 수평, 수직으로 직조된 개념들이 난데없이 뒤섞여 고대와 미래, 시간과 공간, 질서와 무질서가 혼재된 밀도 높은 공간, 하이브리드적 요소들이 가득 찬 ‘폭발 직전의 우주’가 탄생했다. 이 아리송한 전시를 위해 양혜규는 가수 민해경의 노래 ‘서기 2000년’(1982)에서 차용한 제목과 1977년 만 6살이었던 작가가 두 쌍둥이 동생과 함께 그린 일종의 ‘컬렉티브’인 ‘보물선’ 그림을 화두로 제시했다. 도깨비, 시조새 등으로 가득한 그림에는 당시 작가의 시간, 48세 작가의 시간, ‘보물선’이 그려진 초대장을 받아들 관객의 시간까지 뒤섞여 있다. 전시장 입구부터 울려 퍼지는 노래 ‘서기 2000년’에는 1982년(과거이자 대과거)에 상상하는 2000년(미래이자 과거)과 2019년(현재)에 돌아보는 2000년(과거), 같지만 다른 시간대가 존재한다. “작가들이 뭘 알고 하는 게 아니에요. 꽂혀서 유튜브도 찾아보고, 가사도 읽어보면서 기억도 더듬고, 곱씹어보죠. ‘서기 2000년’도, ‘보물선’도 처음엔 개인사를 돌아보는 듯한 느낌이 강했어요. 하다 보니 거기엔 시간도 있고, 시제도 있고, 생명체(creature)라는 개념도 있더라는 거죠. 그렇게 의식하지 않았던 것들을 찾아내요.” 양혜규는 ’페이스 페인팅을 하면 용기가 생긴다“고 말한 바 있다. 페이스 페인팅은 일종의 가면이자 또 다른 정체성을 표현할 수 있는 작업인 동시에 전시장의 동적 요소에 에너지를 불어넣는 행위다. 작가는 이번 전시의 기자간담회와 오프닝 등 공식적인 자리에 페이스 페인팅을 한 채 나타났다. 셔츠는 Saint Laurent by Anthony Vaccarello. 모르긴 해도 “엄마, 아빠, 우리 집, 꽃 대신 뿔 달린 도깨비를 잔뜩 그린” 어린 삼형제보다도 당시 ‘서기 2000년’을 부른 어른들이 순진하기로 치자면 더했던 것 같다. 2000년을 ‘모든 꿈이 이뤄지는 해’로 상정한 이 노래는 엄청나게 대책 없는 기대와 믿을 수 없게 막연한 희망을 전파한다. “서기 2000년이 오면 우주로 향하는 시대/ 우리는 로켓트 타고 멀리 저 별 사이로 날으리/ 그때는 전쟁도 없고 끝없이 즐거운 세상/ 사바(사바) 사바(사바) 사바 그날이 오면은/ 사바(사바) 사바(사바) 사바 우리는 행복해요.(중략)” 흥미롭게도 나는 복제인간이 인간 도덕의 문제에 회의론을 제기하는 리들리 스콧 감독의 SF영화 <블레이드 러너>가 공교롭게도 이 노래와 같은 해에 제작 혹은 발표되었다는 사실과 함께 영화 배경이 바로 2019년임을 떠올렸다. 그러나 대중문화가 선형적인 시간을 사는 인간이 알 도리 없는 미래를 유토피아 혹은 디스토피아의 이분법으로 분류한 반면, 미술작품은 갖가지 시점의 시간이 다양한 레이어로 접혀 들어간 바로 그 지점에서 입체적인 시간을 상상한다는 점을 상기하면, 시간만큼 절대적인 동시에 주관적인 개념도 없다. “‘서기 2000년’을 들어보면 미래를 대하는 말도 안 되는 순진함이 후렴구 ‘사바사바’로 모두 축약돼요. 당시 사회가 희망적이지도 않았으니, 사바사바 노래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할 수 없었던 거예요. 그러니 그 순진무구함도 굉장히 리얼한 그림이죠. 동시에 물리적으로는 이 노래에서 그렇게 접혀들어간 시간들을 웜홀 혹은 블랙홀 같은 문제로 풀 수 있어요. 이렇게 과학적인 웜홀과 대책 없는 ‘사바사바’ 사이의 어마어마한 간극 역시 축약으로 공존해요. 결국 황당한 것과 리얼한 것, 멀다고 생각한 개념들이 이렇게 가까이 있을 수 있다는 거죠. 평소 내가 생각하는 ‘이동’에도 상관이 없는 것 같은 무언가를 붙여놓는 상상력이 상정되어 있거든요. 