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THE
ROAD
순례길에 나선 지 스무 날 하고 이틀, 7백km쯤 걸었을 때였나. 심한 몸살에 걸렸다. 전날, 종일 보슬비가 내린다는 갈리시아 지방의 악명을 대비하지 못한 탓이었다. ‘이대로 쓰러지면 누군가 내 순례자 여권을 뒤져 신원을 알아내겠지.’ ‘내가 ‘꼬레아나’임을 알면 대사관에 신고해줄까?’ 별의별 상상을 하며 쓰러지기 일보 직전 겨우 한 사설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나는 그날 저녁의 만찬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나와 이름이 같았던 포르티지 스태프가 끓여준 따뜻한 수프, 그야말로 ‘내 영혼을 위로한 닭고기 수프’를 먹고 눈물이 핑 돌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그 요리가 포르투갈의 대표 음식 트리파스라는 것, 토마토 소스에 소의 내장 따위를 넣어 겨울에 뜨겁게 먹는 요리로 감기 기운에 효과가 좋다는 것, 그녀가 내 상태를 보고 급하게 냉장고를 뒤져 내장 대신 하몽과 햄을 넣어 변형된 트리파스를 만들어주었다는 것이다. 갑자기 부대찌개 같기도, 토마토 스튜 같기도 한 그 맛이 그리워진 건 <스페인 하숙> 때문이다. 무릎 부상으로 한쪽 다리를 절뚝거리며 ‘스페인 하숙’에 입성한 순례자가 차승원이 손수 만든 된장국을 한 숟가락 떠먹고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그 얼굴에 퍼지던 안도감의 정체를 알기에 선물 같던 9년 전 그날의 식탁이 떠오른 것이다. 기자회견에서 나영석 PD도 “순례자들에게 선물 같은 하루를 선물하고 싶었다”고 제작 의도를 밝혔다.
반면, 퇴사 여행을 계획 중인 지인이 <스페인 하숙>을 보고 ‘발트 3국 관광’과 ‘산티아고 순례길’을 두고 고민 중이라고 했을 때는 약간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발트 3국 관광 여행과 산티아고 순례길이라니. 순례길은 결코 1. 이국적인 도시를 2. 한가로이 거닐며 3. 예쁜 숙소에서 4. 맛있는 음식을 즐기는 관광 코스가 아니다. 순례자는 적게는 한 달부터 많게는 수년까지 그야말로 길 위에서 ‘사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일상이 결코 <스페인 하숙>의 특별한 하루처럼 선물 같을 순 없다. 먼저, ‘이국적인 도시’에 대하여. <스페인 하숙>이 자리 잡은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는 카스티야 지방 레온 주에 속한 자치시로 중세 시절, 카스티야-레온 왕국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프랑스길 8백km의 여정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미관 도시다. 순례길의 모든 코스가 이곳처럼 아름답진 않다는 얘기다. 국경지대 아스팔트 국도를 하염없이 걸을 때도, 아차산과 다를 바 없는 등산로가 계속되는 날도 있다. 하숙집에 묵던 순례자들이 다음 여정으로 자주 언급하던 오세브레이로만 해도 그렇다. 오세브레이로는 차도 옆 일자로 난 샛길을 마냥 걷다가 막판엔 피레네 등산급의 경사로를 지나면 나오는 산골짜기 작은 마을일 뿐이다. ‘예쁜 숙소’는 또 어떤가. 이들이 방송을 위해 잠시 빌린 알베르게는 원래 17세기경에 지어진 오래된 수도원이다. 아마도 저렴한 가격에 운영되던 대규모 공립 알베르게였을 것이다. 공립 알베르게란, 유해진이 작명한 대로 햇살이 잘 들어오고 2층 침대 대여섯 개가 띄엄띄엄 놓인 ‘아늑이’ 대신 침대에 딸린 개인 사물함이 좌우 1m 간격으로 주르륵 놓인 ‘횅이’가 가득한 곳이라고 상상하면 쉬울 것이다. ‘스페인 하숙’의 최첨단 도구를 갖춘 주방, 아늑하고 감각적인 거실은 당연히 방송을 위해 약간의 리모델링을 가한 것일 테고. 한 순례자가 ‘스페인 하숙’을 둘러보고 나서 “여기 진짜 역대급이다. 