이를테면 한국의 작곡가 윤이상과 프랑스 작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대기를 합치는 작업처럼 말이죠.” ‘소리 나는 운동 다박머리 우주적 압축’(2019) 작품 앞, 양혜규 손등에 그려진 ‘머리 둘 달린 독수리(Two Headed Eagle)’는 고대 부족들의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모티프다. 이번 전시에서는 윤이상과 뒤라스의 연대기를 교차편집한 텍스트 ‘융합과 분산의 연대기 ― 뒤라스와 윤’(2018)을 책자로 제공하는데, 작가 말대로 ‘객관적 진실’인 역사적으로는 필요 없는 작업이다. 성별도, 분야도 다른 데다 생전 만난 적도 없는 두 삶을 놓고 보면 그러나, 비슷한 구조의 그래프가 그려진다. “예술적, 창의적 삶이 역사적 삶과 만났을 때 일어나는 엮임 현상이랄까요”. 전시 기간에 선보일 윤이상의 ‘영상(Images)’ 공연 역시 전시와 어떤 관계인지 모호할 수 있다. 하지만 ‘이마주’라는 제목으로 잘 알려진 이 곡이 한국의 ‘고대’격인 고구려 강서대묘의 고군벽화 사신도에 영감받았고, 냉전시대의 이분법 따위에는 관심 없었던 그가 1960년대 간첩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에 작곡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좀 달라질 것이다. “윤이상이라는 사람 안에서도 다양한 시간대가 순환하고 충돌해요. 물리적으로 1차원적 시간을 사는 우리가 윤이상이라는 사람을 통해서 고대의 상상력을 빌려올 수 있는 거죠. 그렇게 현재 시간대와 맞설 수 있는 거구요.” ‘솔 르윗 동차動車 ― 입방체 하나 빠진 입방체 위에 6 단위 입방체’, 2018 알루미늄 블라인드, 분체도장 알루미늄 프레임, 분체도장 손잡이, 바퀴, 362x225x225cm. 이질적 요소들로 적대적이지 않은 환경을 창조하는 건 양혜규의 전매특허다. 자신을 부정하지 않은 채 서로를 있는 그대로, 불투명하게 남겨둔 상태에서만 가능한 공존법이다. 특히 패치워크로 구성된 이번 전시는 작가의 이런 태도가 주제로 승화된 경우다. ‘소리 나는 운동’(2019) 조각에 달린 방울은 고대 주술 의식을 연상시키고, 연무는 설화적 분위기를 고조한다. 미니멀리스트 솔 르윗에 영감받은 ‘솔 르윗 뒤집기’(2015-) 연작에서 출발, 움직이도록 진화한 블라인드 ‘솔 르윗 동차動車’(2018-)는 강한 미술사적 태생을 뽐내는 대신 바닥의 격자무늬에서 유기적으로 자라난 탑 혹은 생명체처럼 자리한다. 올해 초 작가가 “어떻게든 함께 살아보겠다” 밝힌 짐볼은 풍파에 깎인 돌 혹은 행성처럼 뒹굴며 관객들의 움직임(참여)을 유도한다. 벽지작업 ‘배양과 소진’(2018)은 제각각 출몰한 작업들을 포용하는 환경이자 그래픽 디자이너 마누엘 래더와의 협업으로 탄생한 ‘평평한 조각품’. 유럽의 고대라 불리는 프랑스 옥시타니아 지방에는 비주류적 토착 의례와 근현대 이후 발전한 하이테크 산업문화가 공존한다. 이를 반영한 듯 고추, 마늘, 무지개, 번개, 의료 수술 로봇, 방울 등 관련 없는 사물들이 마구잡이로 병치된 풍경은 과거/현재, 기술/문화, 자연/문명의 경계를 무화하고, ‘거기(옥시타니아)’와 ‘여기(서울)’, 그리고 ‘어딘가’의 간극을 축약하며 부유한다. 벽지작업 ‘배양과 소진’(2018) 앞에 놓인 ‘소리 나는 운동 지도’(2019). “이 벽지작업이 특히 재미있어요. 민속이라는 개념이 보편적인 것 같지만, 굉장히 특정하기도 해요. 그 둘을 붙여볼 수 없을까 고민해왔거든요. 유럽의 이교도적 문명을 보는 건 내게 매우 중요한 일이 되었어요. 외국인으로서 이 오래된 대륙에서 자기 존재를 증명하다 보면 이질성만 느끼게 되거든요. 동질성을 느끼려다 보니 고대까지 가게 된 거예요. 기독교가 유럽의 지배 종교가 되기 전에는 이들에게도 사냥철, 농사철에 의거한 관습, 애니미즘 같은 게 있었어요. 이교도적이라는 것도 기독교적 관점에서의 구분법이죠. 그런 요소들이 씻겨 내려가고 치워진 와중에도 곳곳에서 살아남은 흔적들이 있는데, 그걸 보면 동질감이 확 생겨요. 내게 민속은 동질감을 회복하는 제 나름의 방법이에요. 수공예에 관심을 두는 이유도 비슷해요. 단순히 훌륭하다, 아름답다, 장인의 솜씨다, 그보다도 토착종교처럼 살아남은 그 생명력을 보는 거죠.” “물론 제게도 일상이 있어요. 하지만 그것만이 리얼리티라 생각하지 않아요. 뜬구름 잡는 개념적인 얘기도, 제 모난 성격도 리얼리티의 일부죠. 리얼하게 살거나 보는 건, 미술가에게 중요한 것 같아요. 마음이 실리지 않는 얘기를 할 수는 없어요. 나쁜 인간도, 허세 있는 사람도, 거짓말쟁이도 좋은 작가가 될 순 있어요. 하지만 리얼리티가 없으면 좋은 작가가 될 수 없는 것 같아요. 그런데 리얼리티만큼 또 주관적인 것도 없죠. 사전적 의미의 리얼리티, 즉 객관적 진실이 아니라 주관적으로 ‘느끼는 진실’ 같은 거죠.” ‐ 양혜규   제 작품의 신화를 창조, 유지하는 일이 현대미술가, 특히 유명 작가의 임무라는 건 공공연한 진실이지만, 야심가인 양혜규는 차라리 “인디애나 존스식 좌충우돌”을 실천하며 ‘생의 약진’을 고민한다. 하반기 뉴욕 현대미술관 재개관전, 마이애미 배스 미술관의 대규모 전시를 예정한 동시에 마닐라, 사이공에 위치한 무명의 기관 전시에도 기꺼이 참여한다. 그녀의 작업은 이전 것을 지속적으로 지우는 언러닝(unlearning)에 기반하고, 이는 자유와 해방을 의미한다. 전시장에서 드론을 띄우고 오프닝의 드레스코드를 ‘페이스 페인팅’으로 정한 양혜규는 미지의 길을 걸음으로써 해방구를 모색한다. 말하자면, 젠더와 시대의 경계를 지운 생 로랑의 의상을 입고, 얼굴에 원시적 추상화를, 손등에 고대 부족들의 신화 속 동물 ‘머리 둘 달린 독수리(Two Headed Eagle)’를 그리고는 ‘소리 나는 운동 다박머리 우주적 압축’(2019) 조각 앞에서 화보 촬영을 할 수 있는 건 양혜규가 드물게 파격적인 예술가이기 때문만은 아니란 얘기다. 시공간을 뛰어넘는 벽지작업 ‘배양과 소진’과 거듭 진화 중인 ‘솔 르윗 동차動車’ 그리고 전시장을 굴러다니는 짐볼 사이, 질서와 무질서의 규칙에 방점을 찍고 모든 움직임을 수렴하는 작가 양혜규의 존재. 양혜규의 전시장에서는 누구든 축지법을 구사할 수 있다. 공간 끝에서 끝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만으로 서로 다른 시대와 지대를 관통하는 그녀의 사유를 마주한다.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신기에 가까운 기술’이자 시간의 문제로 통용되는 축지법은 본래 땅의 펼침과 접힘 즉 공간의 문제이며, 결코 시공간이 분리될 수 없는 점에서 불가능해 보이는 간극을 연결하는 사고의 전환에 가 닿는다. 그러므로 축지법은 ‘서기 2000년이 오면’ 식의 대책 없는 희망을 다른 시대와 주체를 응시하는 동력으로 전환하는 데 꽤 요긴하게 쓰일 것이다. 돌이켜보면 양혜규가 지난 25년 내내 정체성 문제에 골몰해온 이유도 “누군가를 평가하고 분류하는 방법”을 전환하기 위해서, 시대착오적 방식을 선택한 것도 시대를 ‘리얼한’ 시각으로 읽기 위해서였다. ‘반(反)이분법적’ ‘비(非)분류적’ 같은, 양혜규를 설명하는 단어에 자주 등장하는 ‘反-’ ‘非-’ 등의 접두사는 ‘아닐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인정과 저항의 의미다. 알면 알수록 우주는 확장되고 우리는 그 중심에서 멀어지듯이, 양혜규의 ‘주관적 진실’에 가까워질수록 상상과 연대의 가능성은 더 강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