다른 알베르게가 3성이라면 여긴 5성”이라고 말한 건 결코 과장이 아니다. ‘스페인 하숙’ 정도의 시설과 청결도가 보장되어 있는, 게다가 저녁식사까지 코스로 제공되는 사설 알베르게에 머물려면 방송에 나온 13유로가 아닌 최소 25유로는 내야 할 것이다. 그마저도 도시가 아니면 찾아내기 힘들겠지만. ‘한가로운 걷기’는 가능할까. <스페인 하숙>은 겨울에 촬영했다. 겨울은 산티아고 순례길의 유일한 비수기다. 이맘때부터 여름을 거쳐 가을께에는 길 위에도 언제나 사람이 넘쳐난다. 여유를 부리다가 해 질 무렵 도착한다면 아까 말한 ‘횅이’ 객실조차 만석일지도 모른다. 샤워 시설을 한번 이용하려면 줄을 서야 할 정도다. <스페인 하숙>처럼 소수의 순례자들과 오손도손 여유를 즐기고 싶다면, 겨울을 추천한다. 눈 덮인 피레네 등산과 한겨울 야외 샤워장을 버틸 수 있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그렇다면 ‘맛있는 음식’은? 생장 피드포르의 프랑스 가정식부터 갈리시아의 문어요리 ‘뽈뽀’, 각 지방의 와인까지 순례길을 따라 로컬 푸드 도장깨기를 하는 것도 가능하다. 알베르게 공용 주방에서 음식을 해먹는 문화가 보편적이다 보니, 각국에서 모인 순례자들이 자기 나라 음식을 만들어 서로 나눠 먹는다. 진정한 가정식 부페인 셈이다. 어떤 레스토랑은 ‘스페인 하숙’이 그렇듯, 하루 동안 고생한 순례자를 위해 저렴한 가격에 ‘페레그리노 디너’를 따로 판매한다. 이해할 수 없는 건 ‘스페인 하숙’의 조식이었다. 이곳의 조식은 아침 8시 즈음 시작된다. 체크아웃은 9시경. 꼭 호텔 같다. 그러나 실제로 어떤 순례자가 오전 9시부터 걷기 시작한다면, 90%의 확률로 그날 하루는 망친다고 보면 된다. 늦게 출발한 만큼 그다음 마을엔 해가 다 지고 나서 도착할 것이고, 휴식은커녕 씻고 잠드는 게 남은 일과의 전부일 것이다. 만약, 도착한 알베르게의 숙박 인원이 이미 다 찼다면 다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몇 km나 더 걸어야 할 것이다. 대부분의 알베르게에선 조식을 제공하지 않는다. 순례자들은 어둑한 새벽 6시경, 랜턴을 켜고 길을 나선다. 그렇게 걷다가 길 위에서 발견한 아무 바에 들어가 간단한 크루아상과 커피로 끼니를 때운다. 그런데 아침 8시에 ‘비비고 만두’를 먹고 순례길을 시작한다니. 아무리 PPL이 필수불가결한 요건이라고 해도, 튀긴 만두를 먹고 오세브레이로의 가파른 오르막을 올랐을 순례자들을 떠올리면 내 속이 다 부대끼는 것 같다.
방송은 순례길 그 자체보다 순례자가 머물다 가는 알베르게에 집중했지만, 사실 순례길에서 알베르게가 차지하는 비중은 별로 크지 않다. 순례자들은 알베르게 투어도, 식도락 여행도 아닌, 자신을 찾기 위해 걷는 사람들이니까. 아름다운 기억들은 대부분 길 위에서 생겨난다. 그것도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때론 최악이라 싶던 때에. 이를테면 이정표 역할을 하던 노란색 화살표를 반대로 보는 바람에 온종일 길을 헤매다가 우연히 카스티야 운하를 발견했을 때의 경이로움이나, 땀에 흙먼지에 더러워진 내 발을 맨손으로 정성껏 마사지하던 순례자 동료를 마주했을 때의 당혹감과 놀라움, 잭 케루악의 나이브함에 대해 논쟁하다 터져버린 웃음들, 오래된 바에서 우연히 듣고 사랑에 빠져버린 마누엘 드 파야의 선율, 통증 말고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던 내 몸에 서서히 근육이 붙어가는 감각 같은 것들 말이다. “작년엔 호텔에 묵었지. 하지만 따뜻하지 않았어. 이 알베르게 참 좋다.” “그러게. 기대를 하지 않으면 좀 더 좋은 경험을 할 수 있어.” 덴마크에서 온 노부부가 우연히 들어온 ‘스페인 하숙’을 둘러보면서 나눈 대화다. 어쩌면 여기에 순례자의 지혜가 담겨 있는지도 모르겠다. <스페인 하숙>을 보고 너무 많은 기대를 안고 순례길에 나서지 않기를. 그러면 선물 같은 경험을 할 수 있을 테니까. 물론, 그 선물은 언제나 당신의 등 뒤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배달될 테지만 말이다.